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59화 (159/181)

31. 비탄하는 세계를 등지고서 (4)

나는 누샤니움토의 꿈을 알아냈다.

누샤니움토는 이 대륙에 남은 마지막 인류를 노리고 있었다. 그간 많은 크라켄들이 다른 대륙에 있던 인류를 모조리 멸하였고, 마지막엔 누샤니움토가 나서서 인류의 종말을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다른 대륙의 인류가 무참하게 죽었다는 것.

그리고 이 대륙에 남은 마지막 인류조차 서로 싸우게 되었다는 것.

누샤니움토는 그 두 가지 사실이 내게 크나큰 충격을 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진실을 깨달은 내가 흔들리면 녀석과 나 사이에 있는 압도적인 전력의 격차가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1분 1초가 지날 때마다 무수한 인간들이 죽을 테니. 녀석은 그렇게 단 20분 정도만 시간을 끌어도 충분히 인류를 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는다는 건 누구의 마음이라도 흔들 수 있다. 당장 이 세상에 나를 제외한 인간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혹은 이 세상에 남은 문명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순간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너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지.」

내가 어째서 이토록 침착할 수 있었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최악의 상상을 했던 덕분일까. 아니면 종말이라는 ‘인식’보다 더 끔찍한 것을 ‘살갗’으로 겪었던 덕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동안 내게 남은 인간의 증거가 몇 개씩 소실된 탓일까. 어쨌든 내 안에서 절망이나 공포라는 것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능력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허풍이 아닌 뚜렷한 진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내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샤니움토는 흔들렸다.

그것이 누샤니움토의 약점이 되었다.

녀석이 자랑하던 꿈은 녀석의 악몽으로 변질되었다.

녀석이 날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녀석의 꿈속에서 나의 지배력이 강해졌다.

끝내 누샤니움토는 ‘공포’를 느꼈다.

나는 녀석의 꿈속에서 정신계 주술을 발동했다. 공포나 공황에 빠진 상대에 한해서 연계기로 쓸 수 있는 주술, 자살 충동이었다.

그렇게 녀석은 꿈속에서 자살하였고, 나는 녀석의 꿈속에서 영혼축출을 발동하여 녀석의 영혼과 목숨을 거두었다.

「누샤니움토에겐 ‘꿈’이 진짜 무기였어.」

「인간들을 모두 잠들게 하고 그들의 꿈에 개입하고 있던 거야. 일종의 암시라는 형태로.」

누구든 꿈을 꾸고 있으면 자신이 어째서 행동하고 있는 건지 망각하게 된다. 꿈속에서는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샤니움토에 의해 꿈을 꾸고 있는 자들은 현실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었다.

그중에 올빼미처럼 강력한 정신계 능력이 있는 극소수만 꿈에서 탈출하였고, 나머지는 저마다의 정신력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꿈속에서 저항하는 중이었다.

「이제 이 꿈의 주인은 너야.」

「네가 이 꿈에서 탈출하게 되면, 이 꿈속 세계와 강제로 연결된 이들도 모두 현실로 돌아가게 될 거야.」

다들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이러면 꿈에서 깨어난 자들의 눈앞에 펼쳐질 상황은….

「지옥 같다고 생각하겠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까. 어떤 국가가 멸망했고 어떤 국가가 살아남았을까.

그런 건 지금 내가 생각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 대륙에 남은 마지막 인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미 벌어진 참상이니까.

「……가자.」

나는 누샤니움토의 꿈속 세계에서 탈출하였다.

* * *

승천자. 세인트 렌달틀란크.

그는 무너진 왕궁의 잔해 위에서 도시의 참상을 눈에 담았다.

“아아….”

건물이 불타고 있다.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 누군가의 비명, 오열, 외침이 지옥의 북소리처럼 상공에서 메아리쳤다.

“내가 무슨 짓을…….”

문득, 렌달틀란크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로 물든 손에 누군가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투욱!!

그가 떨어뜨린 머리는 잔해를 따라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콧대에 걸려 멈췄다. 그러자 머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전하…?”

왕의 머리였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왕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무언가에 발이 걸려서 멈칫했다.

왕의 시체였다.

“내가…. 전하를….”

도시 전체에 폭격의 흔적이 가득하다.

좀 전에 대규모 마법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아그니샤가 없는 이 왕국에서 대규모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있는가. 누가 저 도시에 저런 끔찍한 폭격을 가할 수 있는가.

“내가아아아아아아아!!!!”

렌달틀란크는 주저앉아 오열했다. 천사가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하늘의 태양을 흐물거리는 무언가로 바꾸어버렸다. 자신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두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다가 숨이 벅차서 그만두었다.

“내가……. 아니.”

두 다리로 일어섰다. 신도복의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되뇌었다.

