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비탄하는 세계를 등지고서 (3)
“누샤니움토의 꿈에서 뭘 봤지?”
“자멸…. 그리고 종말이었어요.”
이제 누샤니움토가 크라켄들의 공격 끝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인류의 마지막이었어요.”
그 마침표란, 자멸로 인한 종말이었다.
* * *
노래하는 누샤니움토에게 당해서 자아를 잃게 된 사람의 몸은 빈껍데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주문을 입으로 외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진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일부인 입과 혀를 움직여서 마법을 발동하는 것이다.
“…역조.”
평야에서 싸우고 있는 연합군과 누샤니움토의 군단. 그들 사이에서 물의 마법사 파보크가 강력한 마법을 휘두르고 있다.
퍼어엉! 퍼엉!
그를 중심으로 얕은 웅덩이가 생기고 그 웅덩이로부터 살인적인 물줄기가 솟아났다. 그의 물줄기는 연합군과 군단을 가리지 않고 찢어발겼다.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칼을 휘둘렀다. 칼을 놓치면 무작정 달려들어서 주먹질이라도 했다.
마법사들은 막무가내로 마법을 발동하다가 영력이 떨어지면 아무나 붙잡고 주먹을 휘두르거나 짐승처럼 상대를 물어뜯기도 했다.
다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다움은 찾아볼 수 없게 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를 가리지 않고 되는대로 싸우는 연합군의 모습은 광기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었다.
또한 누샤니움토가 퍼뜨린 광기는 이 전장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누샤니움토에게 당해서 자아를 잃은 자들은 대륙 전체에 있었다.
바로 이곳, 세인트 왕국에 있는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
“….”
함성도 비명도 신음도 일말의 대화도 없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만, 그들의 초점 없는 눈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마치 살로 된 인형들이 싸우는 것처럼 괴리감이 있었다.
왕국의 모든 거리에서 사람들이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물어뜯고 할퀸다. 건물 안에서는 일가족이 서로를 때리며, 부엌에서 칼을 들고 와 자신의 부모나 자식을 찌르기도 하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무너진 건물을 함께 복구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서로에게 곡괭이나 망치를 휘둘러 상대방의 두개골을 깨부수고 있다.
무장하고 있는 병사들의 칼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떨어졌다. 사람들은 아무나 죽이려고 했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걸 들어서 싸웠다.
무기가 많은 뒷골목에서는 더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중에는 해결사, 용병, 어딘가의 사병, 자객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뒷골목조차도 다른 구역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콰르릉!!!
중앙교회를 포함해 모든 교회에서 신관과 퇴마술사들이 마법을 부리며 서로를 죽이고 있다. 허공에서 터지는 성스러운 빛이 무고한 자들을 살해하고 사악한 것에게 떨어져야 할 천벌이 백성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게다가 왕궁에서는 병사, 하인, 신하, 신하들의 가족, 온갖 관계자들이 칼과 주먹을 휘두르며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왕궁을 이루는 건물이 통째로 무너졌다.
쿠구구궁!!!
왕의 시신을 짓밟고 있는, 이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
“발키리의……. 낙뢰….”
승천자는 왕궁의 상공에 마법진을 전개하고 도심을 폭격했다. 그가 마법을 한 번씩 발동할 때마다 수백 단위의 백성들이 죽어갔다.
* * *
셰르카가 전개한 영혼의 벽이 북쪽으로 가는 길을 크게 틀어막고 있다.
그래서 나는 셰르카, 아그니샤, 매, 독수리를 올빼미와 거미 악귀들에게 맡긴 채 자리를 피했다.
타다닷!
그리고 잿빛세계를 거쳐서 실재세계로 돌아와, 영혼의 벽 반대편 땅으로 이동했다.
키이잉!
불나방을 소환해서 상공을 재빠르게 가로질렀다. 산맥을 두 번 넘으니 자갈로 된 해안과 수평선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 끼이이이이…!
- 카하아아!!
- 꾸르르르르르!!
누샤니움토의 군단이 해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안을 따라 가득한 군단이 떼 지어 상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의 머릿수는 저 넓은 바다 아래에 있는 생물들을 모조리 꺼내서 억지로 육지에 올린 것처럼 압도적이었다. 당장 해안에 보이는 군단의 숫자만으로도 종말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을 법하다. 누샤니움토가 없더라도 이것들이 온 대륙에 퍼져나간다면 정말로 인류를 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인류는 자멸하고 있다. 지금 각국의 거리에서, 건물에서,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내가 아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리라.
‘제발.’
누샤니움토를 죽였을 때 녀석의 군단이 무력화되는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누샤니움토를 죽였을 때 모두가 제정신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아니면 녀석을 죽이면서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정말로 종말이다.
