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추종자들 (3)
새벽, 중앙교회의 정원에서 매 역병 교수는 페인에게 보고했다.
“노래하는 누샤니움토의 주술로 인해 역병 의사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습니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역병 의사들은 대체로 방혈을 발동할 수 있으면서도 이에 저항하는 능력이 부족했기에 목숨을 많이 잃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내가 떠난다면 너희나 역병 의사들이 다른 문제를 떠안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야.”
“집단의 해체, 변질, 외압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정확하게 짚었네.”
“…강령술사님은 굉장히 올바르신 분입니다. 그리고 강령술사님은 그동안 저희를 이끌기 위한 실질적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
페인은 매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올바르다고 하는 건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각자가 추구하는 올바름이란 다른 법이니, 매의 눈에 자신이 올바르게 보였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 이 대륙에서 강령술사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겁니다. 따라서 강령술사님이 떠난다고 하셔도 강령술사님께서 남겨주신 상징성이 저희를 올바르게 지켜줄 것입니다.”
“상징성?”
“예를 들면 역병 교수, 역병 의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방독면입니다. 역병 의사들은 방독면을 쓰는 순간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역병 의사들을 보며 존중합니다.”
「방독면이 증표 같은 게 되어버렸네.」
“강령술사님께서 해산을 명령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럼 너한테 맡길게. 난 우리 집단이 사라지는 것도, 악당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거든. 네가 잘 관리하면서 이끌어줘.”
“따르겠습니다.”
이어서 독수리가 페인에게 말했다.
“언젠간 강령술사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환영할 수 있도록 이 세계를 보호하겠습니다.”
“독수리…. 넌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결의가 무거운 것 같아.”
“영광입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였나?」
그리고 페인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는 올빼미에게 물었다.
“셰르카랑 작별인사는 했어?”
“네….”
어쩌면 이렇게 모이는 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올빼미는 긴 말 없이 한마디만 했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 * *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새로운 태양.
절대악에 당하여 비탄하던 세계는 오늘부터 희망을 가지고 재건될 것이며,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번영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리라.
“페인. 솔직히 난 잠깐 들여다보았을 뿐이라 그곳의 자세한 것을 모른다. 그래서 괜히 묻고 싶구나.”
부우웅…….
그리고 곧 이 세계에서 사라지게 될 불나방 두 마리가 우리를 등에 태우고 있다.
“네가 본 핏빛세계란…. 어떤 곳이었느냐?”
그곳이라면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지옥.”
“응?”
“지옥이었어.”
사악한 무언가, 악마 같은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고 진짜 악마들이 도사리는 곳이다.
지옥 같은 곳이 아니고 진짜 지옥이다. 문자 그대로 지옥이다.
“우리가 뭘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최악일 거야. 지금까지 너나 내가 겪어온 시련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니겠지.”
얼마나 끔찍한 것을 경험하고 얼마나 깊은 어둠 속을 걸어왔는가. 그런 건 무의미하다.
실재세계에 있는 그 누구라도 지옥에 가서 자신이 겪은 시련의 무게를 악마에게 말한다면, 악마들은 그딴 것도 시련이냐며 비소하리라.
“무슨 일을 겪게 되더라도, 무슨 짓을 당하게 되더라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을 거야.”
“내가 각오하는 것 이상의 각오가 필요하겠구나.”
“각오를 하더라도 극복하지 못할 수가 있어. 희망과 노력을 전부 끌어모아도 쓰러질 수 있겠지.”
전쟁터에서 이름 모를 병사 하나가 죽는 것을 크나큰 비극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각자의 인생사와 각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누군가들처럼.
페인과 세르카도 지옥에서 얼마든지 그런 것을 겪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재세계가 탄생과 죽음을 품고, 잿빛세계가 소실과 망각을 품었다면, 핏빛세계는 오로지 절대악과 광기다. 그것을 살갗으로 느낀 존재는 공포와 절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차라리 광기와 한 몸이 되지 않는다면.
「거미 악귀 4140마리.」
「흑기사 1086마리.」
「불나방 2503마리.」
「올고호르휘.」
잿빛세계에 악귀 군단을 대기시켜 두었다. 거미 악귀, 흑기사, 불나방보다 약한 종류의 악귀들도 모조리 변이시켰다. 내가 갖고 있는 영력의 한계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이렇게 약 7천 마리의 악귀들을 준비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준비한 악귀들이 핏빛세계의 존재들을 상대로 과연 버틸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탐지 6계.」
「투시, 영안.」
「재결합 8계.」
「개미지옥, 지반붕괴, 제국의 결투장.」
「고속화 5계.」
「가속, 광속.」
「영력 발산 7계.」
「공포, 공황, 심정지, 자살 충동.」
「목줄 8계.」
「차원침공, 잿빛포화」
「방혈 8계.」
「방혈, 마른 익사, 교수척장분지형, 제물방류, 강타하는 혈전, 영혼축출, 매혈.」
「발화 8계.」
「방사, 증기폭발, 열폭풍, 초고온, 임계점.」
「감각 증폭 7계.」
「철인 6계.」
「지적 활동 8계.」
「저주 저항 7계.」
「마법 저항 7계.」
「영적 저항 7계.」
「숫자, 다차원, 존재 추적, 밤눈, 광란의 집단부화, 타락, 진화.」
아직까진 9계에 도달한 능력이 없다. 그 이유는 어떤 계를 더 높은 계로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악이 너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방혈 8계를 9계로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악보다, 영적 저항을 5계에서 7계로 두 단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악이 더 적은 것이다.