이 왕국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서기 위해.

“나는…. 승천자다….”

렌달틀란크는 신관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 신관들이여!

- 백성들을 보살피시오!

- 그대들의 손에 묻은 피를 보지 말고! 그대들 앞에서 절망하는 백성을 보시오…!

승천자는 하늘을 날았다.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는 거리로 내려갔다. 그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는 승천자가 들어오질 않았다.

“아, 아니야…!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누가 좀 도와주세요!”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으아앙…! 엄마아아…!”

승천자는 부상자들부터 치료하였다. 새하얀 신도복이 그의 손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우리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수, 수습해야 해! 조금이라도 빨리!”

그러고 있으니 같은 거리에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달려와서 그를 돕는 것이다.

그러다 인근 교회에 있던 신관이 달려왔다.

“승천자님!”

“신관! 이리 와서 이들을 도우세요!”

“거리에서 악령화를 일으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태워 죽이세요!!”

그의 망설임 없는 외침에 신관은 당황했다.

“하지만 악령이 된 자들의 가족이….”

승천자는 신관을 쏘아보며 강하게 반문했다.

“우리 교단이 언제는 악령의 사정을 봐준 적이 있었는지요?”

콰앙!!!

맞은편 상가에서 팔다리가 꺾인 존재가 문을 깨부수고 나왔다.

“이히히히히…! 히힉…! 다 죽였어…! 내 손으로…! 내가, 내가, 내가 다…! 히힉, 히히힉!!”

좀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었던 악령이다. 녀석의 기괴한 각도로 꺾인 팔다리로부터 예리하게 돌출된 뼈에는 희생자의 내장이 빨래처럼 걸쳐져 있었다.

녀석은 바로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히히히!!”

쩌엉…!

녀석의 머리 위로 번개 같은 빛이 떨어졌다.

파스슥…!

녀석은 몸뚱이가 숯처럼 까맣게 변한 채 쓰러져서 움찔댔다.

“저희가 맡겠습니다!”

병사들이 나서서 악령의 팔다리와 목을 베었다. 악령은 그제야 숨통이 끊어졌다.

승천자는 신관을 보며 다시 전언했다.

- 신관들이여.

- 부상자를 치료하고 악령을 처리하시오!

- 왕궁과 군대가 붕괴된 상황에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건 그대들뿐이니!

신관은 물었다.

“이것도…. 누샤니움토의 능력이었던 것입니까?”

“그런 것 같군요.”

“녀석의 사악한 군단은 북쪽에서 연합군과 전투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녀석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성서에 적혀있지 아니했단 말입니까?”

“성서에 기록할 이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애당초 누샤니움토는 이쪽 대륙에서 활동하던 크라켄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천사들이 저희에게 이런 정보는 미리 알려줄 수 있었던 게 아닙니까?”

“이 크라켄은 이런 능력이 있고, 저 크라켄은 저런 능력이 있다…. 알았다면 진작 알려주었겠지요.”

“네…?”

“태고의 시대에 천사들도 우리처럼 적잖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승천자는 잇달아 찾아오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신관에게 말했다.

“혼돈과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에 무수한 천사와 악마들이 현계의 모든 영토를 전장으로 삼아 싸웠지요. 그중에 악마의 군단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 666마리의 크라켄에 대해서, 어찌 완벽한 정보를 거머쥘 수 있었겠습니까? 몇 세기에 걸쳐 수천만이 싸웠던 거대한 전쟁터에서 그 누가 각각의 전장에서 사라진 적군 여덟 명을 기억하고, 그 여덟 명이 어떻게 칼을 휘둘렀는지까지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뜻에 신관은 한순간 천사를 원망했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전쟁이란 기억과 역사조차 소실되게 하는 일이지요. 사실 천사들이 여덟 크라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에 여덟 크라켄이 남아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한 것만으로도 경이롭고 감사한 일입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잠시 눈이 가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핏물을 닦아내세요. 오늘 일을 기억할 후대가 남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예. 승천자님.”

모두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등불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서 승천자는 계속 되뇌는 것이다.

‘내가 왕궁을 무너뜨렸지만….’

‘이 상황에 교단까지 무너져선 안 된다….’

없는 희망이 있다고 부풀리는 거짓된 등불일지라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면 빛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빛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니게 될 것이다.

* * *

누샤니움토의 군단은 오합지졸이 되었다.

하지만 오합지졸이 된 건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아니야아아아!!!”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다고….”

“우리끼리 죽인 거야!!!”

“야, 야, 정신 차려!”

“이 새끼 악령으로 변했어!”

“여기 좀 도와줘!”

자신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중에는 극소수로 악령이 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의 혼란을 잠재우는 것들이 전장에 출몰하였으니.