내 손을 아득히 벗어나는 참상이 된다.
「찾았다! 저놈이야!」
노래하는 누샤니움토. 9815의 악을 갖고 있는 크라켄.
녀석은 알록달록한 촉수가 달린 산호와 독버섯이 합쳐진 것처럼 생겼다. 불가사리 같은 다리를 수십 개인가 달고서 들끓는 군단 사이를 아주 천천히 기어 다니고 있다.
나는 불나방의 등에 바짝 붙었다.
부우우웅!!!
나는 상공에서 누샤니움토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그러다 도중에 불나방에게서 떨어졌다. 그렇게 불나방을 누샤니움토에게 먼저 보냈다.
…퍼어억!!
불나방은 누샤니움토의 촉수에 붙잡혀서 터졌다. 나는 불나방이 터지면서 생겨난 피를 조종하여 누샤니움토의 촉수 사이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푸르르르륵!!!
그러자 누샤니움토는 촉수를 뱉어냈다. 그 모습이 창자를 토출하던 델펜토르와 비슷했다.
스스스슷…!
그리고 녀석은 새로운 촉수를 꺼내어 내게 날리는 것이다.
나는 공중에서 촉수를 연달아 베어내며 추락했다. 이대로라면 녀석의 군단이 빼곡한 해안에 떨어질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비린내 진동하는 놈들은 방혈이 잘 안 통해. 제물방류도 제대로 못 쓸 거야.」
‘열폭풍.’
나는 아껴둔 영력을 한껏 소모하여 작은 태양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 뜨거운 것을 누샤니움토에게 떨어뜨렸다.
콰아아아아아!!!!
근처의 바닷물까지 순식간에 끓어서 사라지는 열기였다. 아직 공중에 있는 나는 방독면과 도끼가 새빨갛게 달궈졌고, 열폭풍은 누샤니움토를 중심으로 둥글게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솟아올라 비까지 쏟아지게 하였다.
그렇게 누샤니움토 주변의 군단은 재 가루가 되었다.
해안의 자갈들이 새빨갛게 달궈졌고 어떤 곳에서는 자갈이 녹아 용암의 웅덩이가 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누샤니움토는 멀쩡하다.
…쿠직!
녀석의 앞에 착지하니 달궈진 자갈이 부서졌다.
“강령술사. 페인.”
“…누샤니움토.”
지체할 것 없다. 나는 녀석에게 손아귀를 뻗었다.
「발화 7계.」
「초고온(超高溫).」
내 손아귀로부터 백색에 가까운 화염이 녀석에게 방사되었다.
‘당장 죽여야 해.’
녀석의 육체가 새하얀 화염에 가려졌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빗줄기가 공중에서 사라졌다. 뜨거운 공기가 온 사방으로 퍼지는 바람의 벽이 되었다.
그래도 녀석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걸로도 화력이 부족한 것이다.
「발화 8계.」
「임계점(臨界點).」
내 손아귀로부터 방사되던 화염이 점점 비좁아지다가 하나의 직선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키이이이이이!!!!
화염은 굉음을 내는 초록색 선이 되어서 누샤니움토의 몸체를 통과하여 저 멀리 뻗어가 녀석의 군단에게 닿았다. 이윽고 초록색 선이 지나간 방향으로 공기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수백 마리를 터뜨려 죽였다.
동시에 누샤니움토의 살점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윽고 녀석의 살점은 달궈진 자갈 위에 떨어져 익거나 근처 바다에 빠졌다.
“크라켄에 이어서 지옥까지…. 많이도 먹어치웠군.”
누샤니움토는 상처를 수복했다.
벌어졌던 상처가 다시 붙는다거나 살점이 없어진 부위에 새살이 차오른다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안 보였다.
1초 전까지만 해도 상처투성이였던 몸인데, 다시 보니 어느새 상처가 없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시간 안에도 수복할 수 있다는 거겠지.’
「론보다 뛰어난 방어, 델펜토르보다 뛰어난 회복력……. 까다로운 몸뚱이네.」
그래도 돌파구는 있을 것이다.
까다롭지만, 결국 미크쉬보다는 약한 존재다.
「놈의 정신을 노릴까?」
‘정신계 능력의 괴물이야.’
「그럼 영혼을 노릴까?」
하나씩 시도하고 녀석의 대응을 관찰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다 때려 박아.’
쿠지지직….
내 피를 뽑아내서 도끼에 둘렀다. 피를 머금은 도끼는 스스로 살점을 만들어 촉수와 눈알과 이빨을 달았다. 그렇게 내 안의 악령에게 육체를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누샤니움토가 말했다.
“그 힘은 우리의 것이다.”
나는 즉답한다.
“너희가 먼저 이 세계를 빼앗으려고 했잖아.”