강해진 만큼, 강해지기 더 어려워졌다.
「9계까지 도달하면 그 능력의 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경지겠지.」
지옥의 피조물이나 악마의 하수인 따위를 사냥하는 것으론 9계까지 강화를 기대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미크쉬 같은 진짜 악마를 한 마리 해치우는 것으로도 부족하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여럿 악마들을 해치워야만 어떤 능력이 9계에 도달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다 했느냐?”
나는 낙원 사람들이 파보크와 아그니샤를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 이곳에 머물렀던 마음을 깨끗하게 지웠다.
“이만하면 됐겠지.”
“나도 준비가 되었다.”
“퀴이익!”
「그럼 받아들인다? 너랑 셰르카한테 접근하고 있는 손아귀들.」
“그래. 이제 넘어가자.”
차원 너머에서 건너온 사악한 손아귀들.
영안을 켜고 보면 그것들은 오로지 어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맙소사, 지옥의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다.”
“모든 게 정리되면 너도 그 저주로부터 풀려날 수 있게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구나. 제발.”
셰르카는 소리로 듣고 있다. 평생을 소음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저주받은 귀가 사악하게 뒤틀린 영혼의 아우성을 듣고 있다.
“…꿈이 생겼다.”
“뭔데?”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조용한 세계에서 잠을 자보고 싶구나.”
이윽고 우리의 세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현실에 악몽을 덧씌운 것처럼 주변의 색감이 극적으로 뒤바뀌고 있다. 지옥에서 온 손아귀들이 우리의 저주받은 영혼을 잡아당기고 있다.
하얀 구름이 먹구름처럼 어두워지고 비대해졌다. 그러다가 완전히 짙은 회색으로 변해서 울부짖는 영혼의 얼굴들을 겉으로 드러냈다.
세상을 밝게 비추던 태양이 꺼져버리고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곧이어 태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달이 떠올랐다. 그 달의 형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둥그런 모양이었지만 색깔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완전한 칠흑이었다.
‘훗날, 달이 태양을 집어삼키면 그 세계는 거악의 시련을 받으리라….’
그렇게 떠오른 칠흑의 달 주변 테두리를 따라서 붉은 광원이 둥글게 퍼지며 공기를 선혈처럼 붉게 물들였다. 역한 피비린내와 썩는 냄새가 방독면을 뚫고 들어와 코를 찌르고 어디에서 들려오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뇌성을 초월하는 크기로 고막에 때려 박힌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머릿속을 비워 모든 잡념을 지워버려도 이 세계에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미치게 하려는 무언가가 있다.
광기의 춤을 추던 그림자가 멈춘 것처럼, 야수의 이빨과 발톱을 흉내 내는 것처럼 생긴 산맥이 지평선 끝자락을 가리고 살점과 내장을 머금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핏빛의 대지가 펼쳐졌으며 그런 대지를 가르며 흐르는 핏물로 된 강물이 화상을 입은 자의 살갗에서 녹아내리는 것 같다.
어딘가는 재앙의 한복판처럼 불구덩이와 용암이 흐르고 있어 그 색감이 농익은 진물 같고 저 멀찍이 뒤틀린 산맥 앞에 벌레처럼 들끓으며 기어 다니는 존재들이 너무 많다.
바로 이곳이 지옥.
핏빛세계다.
부우웅…! 부웅…!
불나방 두 마리는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바로 아래에 다차원 거울이 있었구나.”
우리의 발밑에 전초기지가 있었다. 이런 세계에서도 이질적으로 하얀 색감과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장소다. 다차원 거울을 중심으로 집결한 천사들의 숫자가 족히 만 단위는 되는 것 같다.
부우우웅!
나와 셰르카는 불나방을 타고서 다차원 거울의 근처에 착지했다.
그러자 네이트가 우리를 맞이했다.
“딱 필요한 순간에 돌아오셨네요.”
처음으로 상위 천사를 마주한 셰르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셰르카가 저렇게 압도당하는 건 처음 보네.」
“옆에 계신 분은 흑마법사 셰르카 씨?”
이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위기감을 느꼈는지 연신 울어댔다.
“퀴이익! 퀴이익!”
“괜찮아요. 해치지 않습니다.”
셰르카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반갑다. 아, 아니…. 반갑습니다. 네이트 님. 저는 셰르카라고 합니다.”