- 케에에에엑!!!

악귀 군단이었다.

죽은 동료에게, 지휘관에게, 피로 물든 자신의 검에 시선이 빼앗겼던 그들은 다시금 전장을 보게 되었다.

수천 단위의 악귀 군단이 평야에 난입해서 누샤니움토의 군단을 덮친 것이다. 그렇게 괴물들이 서로 뒤엉켜서 싸우고 있는 광경에 그 누가 시선을 빼앗기지 아니할까.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이 십자가를 비처럼 떨어뜨리자, 연합군은 일단 승리라는 빛에 의식이 집중되어 앞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아그니샤 님이 오셨다!”

“저 뒤에 역병 교수들도 왔어!”

“그, 그래…! 일단 싸움부터 끝내자고!”

“저 빌어먹을 괴물들을 쓸어버려!!!”

* * *

아그니샤와 역병 교수들이 연합군 쪽으로 합류하여 누샤니움토의 군단을 순조롭게 마무리하는 중이다.

같은 순간, 이 숲속에서 셰르카는 이리를 꼭 끌어안고 있다.

“모를 것이다….”

그녀는 추위에 노출된 사람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페인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화, 화염술사들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네가 흑염을 떨어뜨린 거야?”

“드라쉬르…. 내가 분신을 만들어서 전장의 후방에 떨어뜨렸다. 각각의 드라쉬르가 사방으로 흑염을 뿜어내…. 아군 수백 명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후방이라면….”

“지휘관, 부상자, 의무병, 전령…. 그런 자들이었다….”

업보였다.

“페인…. 나는 많이 죽였다…. 광인의 숲에서 오랜 세월을…. 전에 비첸크로이 제국군 수천 명도 죽이고…. 이번에는 아군을 죽여서…. 많이….”

“퀴이익…! 퀴이이….”

이리는 그녀의 품속에서 두려움에 울고 있었다.

“심호흡부터 하자.”

언제인가 그랬다.

페인이 업보에 삼켜져 애처롭게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너를 향해 손짓하는 악의 손아귀들이 보여.”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구나….”

“퀴익…! 퀴이익…!”

“괜찮아. 내가 차단하고 있으니까.”

“영혼을 조종…. 조종할 수 있는 거냐?”

“그래. 방혈 8계에 영안까지 개방했거든.”

셰르카는 가까스로 호흡을 되찾았다. 점차 몸의 떨림이 잦아들고, 이리는 울음을 멈추었다.

“후으으….”

“이제 괜찮냐?”

“미안하다. 언제는 너한테 이 순간을 경고한 주제에…. 정작 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나.”

“내가 차단하고 있는 악의 손아귀가 풀리면, 너는 곧바로 끌려가게 될 거야.”

“알지. 알고 있다.”

“내가 네 곁에 계속 붙어있을 수는 없어.”

셰르카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내 능글맞은 미소까지 되찾았다.

그녀는 둥그런 뺨을 따라 식은땀을 흘리며, 앞머리가 만든 그늘 속에 살가운 눈빛으로 페인을 올려다보았다.

“노래하는 누샤니움토는 해치웠느냐?”

“해치웠지.”

“허면, 속삭이는 이비와 먹어치우는 헤이거스가 남았구나.”

「이비가 헤이거스를 잡아먹었어.」

「이비는 주술적인 능력이 뛰어나더라고. 큰 부상을 입긴 했지만.」

셰르카는 이리를 접어서 손에 지팡이처럼 들었다.

“왕국이 걱정되진 않으냐?”

“걱정되는 것 같아.”

“가서 수습 좀 해주고, 너의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도 해야겠구나. 지옥으로 가기 전에 재정비도 하고.”

“그전에 이비부터 보러 가야 해.”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너의 악귀가 된 녀석이 아니더냐. 기특하게도 자기보다 강한 크라켄을 죽였으니,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는 잿빛세계로 돌려보내서 쉬라고 하면 될 것을.”

키이잉!

페인은 불나방 두 마리를 소환했다.

“이비는 부릴 수 있는 주술이 많아. 그중에는 흑마법과 연계된 지식도 분명히 있을 거야.”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셰르카는 다시 물었다.

“이비도 우리와 함께 가는 게 아니었나?”

“아니야. 처음부터 녀석과 함께 갈 생각은 없었어.”

“…그렇게 결정하게 된 계기라도 있었던 모양이구나.”

“있었지. 처음부터 거짓말을 들켰거든.”

물론 지금 이비는 자신의 거짓말이 페인에게 들통났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헤이거스의 사체 옆에서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다.

“그리고 너도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지는 편이 좋을 거야. 지옥에 갈 테니까.”

이어서 페인은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비를 먹이로 주자고. 이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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