나는 광속을 발동하여 누샤니움토에게 돌진했다. 투시와 영안을 발동하여 누샤니움토의 실재하는 육체와 그 안에서 흐르고 있는 영혼의 움직임까지 읽었다.
‘재결합 8계.’
‘지반붕괴(地盤崩壞).’
누샤니움토와 나 사이의 땅이 완벽하게 수직으로 꺼졌다. 이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바닷물에 증기폭발을 걸어 암석으로 된 벽을 부수고 그렇게 튀어나온 돌 파편들을 하나씩 재결합으로 빚어서 극단적으로 예리한 칼날처럼 만들었다.
느려진 시간감각 속에서 누샤니움토의 몸에 수많은 생채기가 생겼다.
「방혈 7계.」
「영혼축출.」
생채기가 생긴 부위로부터 영안으로만 보이는 영혼이 흘러나왔다.
‘방혈 8계.’
‘매혈(買血).’
나는 그 영혼의 일부를 내게 끌어왔다. 그리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그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자 앞서 강력한 주술을 발동한 대가로 소모했던 영력이 금세 차올랐다.
‘열폭풍.’
내 앞에 태양 같은 구체를 다시 소환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열폭풍이라는 형태로 폭발하기 전에 나는 땅을 박차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누샤니움토보다 높게, 지반붕괴로 만들어낸 구덩이보다 훨씬 높게 뛰어올랐다.
‘닫아버려.’
「재결합.」
그런 직후 구덩이의 위쪽이 자갈로 된 천장으로 닫혀버렸다. 곧이어 구덩이로 쏟아지던 바닷물이 자갈로 된 땅 위에 퍼졌다.
콰아아아앙!!!!!
누샤니움토는 밀폐된 공간에서 열폭풍의 위력을 고스란히 받아내게 되었다. 자갈로 된 천장이 열폭풍을 버티지 못하여 폭발하자 그 위를 덮고 있던 바닷물이 두 번째 방패가 되어주었다.
나는 안전한 땅을 골라서 착지했다.
열폭풍이 꺼졌고, 녀석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온 사방에서 녀석의 군단이 우르르 모여들고 있다. 바다에서도 녀석의 군단이 올라와 내게 앞다투어 뛰어오고 있다.
「놈이 죽어도 군단은 계속 남아서 싸울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놈이 죽지 않았다는 거지.’
이윽고 녀석의 사라졌던 존재감이 내 뒤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쿠적쿠적쿠적쿠적!!!
뒤를 보니 누샤니움토가 땅을 헤집고 나온 것이다.
그 밀폐된 공간에서 온갖 주술에 당하고 열폭풍까지 고스란히 받아냈을 텐데,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
솔직히 조금은 당황스럽다.
「이게 말이 돼…?」
상대가 악마라고 했어도 방금 그것에 당했다면 멀쩡하지 못했으리라 장담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주술을 몇 개나 연계해서 발동한 것인데 말이다. 심지어 그것을 방어하거나 회피하지도 않고 전부 받아낸 놈인데.
“페인. 나는 안다.”
“뭘?”
“내가 널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안다. 그리고 내가 결국 너에게 죽임당할 것이라는 미래도.”
누샤니움토는 촉수를 길게 빼냈다. 허공에서 기이하게 움직이는 촉수들이 너무 많아서 녀석의 뒤쪽 해안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덧 녀석의 군단이 오십 걸음 근처까지 모여들었다.
“너의 세계를 파괴하기로.”
* * *
나락불탑.
상위 천사 만카라가 세운 이 불탑은 다차원 거울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구조물이다.
쿠궁! 쿠궁! 쿠궁!
나락불탑이 미묘하게 땅을 울릴 때마다 주변에서 노란빛이 번쩍였다. 그 빛 속에서 만카라 휘하의 천사들이 차원을 넘어서 이곳에 나타나는 것이다.
만카라 휘하의 천사들은 빛나는 동공에 하얀 표식이 있고 민머리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대체로 회색이 주를 이루는 가벼운 복장에 목제 같은 갑옷을 두르고 있으며, 칼날이 달린 창이나 단단한 봉이 주된 무장이다.
“보고드립니다. 저희 진영을 공격하고 있는 전방의 존재는 ‘미르파스’라는 악마로 확인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공에 아마카라교의 하얀 표식이 새겨진 남성 천사.
다른 천사들보다 덩치가 여섯 배는 커서 상대적으로 거인처럼 보이는 이 존재가 바로 상위 천사 ‘만카라’다.
“그 악마는 미르파스가 확실한가?”
“끓는 진흙이 대지를 채우고 하늘에서는 잿물로 된 소나기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 소나기를 맞은 피조물들은 분노를 표출하며 천사의 입을 찢고, 천사의 목구멍에 잿물을 들이붓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방의 상황입니다.”
