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비탄하는 세계를 등지고서 (5)
이비는 헤이거스의 사체 옆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바닷물을 한번 빨아들이고 내쉴 때마다 아가미를 통해 방대한 선혈이 번져나갔다.
쿠왁!!
잠시 쉬고 있던 이비는 다시 헤이거스의 사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몸통보다 큰 턱을 움직여서 자기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헤이거스의 살점을 우적우적 씹어서 삼켰다.
그러다 이비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뚜두둑…! 뚜둑…!
뚱뚱했던 몸이 다소 길어지고, 배에 달려있던 뾰족한 지느러미 두 개가 개구리의 앞다리처럼 변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비는 말을 거꾸로 하지 않게 되었다.
“동족상잔도…. 업보였지….”
뚜둑!!
꼬리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갈라졌다. 좌우로 갈라진 각각의 꼬리는 개구리의 뒷다리처럼 변하였다.
“지금이라면….”
이비는 반쯤 뼈만 남은 헤이거스의 사체를 뒤로 한 채 바닷속 밑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뚜둑…! 뚜둑…!
기어가는 와중에도 이비의 몸은 변화했다. 턱의 크기가 작아졌고 지나치게 길었던 이빨들이 전부 빠져버렸다. 그리고 피로 물든 잇몸 부분에서 가지런한 송곳 같은 이빨이 잇몸을 찢으며 촘촘하게 자라났다.
그렇게 변화하며 기어가고 있으니 수면이 가까워졌다. 심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햇빛이 강렬하다.
“……진화(進化).”
병든 것처럼 하얗던 눈알이 뱀의 동공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서 개구리 같던 네 다리가 더 길어졌다. 또한 개구리처럼 바닥에 깔고 있던 배를 떼어냈다. 이제 바닥에 몸이 끌리지 않는다. 전보다 더 빠르게 기어갈 수 있게 되었다.
터업!
아가미가 닫혔다. 위턱의 정중앙에 콧구멍이 생겼다. 아래턱에서는 수염 같은 촉수가 자라났다.
“흐흐흐…”
속삭이는 이비는 마침내 해안으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없는 모래사장이다.
“하하하하하하!!!”
이비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다가 태양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로부터 핏물이 떨어져 모래알을 더럽혔다.
그러다 웃음을 뚝 그쳤다.
“…흑마법?”
샤아아!
검은 소용돌이가 이비 앞에 생겨났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걸어 나온 자들은 페인과 셰르카였다.
“축하해.”
“페인! 네가 누샤니움토를 해치웠군!”
“그보다 헤이거스는 확실하게 마무리했겠지?”
“나의 육체를 보아라!”
페인은 이비의 변화된 육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놈이 갖고 있던 업보를 성공적으로 빼앗을 수 있었다…. 형제를 죽였다는 개념으로 말이다. …이렇게 진화된 육체야말로 내가 헤이거스를 해치웠다는 증거지.”
“진화?”
“하하하! 말해봤자 너는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할 현상이다!”
“…그러냐.”
“그래도 이만큼 했으면 날 조금은 신뢰할 수 있게 되었겠지? 나는 자진해서 악귀가 되었고, 목숨을 걸고서 헤이거스를 쓰러뜨렸으니까!”
“정말로 나를 위해, 내 명령 때문에 헤이거스를 죽인 거야?”
“…?”
저벅저벅.
셰르카가 이비에게 접근했다.
페인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비는 뱀 같은 동공을 움직여 페인을 쳐다보다가, 셰르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퀴이이……”
순간, 이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곧 축소되었다.
이비는 물었다.
“…왜지?”
페인은 답했다.
“왜긴. 네가 나중에 내 뒤통수를 칠 게 뻔하니까 그러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다 읽혔다고. 처음부터.”
* * *
약 17시간 전, 잿빛세계의 먼바다.
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 멈췄다.
이비의 머리로부터 이어진 기관이 내 앞에서 등불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리인의 영혼이 지옥에 갇혀 울부짖고 있다.
어차피 놈들은 내 이름, 내 일생, 내 경험을 전부 꿰차고 있었다. 그러니 리인의 이름을 꺼낸다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 화형을 당해서 죽었던 그 영혼이 또다시 지옥불에 삼켜져 울부짖고 있다.
일단 내게는 굉장히 자극적인 말이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리인의 이야기라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비가 그 사실을 알고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리인의 이름을 곧바로 언급하지 않으면, 이비는 나를 마주친 순간 죽임당했을 테니까.
