30. 빛 (5)
나는 잿빛세계의 심연으로 내려왔다.
파도조차 치지 않는 바다의 아래는 극단적인 적막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아주 거대한 그릇에 담긴 물처럼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고 살아있는 것의 존재감이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다.
물속에서 들리는 건 오로지 나의 심장 소리뿐이다. 그마저도 물에 막혀서 먹먹하게 들린다.
발이 닿지 않는 심연을 향해서 계속 내려가니 곧 빛이 사라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색감은 금방 어두워졌고, 나는 항시 발동되고 있는 밤눈 능력을 통해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호흡조차 불필요한 몸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이렇게 깊은 물속에 들어와서 움직인다는 건.」
다차원 능력을 통해 잿빛세계에 온다면 반드시 한 번은 가본 적이 있는 장소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다차원 능력을 통해 차원을 건너온 것이 아니다. 내가 와본 적이 없는 이곳에 곧바로 올 수 있었던 건, 내가 크라켄의 영혼을 추적하여 ‘강림’했기 때문이다.
「속삭이는 이비가 이 근처에 있었는데….」
핏빛세계에서 추방당했을 때, 나는 잿빛세계의 바로 이 장소에 녀석이 있다는 걸 알고 왔다.
「그런데 놈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 사이에 도망친 건가?」
‘아니.’
속삭이는 이비.
녀석이 곧 심연이다.
「뭐?」
- 인페사술령강.
녀석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물을 통해서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특정할 수 없고 얼마나 멀리서 들려오는 건지도 가늠할 수 없다. 마치 물을 타고 울린 목소리의 진동이 직접 두개골에 스며드는 듯한 감각이다.
「이비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모르겠어.’
- 다었있고리다기를너.
도통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이 내뱉는 말에서 어떤 단어가 들렸던 것 같다. 인간의 말이 아닌 것 같지만 인간의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녀석의 다음 속삭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다었싶고누나를기야이와너.
들렸다.
‘거꾸로 말하고 있어.’
지적 활동 7계가 없었다면 녀석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나는 이비의 말을 머릿속에 문장으로 나열한 후 거꾸로 뒤집었다.
귀로 들으면 모르지만 머릿속에서 문장으로 만들어 생각하면 듣는 즉시 이해할 수 있다.
「말을 왜 거꾸로 하냐…. 진짜 가관이네.」
가라앉은 카프하니드는 말을 할 줄 몰랐다. 싸울 때 녀석의 모습은 그리 지능적이라고도 할 수 없었고, 녀석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기나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어가는 델펜토르는 카프하니드와 같았다. 말을 할 줄 모르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지 어떤지도 몰랐다. 다만 델펜토르는 전략적인 면에서 카프하니드보다는 더 교활하게 싸웠다.
깨부수는 론은 직접 샤의 명령을 받고서 싸웠다. 그 싸움에는 내가 모르는 노림수가 있었고, 론은 그것을 잘 숨겨서 날 속이기도 했다. 따라서 론이 인간의 말을 하는 건 못 봤지만, 샤의 명령을 들었다는 측면에서 최소한 ‘언어’라는 것은 이해하는 녀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쏟아붓는 스퀴아의 언어적 능력은 모르겠고.
몰아치는 만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예상할 수 있다.
‘지능.’
「지능?」
악마의 하수인 벨드샤, 벨로움.
악마 미크쉬.
그리고 샤.
강한 녀석일수록 더 교활했다.
더 똑똑했다. 더 사악했다.
따라서 크라켄도 같을 것이다. 카프하니드보다 델펜토르가, 델펜토르보다 론이, 론보다 스퀴아가, 스퀴아보다 만타가, 만타보다 이비가 더 똑똑한 것이다. 더 교활한 것이다. 더 사악한 것이다.
「그 추측이 사실인지는 나중에 실재세계에 가서 물어보자고.」
‘그래야지.’
- 사술령강.
강령술사.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모습부터 드러내.”
- 다이것일죽를나는너.
너는 나를 죽일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이야기할 기회도 없을 텐데.”
- …지겠없는수을숨서에앞의너, 론물.
물론, 너의 앞에서 숨을 수는 없겠지.
