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64화 (164/181)

32. 추종자들 (4)

만카라의 눈동자에 새겨진 하얀 무늬는 아마카라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내가 디아나에 갔을 때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표식이었다.

“샤가 제시한 것이 무엇이기에 미르파스가 현혹된 건지 알고 싶다.”

상위 천사인 만카라는 내게 설명했다.

미르파스라는 악마는 원래 디아나가 있는 대륙에서 지옥으로 끌려온 죄인의 영혼을 징벌하는 악마였다. 태고의 전쟁 때도 미르파스는 천사들과 충돌하지 않고서 지옥에 남아 묵묵히 자기가 할 일만 했다는 것이다.

“페인, 셰르카. 너희도 알겠지만 악마란 본래 협력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존재다. 대의도, 신념도, 정의도 없이 무엇보다 자신의 본능과 쾌락만을 추구하지. 그러니 미르파스가 이 세계를 위한다거나 자신과 같은 악마 동료들을 위해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샤에게 세뇌당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다고 본다. 샤가 그런 식으로 악마를 세뇌하여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지옥에 존재하는 71마리 악마를 모두 상대하게 되었을 테니.”

하지만 지금 샤의 추종자로 전장에서 확인된 악마는 10마리다. 나머지 61마리가 싸우지 않고 대기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 봐도 비효율적이다. 샤가 처음부터 악마들의 머릿수로 밀어붙였다면 천사들의 전초기지는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아마카라 진영의 군대가 녀석의 군단을 막고 있다.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강제당하고 있다는 뜻이지. 이런 전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진영에 승산은 없다. 이 세계에서 우리 천사들의 숫자는 유한하지만, 저들의 존재는 무한하니까 말이다.”

병력의 충원 속도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으니 소모전이 계속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르파스의 위치는 아십니까?”

“녀석은 저 멀리 광기의 산맥에 있다.”

야수의 이빨이나 발톱처럼 날카롭게 자라난 듯하면서도 미친 존재가 아무렇게나 빚어낸 것처럼 생긴 저 산맥. 먹물로 칠한 것 같은 산맥.

만카라가 봉으로 가리킨 곳에는 주변의 다른 산맥과 다를 것 없는 산맥이 있었다.

“미르파스가 저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저 산맥이 있는 곳의 하늘을 보아라.”

나는 알게 되었다.

저곳의 하늘에는 먹구름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 세계의 먹구름이란 망자들의 고통, 쾌락, 욕망이 뒤섞인 꿈이 실체화된 것이다. 영혼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당연히 악을 품고 있지. 미르파스는 저런 망자들의 영혼을 끌어당겨 자신의 군단을 빚어내고 있다.”

“그래서 미르파스가 저곳에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녀석은 지금까지 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자신의 주술을 부리지도 않았지. 그저 자신의 군단을 빚어내 소모전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서둘러 녀석을 해치우거나 설득해야만 양측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저희가 힘을 합친다면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돌파구는 너희의 도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

나와 셰르카는 만카라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사들은 성역을 벗어났을 때 약해지기 마련이다. 악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에서는 본래의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만카라는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에도 너를 구하고, 전장의 지형을 바꾸고, 사체로 된 언덕을 여럿 만들어가며 장렬히 전사한 대천사가 있었다.”

엑수스.

“용맹했지만 무모했지. 네이트 또한 무모했다. 그런 전장의 한복판에 가서 싸울 생각을 하다니……. 심지어 되돌아오리라는 확신조차 없는 너를 구하겠다고.”

「갑자기 뭐야? 엑수스가 죽은 게 우리 탓이라는 거야?」

‘그게 아니야.’

만카라는 이어서 말했다.

강하게 경고하는 어조였다.

“엑수스는 단연코 천계 최고의 무력을 거머쥔 자였다. 그런 존재조차도 성역을 멀찍이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약해져서 쓰러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진영에서 성역이란 나락불탑의 광명이 닿는 곳을 뜻한다.”

미르파스가 있다는 광기의 산맥과 그 앞에 펼쳐진 전장은 성역이 아니었다.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전선과 성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게 천사들의 기본적인 전술이자 전략이었다.

만약 만카라가 그 기본적인 것을 지키기 않게 된다면, 그 또한 얼마든지 엑수스처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목숨 아깝다고 하는 거네.」

‘지휘관이 자기 목숨을 우선시하는 건 비겁이 아니야.’

「그래?」

“이해가 되었나? 너희 둘 다.”

그러자 세르카가 나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저는 이해했어요. 준비됐고요.”

마찬가지다.

“저희는 성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페인. 너는 미크쉬를 해치운 경험이 있으니 반드시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

“예. 해낼 겁니다.”