그래서 일단 나는 이비가 리인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다.
“……네가 내 동생을 어떻게 알아?”
리인이 지옥에서 불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들어보려고 했다.
“걔가 지옥에서 그러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러자 이비는 대답했다.
- 한참 전에 미크쉬가 말해주었기 때문이지.
준비된 대답처럼 곧바로 나온 말에 완성도가 있었다.
한참 전에.
미크쉬가.
자신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즉, 그때 미크쉬가 죽어있었다고 해도 ‘한참 전에’ 해준 이야기라고 덧붙여 대답하면 오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그 어느 크라켄도 언급하지 않았던 크라켄들의 창조자인 악마, ‘미크쉬’를 들먹이며 미크쉬가 자신에게 직접 그 정보를 줬다고 하는 것이다.
나로선 죽은 미크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짓말이잖아.”
- 믿고 말고는 너의 자유다.
이비는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말들을 꺼낼 의지가 없었다. 그냥 나의 판단에, 논리가 없는 직감에 맡기기를 원하는 것처럼.
- 하지만 난 이것이 신뢰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설득력을 만들려고 했다.
- 너의 꿈속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구원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지.
마치 자신이 직접 알아낸 것처럼 내 꿈을 언급했다. 마치 자신이 내 꿈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처럼.
좀 전에는 미크쉬가 말해줬다고 했으면서.
- 샤는 차원에 균열을 일으켜 인과율을 망친 존재다. 그런 존재가 한 인간의 영혼을 붙잡아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샤가 그럴 틈이 있었을까.
리인의 영혼은 잿빛세계에서 분명히 ‘성불’하였다. 성불한 영혼은 천계로 가거나, 실재세계에 남아 윤회하게 된다.
리인의 영혼이 천계로 갔다면 샤가 나설 틈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리인의 영혼이 실재세계로 돌아가 윤회하게 되었다면, 이미 리인의 영혼은 육체를 가진 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채였을 것이다.
따라서 리인이 잿빛세계에서 성불한 시점에 샤가 개입할 틈은 없었다.
실재세계에 강림하여 크라켄들을 깨우고는 금방 돌아가야만 했던 샤다.
- 샤는 너의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할 것이다. 언젠간 네가 주저앉아서 그만하라며 애원하기를 바라고 있지. 그것 또한 일종의 유희다.
이비는 샤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속삭였다. 하지만 샤가 이비에게 뭔가를 말할 틈은 없었을 것이다. 샤가 실재세계에 강림했을 때 동선은 델펜토르를 지나서 왕국 근처에 있는 론에게 향했으니.
「리인이 너의 약점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정말로 그게 약점이고, 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애당초 샤가 실재세계에 강림했을 때 리인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을까?」
「널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샤는 내 앞에 강림했을 때 리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비를 더욱 강하게 의심했다.
‘샤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그냥 지껄이는 것 같은데.’
나는 이비의 주장을 듣고 싶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샤의 주장이 아니라.
“네가 나한테 그걸 왜 알려주는데?”
- 나는 너의 악귀가 되고 싶다.
그 돌발적인 대답은 내 집중력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 너의 안에 있는 악령이 부럽다.
- 마음껏 사냥하고, 움직이고, 차원을 넘으며 다양한 세계를 보고, 경험하지.
이비가 주장하는 자신의 진의.
그리고 이어지는 설득을 위한 초석.
- 너도 알고 있지 않나?
-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 동족애나 대의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 지옥이나 샤에게 복종한 적이 없다. 나는 미크쉬에게 복종했지. 미크쉬가 샤에게 복종했기 때문에 나도 간접적으로 샤에게 복종하는 형태가 되었을 뿐이다.
- 하지만 미크쉬는 이제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해 찾아갈 것이다.
이비는 미크쉬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 너의 입장에서도 괜찮은 제안이 아닌가?
이비는 내 입장을 분석해두었다.
- 나를 죽이는 것보다는, 나를 악귀로 삼아서 부리는 편이 너에게 이득일 것이다.
물론 이비는 다른 악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비가 강하다고 해서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비가 강하다는 것만으로 내 악귀가 되기엔 설득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이비를 조금 몰아붙이기로 했다.
그 말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니까 새로운 걸 제시하라고.
“리인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나는 신뢰의 첫걸음을 만들기 위해 너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다.
- 리인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잘 모른다.
모른다며 회피했다.
- 어쩌면…. 샤를 해치운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샤를 해치우고서 샤가 갖고 있던 만악을 흡수하게 된다면, 정말로 지옥의 주인이 될 테니 못할 것도 없겠지.