“셰르카 씨. 저희는 당신의 용기와 의지를 존중해요. 곁에 페인 씨가 없었다고 해도 당신은 언젠간 이 세계에 올 것을 알고서 대비를 하고 계셨죠.”
셰르카는 네이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붉은 동공이 초점을 잃고서 방황하고 있다. 물론 가짜 눈알이지만.
“네.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왜, 왜 네이트 님 같은 대천사가 제게 이런 취급을 해주시는지….”
“무슨 말씀이죠?”
“그야…!”
셰르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제가 살면서 무슨 짓을 해왔는지…. 네이트 님이라면 다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페인이라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저는…. 저는 페인처럼 그렇게 고민을 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고 무작정 저질렀다고요.”
“헤아리고 있어요.”
네이트는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당신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헤아리고 있어요. 당신의 배경, 당신이 겪은 상황들, 당신의 생각을 아니까요.”
헤아린다.
천사니까.
그냥 천사도 아니고 무려 상위 천사다.
「난 이제 네이트 안 무서워.」
「사악한 존재들을 전부 멸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천사들이 직접 핏빛세계로 넘어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천사들이 이렇게 싸우고 있는 이유는 ‘악’을 멸하기 위함이 아니다.
인과율을 망치는 ‘샤’라는 존재를 멸하고, 샤를 추종하는 악마들을 멸하여 모든 세계를 고치기 위함이다.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이트 님….”
“자,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네이트는 서두르고 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 세계에서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현재 11가지 종류의 상위 천사 진영이 샤에 대항하고 있어요. 페인 씨와 셰르카 씨가 있는 이곳의 천사들은 다차원 거울을 세웠고 세인트 여신을 따르고 있죠.”
슬쩍 둘러보니 발키리나 포드키엘 말고도 내가 모르는 천사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천계의 상위 천사들은 51명이고, 그중 11명의 상위 천사가 이 세계에 넘어온 거예요. 그리고 지옥에 존재하는 악마들은 71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샤를 추종하는 악마들이 몇 마리나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어요.”
「성서에서 본 거랑 똑같네. 악마들의 숫자.」
정리하자면 지금 핏빛세계에서 싸우고 있는 대천사가 11명.
본래 핏빛세계에 있던 악마들은 72마리. 그중에 미크쉬가 죽었으니 71마리다.
그리고 남은 71마리 중에 몇 마리가 샤를 추종하고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은 상황.
“샤는 각각의 상위 천사 진영에 한 마리씩 악마를 보냈어요. 그래서 지금 천사들이 실질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악마는 10마리죠.”
“이쪽에는 11개의 진영이 있는데 왜 저쪽에서는 악마를 10마리만 보낸 겁니까?”
“미크쉬가 소멸했으니까요. 처음엔 11마리였다고 해요. ……그러니 당장 상대할 악마가 없는 저희 진영이 가장 여유로운 상황이죠. 저희는 피조물 군단을 해치우면서 성역을 확장함과 동시에 샤의 흔적을 추적하는 중이에요.”
그러면서 네이트는 덧붙였다.
“만약 페인 씨가 샤의 진짜 얼굴을 봤다면 존재 추적으로 샤를 찾아낼 수 있겠죠.”
“샤의 생김새가 어떤지 아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 누구도 샤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과거에 샤를 목도한 천사들이 있긴 했는데…. 예외 없이 샤에게 당했거든요.”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나는 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해보기로 했다.
“일단 인근 진영에 지원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두 진영이 힘을 합치면 악마를 하나씩 줄이고 전장 전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아요. 하지만 이 전쟁의 핵심인 샤를 추적하기 위해선 성역을 확장하는 게 우선이라서요. 그리고 인근 진영에 유의미한 전력의 지원군을 보내자니 이쪽에 전력 공백이 생겨요. 그 틈을 악마들이 지켜보고만 있진 않겠죠.”
「생각이 네 머리 위에 있네.」
“그래서 페인 씨와 셰르카 씨가 나서줘야만 해요. 여러분이 인근 진영을 지원하는 것이죠. 천사들을 따로 빼내서 부대를 만들 필요도 없이, 두 분만으로 천사 부대에 맞먹는 지원군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는 사이에 저희는 꾸준히 샤를 추적할 계획이고요.”
“알겠습니다. 지원해야 한다는 인근 진영이 어딥니까?”
그러자 네이트의 황금빛 동공이 어딘가 먼 곳을 향했다.
“북쪽에 나락불탑이 있어요.”
이곳 다차원 거울을 기준으로 북쪽, 아마카라교의 만카라가 지휘하고 있는 진영이 있었다.
그곳을 공격하고 있는 피조물 군단은 ‘미르파스’라는 악마의 것이라고 한다.
- 미크쉬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 미르파스는 미크쉬보다 오랜 세월을 이 세계에서 살아온…. 경험 많은 악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