이윽고 속삭이는 이비가 내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머리로부터 기괴한 팔처럼 이어진 기관이 등불처럼 주변을 밝혔다.
「와, 존나 못생겼네 진짜.」
정말이지 마귀를 쏙 빼닮은 물고기가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 아닐까.
덩치는 론과 비슷하다. 육체는 길이가 짧고 뚱뚱한 물고기처럼 생겼다. 두 눈은 병에 걸려 실명한 것처럼 하얗게 셌다. 지느러미는 뼈처럼 단단하고 가시처럼 뾰족하다.
그리고 턱이 지나치게 크다. 턱이 너무 커서 몸통보다 더 넓어 보인다. 게다가 제멋대로 박혀있는 이빨도 너무 길어서, 녀석이 스스로 턱을 다물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이비. 맞지?’
「속삭이는 이비.」
「미크쉬의 163번째 크라켄. 7427의 악.」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비를 죽일 수 있다. 그리고 녀석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녀석을 죽일 생각이다.
하지만 녀석이 내뱉는 말에서 어떤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삭이는 이비.’
그 악명답게 녀석의 교활한 속삭임에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을 것이다.
“할 말이 뭔데?”
어차피 정보의 습득만 끝나면 녀석을 죽일 거니까. 녀석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그럴 자신이 있으니까.
- 안리, 생동의너.
너의 동생, 리안.
* * *
페인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 멈춰있다.
이비의 머리로부터 이어진 기관이 그의 앞에서 등불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 리안의 영혼이 지옥에 갇혀 울부짖고 있다.
- 화형을 당해서 죽었던 그 영혼이 또다시 지옥불에 삼켜져 울부짖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내 동생을 어떻게 알아? 걔가 지옥에서 그러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 한참 전에 미크쉬가 말해주었기 때문이지.
그러자 적막이 흘렀다.
페인의 방독면 끄트머리가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이비를 향했다.
“거짓말이잖아.”
- 믿고 말고는 너의 자유다.
- 하지만 난 이것이 신뢰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너의 꿈속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구원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지.
이비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 샤는 차원에 균열을 일으켜 인과율을 망친 존재다. 그런 존재가 한 인간의 영혼을 붙잡아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 샤는 너의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할 것이다. 언젠간 네가 주저앉아서 그만하라며 애원하기를 바라고 있지. 그것 또한 일종의 유희다.
이쯤에서 페인은 질문할 수밖에 없다.
“네가 나한테 그걸 왜 알려주는데?”
- 나는 너의 악귀가 되고 싶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 너의 안에 있는 악령이 부럽다.
- 마음껏 사냥하고, 움직이고, 차원을 넘으며 다양한 세계를 보고, 경험하지.
악귀가 된다는 건 곧 자발적으로 페인의 편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 너도 알고 있지 않나?
-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 동족애나 대의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 나는 지옥이나 샤에게 복종한 적이 없다. 나는 미크쉬에게 복종했지. 미크쉬가 샤에게 복종했기 때문에 나도 간접적으로 샤에게 복종하는 형태가 되었을 뿐이다.
- 하지만 미크쉬는 이제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해 찾아갈 것이다.
- 너의 입장에서도 괜찮은 제안이 아닌가?
- 나를 죽이는 것보다는, 나를 악귀로 삼아서 부리는 편이 너에게 이득일 것이다.
“리안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나는 신뢰의 첫걸음을 만들기 위해 너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다.
- 리안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잘 모른다.
- 어쩌면…. 샤를 해치운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샤를 해치우고서 샤가 갖고 있던 만악을 흡수하게 된다면, 정말로 지옥의 주인이 될 테니 못할 것도 없겠지.
만약 이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만약, 만약, 만에 하나라도 이비의 말이 사실이고, 이비의 말이 진심이라면.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어.”
- 알겠다고 하면서 날 믿지 않는 눈치다.
- 다른 질문이 있나?
“절대 안 믿지.”
그러면서도 페인은 물었다.
“그래서 너는 그냥, 내 악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야?”
그러자 이비는 더 깊은 속내를 이야기했다.
그것이 정말로 이비의 속내인지는 모르지만.
- 너의 악귀가 되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충분히 힘을 키우고 싶다.
- 그리고 훗날, 지옥의 주인이 되고 싶다.