“하지만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라. 미르파스는 미크쉬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니까.”

* * *

나락불탑을 중심으로 자리한 아마카라 진영.

만카라의 천사들은 크고 작은 부대를 이루어 싸우고 있다. 쉴 틈 없이 모여드는 미르파스의 군단에 노란빛의 마법을 떨어뜨리고 쏘아내고, 때때론 녀석들 사이에 뛰어들어 봉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렇게 싸우고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더는 후퇴하지도, 진군하지도 않는다. 일단 확보한 성역은 지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만카라의 천사들이 결코 자리에서 밀리는 일 없이 방어하고 있지만, 싸움이 길어지니 희생은 뒤따르는 법이었다.

“쎄에엑! 쎄엑…!”

촉수가 달린 육체, 뼈로 이루어진 육체, 혈관이 뒤엉킨 육체, 녹아내린 살덩이 같은 육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건 분노하는 도깨비 같은 얼굴과 뱀 같은 울음이었다.

“쎄에에엑!!!”

방어선으로 돌아가지 못해 희생양이 된 천사는 피조물들에게 붙들렸다.

“끄아아아아아…!”

녀석들은 힘을 합쳐 붙잡은 천사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입꼬리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허리를 늘이거나 목을 늘여서 천사의 찢어진 입에 잿물을 토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당한 천사들은 아무리 굳은 결의로 무장하고 있을지언정 내장과 영혼이 녹아내려 쓰러지고 말았다.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금 즉시 길을 열어라!!”

그러던 도중, 만카라의 천사들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목숨을 내던져가며 지키려던 방어선에서 일제히 벗어나 집단적인 돌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자 미르파스의 군단이 덩달아 흥분하여 그들의 돌격에 기꺼이 응하였다.

곧 천사와 피조물들이 드넓은 핏빛의 대지 위에 뒤엉켜 싸우게 되었다. 정신없는 난전 속에 빛이 폭발하고 피와 살점이 터져나갔다.

바로 그때 나락불탑이 있는 방향의 상공으로부터 노란빛이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날아들어, 전장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콰아아앙!!!

빛이 떨어진 곳으로부터 미르파스의 군단이 온 사방으로 밀려났다.

“쎄에에엑!!”

그곳에 만카라가 착지한 것이다.

“와라! 샤의 추종자들아!”

적장이 스스로 방어선을 벗어나 위험한 전장 한복판에 출몰했는데 가만히 있을 군단이 어디에 있을까. 설령 그것이 함정이라고 하여도 가만히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런 계산이 없다고 하여도 미르파스의 군단은 본능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만카라가 코앞에 나타났으니.

“쎄에엑…!”

“쎄에에엑!”

녀석들은 일제히 잿물을 토해냈다. 잿물이 온 사방에서 뿜어져 만카라를 향해 떨어졌다.

“흐읍!”

쿠웅!

만카라가 봉을 휘두르자, 봉이 지나간 허공을 따라서 수천 개의 빛나는 손바닥이 소환되어 잿물을 막아내고 주변의 군단을 내리쳤다.

콰아앙!

만카라가 봉을 수직으로 내려치자, 봉이 순간적으로 거대해져서 대지에 기다란 상처를 만들어냈다.

봉과 손바닥에 당한 군단은 납작하게 으깨진 살점이 되거나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덩이가 되었다.

그리고 만카라의 오십 걸음 앞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 쉬이이이이익!!!!

일어선 그림자가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었다. 푸르뎅뎅한 살갗, 여섯 개의 팔, 불이 붙은 몽둥이 세 개와 용암이 뚝뚝 흐르는 장검 세 자루, 신화 속 용의 비늘 같은 피부, 나태에 절여져 초점도 없이 졸린 눈.

‘…농락하는 회귀자(回歸者).’

만카라는 순간적으로 봉을 늘였다.

푹!

일격에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태고의 전쟁 때 분명 해치웠다고 생각했거늘…. 육체의 죽음은 무의미했다는 말인가.’

- 쉬이이익!

심장을 꿰뚫린 회귀자는 그림자로 변했다. 그리고 만카라의 삼십 걸음 앞에서 다시 일어나 살로 된 육체를 갖추었다.

“그런다고 네놈의 과오를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쉬이이… 히히히…”

“시간은 모두의 것이다! 감히 네놈의 욕망으로 더럽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혼이 다른 것으로 변하여 다시 태어나는 윤회와는 다르다.

주술이나 마법이나 축복이나 저주에 의해, 영혼은 그대로인 채 육체만 복구되는 부활과도 다른 것이다.

녀석이 건드는 건 ‘시간’이다.

시간이란, 인과율의 근간이다.

“네놈이 태고의 전쟁을 600년이나 늘렸었지!”