물론, 이비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전무한 건 아니었기에.
“……알겠어.”
그때 내가 알겠다고 대답한 시점에서 그냥 끝냈으면 곧바로 악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비는 몇 걸음을 더 내디뎠다.
- 알겠다고 하면서 날 믿지 않는 눈치다.
- 다른 질문이 있나?
“절대 안 믿지.”
그리고 오히려 질문을 해도 좋다는 뜻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대답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대로 악귀가 되기엔 내심 불만족스럽고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이비는 악귀가 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더 나눠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너는 그냥, 내 악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야?”
- 너의 악귀가 되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충분히 힘을 키우고 싶다.
- 그리고 훗날, 지옥의 주인이 되고 싶다.
그런 대화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이비는 말했다.
- 그런데 당장 지옥으로 가서 리인을 구할 생각은 없나?
- 지금도 지옥불에 불태워지고 있으니 1분 1초가 작열통의 연속일 텐데.
그때 확신이 생겼다.
이비의 목적은 지옥에 가는 것이라고.
내 곁에서 사냥하며 업보를 쌓고, 강해지는 것이라고.
그 끝에 이비가 어떤 결정을 하게 될지는 뻔했다.
나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내 안의 악령조차 유혹 앞에 흔들려서 나를 뒷전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꿈에 그리던 지옥에 가서 힘을 키운 이비라면 어떻겠는가.
그 결과는 모순적이게도 이비가 앞서 자기 입으로 말했던 것이다.
- 너도 알고 있지 않나?
-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 동족애나 대의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훗날 이비는 내 뒤를 노리게 될 것이다.
* * *
“퀴이이익!!!”
“카하아아악…!”
이비는 구렁이 같은 이리의 촉수에 붙들려서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있다.
푸욱! 푸욱!
이리는 녀석의 아가미가 있던 부분에 억지로 촉수를 찔러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녀석의 목구멍에도 살벌한 촉수를 집어넣었다.
“퀴이이…!”
이리의 붉은 촉수 틈새로 보이는 붉은 동공의 눈알들이 사냥감을 탐하는 굶주린 야수 같았다.
그때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던 이비는 페인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비는 목구멍이 꽉 막혀서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미크쉬가 죽기 직전에 그렇게 울더라고.”
페인은 이비의 눈동자 앞에 섰다.
“도와줘, 주인님, 나를 구해줘,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그러면서 좌우로 갈라진 몸뚱이로 바닥을 벌레처럼 기어가더라.”
그의 모욕적인 언행에 이비는 분노했다. 촉수의 틈새로 선혈을 뿜어대고 성난 짐승처럼 씩씩대며 축속된 동공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미크쉬의 복수를 꿈꿨던 걸까.」
「이렇게까지 화내는 걸 보면.」
페인은 이비의 눈동자 앞에 도끼를 댔다.
“미크쉬가 너한테 알려줬다고 했지? 리인과 관련된 이야기.”
“그으으으…! 그으으으윽…!!”
“그런데 정작 미크쉬는 죽기 직전에 리인의 이야기를 하나도 꺼내지 않더라고.”
쓰어억!
페인은 살벌한 도끼로 이비의 눈알을 찢어버렸다. 투명한 체액이 피와 뒤섞인 채 모래 위에 흘렀다.
“그렇게까지 살고 싶었으면 분명히 리인을 언급했을 텐데 말이야. …너보다 훨씬 교활한 악마가 혓바닥 한번 못 놀려보고 그렇게 갔어. 재료가 없었다는 거야.”
「한마디로 이 새끼가 내뱉은 리인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거지.」
* * *
누샤니움토의 군단과 싸웠던 연합군은 처음보다 숫자가 크게 줄어든 채 각자의 국가로 해산하였다.
실재세계에 남아있던 여덟 크라켄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은 연합군으로서 싸웠던 자들의 입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것은 그간 크라켄에 떨던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희미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누샤니움토가 죽기 전에 저지른 일은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 분명했다.
왕의 옆에는 언제나 신하와 근위병들이 있으며, 어떤 나라든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이나 특출나게 강한 인재는 있는 법이었다.
강한 인재들은 만인을 학살하였다. 왕의 근처에 있던 자들은 왕을 죽이고 서로를 죽였다.
그리하여 지도층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게 된 것이며, 모든 국가가 적어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 현재다.