“대단한 야망이네.”
- 만약 네가 지옥의 주인이 되겠다면 나는 이인자로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넌 지옥의 주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정말로 가고 싶은 세계는 지옥도 천국도 아닌, 실재세계이기 때문이지.
“크라켄이 지옥의 실세가 되겠다고….”
- 나의 형제들은 모두 업보를 쌓아 승천하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채 창조되었다.
- 나는 그 저주를 극복하고서 크라켄을 초월하고 싶다. 피조물, 악마의 하수인을 넘어 진짜 악마가 되어 지옥을 지배하고 싶다.
-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다.
- 이제 너의 악귀가 되고 싶다는 내 주장에 설득력이 좀 생겼나?
“설득력은 있는 말이야. 충분히.”
- 설득력만 있다면 ‘신뢰’는 없어도 된다.
- 태어나 처음부터 신뢰할 수 있는 존재란 어디에도 없다. 이 역시도 너라면 뼈저리게 알고 있겠지.
- 우리 사이의 신뢰는 조금씩 쌓아가면 된다.
페인은 망설임 없이 이비에게 접근했다.
이비의 환한 등불 아래에서 이비의 흉악한 이빨을 보며 말했다.
“크라켄을 목줄로 묶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 가능하다.
- 나는 처음부터 너의 악귀가 되기 위해 잿빛세계에 온 것이다.
- 내 영혼은 이 세계에 충분히 동화되었다. 이제는 이물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때였다.
「지, 진짜네…?」
정말로 목줄 능력이 발동되는 것이다.
이윽고 그의 안에 있는 악령은 이비를 목줄로 묶어서 페인의 악귀로 만들어버렸다.
「이비를 묶었어!」
- 나를 이용해라. 악귀로서 너를 돕겠다.
이비는 그렇게 주장했다. 물론 이비가 페인을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페인은 명령했다. 물론 페인이 이비를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를 전혀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 일은 명확했다.
“먹어치우는 헤이거스, 노래하는 누샤니움토.”
- 나보다 일찍 창조된 형제들이다.
“네가 헤이거스를 죽여.”
- 헤이거스는 나보다 강하다.
“너는 너보다 약한 것들만 골라서 싸워왔냐?”
그러자 이비는 페인으로부터 조금 뒤로 떨어졌다.
잠시 고민하고 망설인 걸까.
- …정말로 내가 헤이거스를 해치우게 된다면, 너는 나를 신뢰하게 되는 건가? 지금보다는.
페인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즉답했다.
“그래.”
- 알겠다.
- 그런데 당장 지옥으로 가서 리안을 구할 생각은 없나? 지금도 지옥불에 불태워지고 있으니 1분 1초가 작열통(灼熱痛)의 연속일 텐데.
“당장 구하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 진입할 수는 없으니까……. 남은 크라켄들을 최대한 빠르게 해치우고 지옥에 가는 맞는 순서야.”
- 너무 이성적인 결정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다.
“믿고 말고는 너의 자유지.”
* * *
셰르카의 저택.
지하실.
“내가 천국의 안식실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결국 내게도 업보가 있으니 지옥에서 무엇을 하든 끝장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셰르카와 페인은 탁자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그러다 내가 업보를 무시하든, 씻어내든, 흑마법으로 뭔가를 해서 실재세계에 돌아올 수 있는 수단을 갖추게 된다면 좋겠지.”
“그게 아니면 내가 너를 돌려보내거나?”
“그것도 괜찮겠다.”
“의외네. 너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건 처음 알았어.”
“당연하다. 나는 애당초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흑마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지. 어쩌면 지옥을 극복하고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셰르카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곤히 잠든 이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인과율을 고치고 이 세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리게 된다면…. 원래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될 것들이 전부 사라진다는 게 아닌가.”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지.”
“…너는 반드시 돌아올 생각이냐? 그때 가서, 네가 알던 것들이 사라진 세계를 직접 보고도 말이다.”
“너는?”
그녀는 침묵했다.
그러다 굳은 얼굴을 능글맞은 웃음기로 덮어버렸다.
“말했다시피 나는 실재세계로 돌아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내 생각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 그러니 일단은 이기고 볼 일이다.”
“….”
“그리고 이후의 일은 너와 함께 고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