녀석은 인과율을 망치고,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영혼들의 모든 선택과 노력을 자신의 욕망만으로 수포로 되돌리는 피조물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태고의 전쟁 때 만카라가 아끼던 화신인 불타가 목숨을 걸고서 해치웠던 존재다.

그날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녀석에게 죽임을 당했던가. 수행자들의 무덤 앞에서 홀로 살아남아 오열하던 불타의 시간은 녀석의 회귀 앞에 무엇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게라도 해치웠던 녀석인데, 이렇게 보란 듯이 살아나서 다시 싸우고 있다. 녀석을 가만히 뒀다간 녀석은 태고의 전쟁 때 죽은 수행자들을 모조리 되살리고 자기도 현계로 돌아가 싸움을 되풀이할 것이다.

녀석은 그날의 싸움을 기억하고 있지만, 되살아난 수행자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녀석을 상대하는 게 처음인 것처럼 무력하게 당할 것이다.

그래서 만카라는 분개했다.

이미 지나간 기억을 회상하며, 이미 지나간 과거를 과거로 두기 위해.

“이번엔 내가 직접 네놈의 영혼을 거두어주마!”

그렇게 만카라가 적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이에 그의 휘하에 있는 천사들은 전장에서 우위를 점했다. 지금까지 공격하지 못했던 시간을 만회하듯 저마다 군단을 무찌르며 대지 위에 사체로 된 언덕을 쌓기 시작했다.

“페인! 길이 열렸으니 서두르시오! 사체로 쌓은 언덕을 가림막으로 삼아 돌파하시오!”

그들 사이에 있던 페인과 셰르카는 두 다리로 직접 뛰었다. 셰르카의 흑마법으로 전이했다간 영혼이 이동하는 도중에 녀석들의 잿물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까지 녹이는 잿물이라니…. 조심해야겠어.」

페인과 셰르카는 전장을 가로질렀다. 미르파스의 군단이 적은 쪽을 골라서 뛰어가니 녀석들의 사체로 된 언덕이 양쪽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와중에 그런 언덕 위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페인. 만카라의 마법 지원이 부족한 것 같지 않으냐? 처음의 예상보다 더 많은 천사들이 죽임당하고 있다.”

“강한 존재가 나타났어.”

“악마인가?”

“악명은 농락하는 회귀자….”

“그래봤자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더냐. 만카라의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성가신 능력이 있어.”

“무슨 능력?”

쩌걱!!

페인은 언덕 위에서 뛰어내린 피조물을 도끼로 베어낸 후 말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존재야.”

그것은 셰르카의 이해를 벗어나는 능력이었다.

“악마들도 못하는 일을 한낱 피조물이 한단 말이냐?”

“나도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 단지 녀석의 악명과 능력을 보고 추측할 뿐이야.”

「예전에는 여러 마리가 있었던 거지. 한 마리가 몇 분씩, 몇 초씩 시간을 돌리다 보니 태고의 전쟁이 길어진 거야.」

「녀석을 제외한 존재들은 기억이 사라지니까, 그런 것까지 감안하면 천사들 입장에서 얼마나 빡쳤겠냐.」

“그렇구나.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완전해야 할 인과율을…. 그런 존재를 만카라가 상대하게 되어서 차라리 다행인가.”

“어쩌면 우리가 이 길을 이미 몇 초 전에 통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지금도 녀석은 만카라를 이기겠다고 시간에 손을 대고 있을 테니까.”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능력이지.」

기시감이란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인데 이미 경험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뜻한다.

「나라도 그런 능력을 흡수해서 써먹기엔 좀 무서워.」

「뭔가……. 내가 그런 능력을 쓴다면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들이 차원 속에 벌어질 것 같아서.」

“이 세계에 있는 것들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사실은 이미 겪었던 일이며, 적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경험했을 수도 있다. 셰르카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니 소름이 끼쳤다.

이어서 페인은 주장했다.

“미르파스와 싸울 때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다른 행동을 해야 할 거야.”

머지않아 페인과 셰르카는 광기의 산맥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음산했다.

격렬한 전장은 둘의 배후에 멀찍이 떨어져 있다. 눈앞은 새까만 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그 색깔이 너무나도 어두워서 산속에 길이 있는지 짐승이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밤눈으로도 보이지 않으니, 광기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색깔이란 단순한 어둠이 아닐 것이다.

그때 셰르카는 목소리를 낮췄다.

“너도 느껴지나?”

페인은 코앞에 있는 광기의 산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지기가 둘이나 있어.”

“문지기 뒤에 있는 깊고 어두운 존재가 미르파스겠지.”

이윽고 페인과 셰르카는 칠흑 속에 발을 들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