그 소식을 접한 만카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미르파스는…. 본래 아마카라교의 죄인들을 징벌하는 악마였다.”
“죄인을 향한 합당한 징벌이라면 악마로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던 게 아닙니까?”
“그렇지. …내가 아는 미르파스란 샤에게 충성하지 않는 악마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서 충분히 만족하는 악마였지. 놈은 결코 무고한 영혼을 벌하지도, 세계의 인과율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이 근방의 피조물들은 모두 놈의 지배 아래에 있으니, 가능하다면 설득하는 편이 유리하다.”
또 다른 천사가 다가와서 만카라에게 보고했다.
“만카라 님. 세인트 진영과 저희 아마카라 진영 사이에 있던 사체로 된 언덕에 대한 보고입니다.”
“말하라.”
“그쪽을 정찰하던 발키리가 말하기를, 그 사체로 된 언덕들은 엑수스 님께서 만들어낸 현장이라고 합니다.”
만카라는 동료의 죽음에 탄식했다.
“그럴 줄 알았다. 엑수스 이 무모한 녀석….”
“저희는 틀림없이 페인이 만들어낸 현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만.”
“페인이 만들어낸 현장은 완전히 다르다.”
“…?”
만카라는 끄트머리에 칼날이 달린 봉을 소환하여 두 손으로 잡았다.
“엑수스가 지나간 자리에 사체로 이루어진 언덕이 생긴다면, 페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사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째서 사체가 남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페인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만카라는 나락불탑이 발하는 노란빛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전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더 많은 천사들이 합류하여 군대를 이루었다.
“그는 죄를 짊어지고, 자신을 감옥으로 삼아 악을 가두는 것이지.”
“그렇다면 지금껏 그자가 거두었던 악의 크기는…. 대다수의 악마를 능가하는 것이 아닙니까?”
“평범한 악마는 이미 넘어섰다. 그러니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밖에.”
만카라는 달관한 얼굴로 말했다.
“인류는 그가 악을 치우고 만든 공허에 선을 채워 넣어야만 할 것이다.”
* * *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덧 누샤니움토의 군단이 오십 걸음 근처까지 모여들었다.
“너의 세계를 파괴하기로.”
그러자 페인은 누샤니움토의 정곡을 찔렀다.
“론도 그런 식으로 날 상대했지. 이길 수 없으니까 아예 다른 부분을 노리는….”
투웅!!
어째서인지 페인은 들고 있던 도끼를 스스로 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거.”
다음 순간, 페인이 어떤 사고과정을 통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였는지 누샤니움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너의 꿈속이네.”
이곳, 이 세계, 이 싸움 자체가 누샤니움토의 꿈속이었다는 발언.
그의 발언에 누샤니움토는 일단 침묵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페인의 말이 누샤니움토의 자존심을 긁었다.
“네가 어떻게 날 상대로 10초 이상을 버텨? 어쩐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오만하구나…. 페인.”
“오만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그 순간, 누샤니움토는 위화감을 느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페인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있던 군단도 사라졌다.
누샤니움토는 황급히 몸체를 회전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설마….”
해안이 사라지고 바다가 사라졌다.
자갈로 된 대지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산도 바다도 언덕도 나무도 없다.
오로지 자갈만이 펼쳐진 평지였다.
또한 하늘이 까맣게 변했다.
누샤니움토를 포함해 지상의 자갈들이 새까만 하늘에 거울처럼 투영되었다.
그러니 마치 위아래로 땅이 있으며, 위아래로 자신이 있는 것 같다.
그제야 누샤니움토는 소리치는 것이다.
“이건 내 꿈이다!!!”
누샤니움토는 자기 주변에 핏물로 된 소환진을 전개하였다. 각각의 소환진으로부터 빨판 달린 촉수가 무한하게 뻗어 나와 주변 땅을 거대하게 강타했다.
“나의 꿈이란 말이다…!”
그러던 도중, 누샤니움토는 촉수를 멈췄다.
변화하는 하늘을 목도한 것이다.
새까만 하늘에 투영되고 있는 자갈의 평야와 자신의 모습.
그것이 멀어졌다.
하늘이 높아졌다. 천장이 높아지는 것처럼.
그리고 점점 더 멀어졌다.
새까만 하늘이 새까만 원으로 좁아졌다.
다시 보니 그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땅도 아니었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그것은 하늘도 땅도 아닌 ‘페인’이었다.
새까만 하늘은 페인의 거대한 렌즈였으며, 렌즈 주변에 있는 하늘은 방독면을 이루는 철이었다.
그야말로 크라켄들의 크라켄.
악마들의 악마였다.
“……불가사의하구나.”
그가 누샤니움토의 꿈을 지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