세인트 왕국으로 돌아온 왕국군은 망연자실했다.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된 도시를 보고 있는 것도 힘든데, 저마다 가족과 지인을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도심과 시골을 가리지 않고 악령이 빈번하게 출몰했다. 마법사, 퇴마술사, 병사들은 악령을 퇴치하느라 다시금 몸과 마음의 피를 쏟았다.
그리고 무너진 왕궁의 안뜰에 이들이 모였다.
승천자, 아그니샤, 파보크, 매, 독수리, 올빼미.
페인과 셰르카.
“……저는 등불이 되기를 자처했지만, 정작 제 자신은 백성들을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승천자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태고의 시대에 전쟁이 끝난 직후…. 우리의 선조들도 이 같은 참상을 보며 일어섰던 것일까요.”
암울한 분위기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여덟 크라켄을 모두 해치웠고, 천사와 악마가 지옥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실재세계는 안전해진 것이다. 거악을 무찌르고 이겨낸 것이다. 앞으로 수 세기는 거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그 누가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은 전쟁을 기억하며 뭐라고 할까요. 우리의 의지와 희생에 감사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지키지 못해 잃어버린 것을 원망할까요.”
승천자는 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다. 세인트 왕국의 지도층이 전멸한 지금, 사람들에겐 지도자가 필요한 법이라고.
그리고 이 상황에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싫어도 지도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을 모두가 안다.
“이 두 손으로 전하를 죽였습니다. 이런 제가 왕이 되어서 나라를 이끌라니…. 여러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파보크가 나섰다.
“승천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또한 저희라고, 백성들이라고 승천자님과 다를 건 하나도 없습니다.”
“피에도 무게가 있는 법이 아닌가.”
“어차피 누샤니움토는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상황에 죄의 경중을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아그니샤도 나섰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승천자는 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간절하게 답을 찾는 눈을 하고 있었다.
“강령술사님이라면…. 죄를 짊어진다는 고통이 무엇인지 제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모릅니다.”
페인은 딱히 승천자를 위로하거나 격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생각만을 당당하게 말할 뿐이었다.
“저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
“어떤 대단한 결의나 신념이 있던 것도 아닙니다. 머리가 시키는 방향으로, 마음이 시키는 방향으로 무작정 움직이다 보니 지금에 이른 겁니다. 그러다 필요하면 필요한 생각과 말을 했죠. 그게 옳다고 믿으면서.”
“그대라는 사람은 봐도 봐도 잘 모르겠군요.”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저도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고.”
“예….”
“그러니까 승천자님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죠. 일단은 상황이 절박하니 그것에 맞추어 움직이는 겁니다. 실수를 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짓을 하기도 하겠지만, 제가 겪어보니 망설이다가 죽는 것보다는 일단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괴물이 되기도 누군가에게 영웅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승천자님이 전하를 죽였든 살렸든 당장 사람들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상황이 절박하니, 자기들에게 필요한 지도자를 간절히 원할 뿐입니다.”
이어서 셰르카가 덧붙였다.
“이 나라의 인간들은 매질할 상대가 필요했을 때 그에게 돌을 던졌지. 그러다 크라켄이 나타나니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너라고 뭔가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느냐. 어차피 너도 인간이고 저들도 인간이다.”
“인간…….”
“결국 인간이 상황을 만들고, 상황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페인.
그는 악령이자 인간이었다.
그는 해결사이자 추방자였다.
그는 먹잇감이자 주인이었다.
그는 스승이자 제자였다.
그는 역병을 퍼뜨린 장본인이자 역병을 치료한 의사였다.
그는 죄인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왕이자 백성이었다.
그는 학살자이자 구원자였다.
그는 악마이자 천사였다.
그는 죽었으면서도 살아있었다.
그는 영웅이자 괴물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그는 무엇인가.
누가 대답할 수 있는가.
누가 정의할 수 있는가.
사람을.
승천자라고 무엇이 다른가. 그가 왕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그가 왕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오히려 그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보는 편이 훨씬 쉽다.
“그렇군요….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셨군요.”
“뜻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승천자는 조금 놀란 눈으로 페인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한층 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지옥으로 떠나시겠군요. 저희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기 위해.”
“이 세계에 남을 승천자님도 그럴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그게…. 사람이니까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남이 한다.
남이 할 수 없는 일은 내가 한다.
그렇게 힘을 합친다. 살아남아서 꿈을 꾸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페인은 선택하는 것이다.
“저는 내일 새로운 해가 떴을 때 지옥으로 떠날 겁니다.”
인간도 악령도 아닌 존재지만 늘 인간이길 꿈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