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추종자들 (5)
만카라와 그의 천사들은 난전을 유도하며 군단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면서 사체로 언덕을 쌓아 페인과 셰르카가 몸을 숨기며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미르파스의 군단도 페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공세를 거두고, 페인이 지나간 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녀석들이 페인의 뒤를 따라잡기 전에, 그는 만카라가 말했던 광기의 산맥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샤아…
발밑에 깔린 어둠을 밟으니 그것이 검은 연기처럼 흩어져 붉게 짓무른 대지를 드러낸다. 보통 산을 오른다고 한다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고도가 높아져야 하는데 이곳엔 그런 게 없다.
그래서 어떤 산에 들어왔다기보다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미지의 어둠을 헤치며 평지를 나아가는 것만 같다. 앞을 가리고 있는 어둠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밀려나서 비좁은 협곡 같은 벽이 되었고, 발밑에 깔린 어둠은 그의 뒤로 밀려나서 뒤가 보이지 않게 만드는 벽이 되었다.
「진짜 이상한 세계야.」
“이상하지. 산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산처럼 모여있는 어둠이었다니 말이다.”
“전투에 대비해. 곧 우리 앞을 두 녀석이 가로막을 거야.”
미르파스의 앞에 배치된 사악한 존재 두 마리가 느껴진다. 녀석들이 발산하는 존재감이 점점 더 강렬해진다.
샤아아아…
이윽고 전방의 어둠이 갈라졌다. 양옆으로 드높은 어둠의 벽이 세워졌다. 그래서 페인과 셰르카는 비좁은 협곡 사이에 놓인 길을 걷는 것처럼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였다. 저 앞길을 두 사악한 존재가 가로막고 있던 것이다.
셰르카는 두 녀석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추악하게도 생겼구나.”
하지만 페인이나 악령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추악하다고? 내가 보기엔 얼굴은 예쁘게 생겼는데?」
길을 가로막고 있던 두 존재는 예쁘장한 소녀를 닮은 피조물이었다. 어둠을 빚어 만든 듯한 갑옷, 창백한 살갗이 많이 노출된 복장, 작은 체구, 머리에 달린 악마의 뿔, 핏물처럼 붉은 머리칼.
왼쪽에 있는 녀석은 머리칼을 어깨까지,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다.
그리고 두 녀석 모두 동공의 색깔이 붉었다.
“적개심이 느껴져.”
“우호적일 리가 없지. 우린 미르파스를 죽이러 왔으니.”
‘탐지해.’
왼쪽에 서있는 녀석은 어떤 짐승의 살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책을 들고 있다.
「요마(妖魔).」
「12666.」
노래하는 누샤니움토가 9815의 악을 갖고 있었다.
「요마는 미르파스의 피조물이야. 이 세계에 널린 악을 실체화해서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고 해.」
그리고 오른쪽에 서있는 녀석은 맨손이다. 하지만 녀석은 정체불명의 책을 들고 있는 요마보다 더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몽마(夢魔).」
「16666.」
「얘도 미르파스의 피조물. 미지의 정신계 능력을 휘두르고, 영력을 빼앗아서 강해지고, 마지막엔 영혼까지 흡수한다고 해.」
“몽마는 어떤 면에선 너와 비슷하구나.”
“언젠간 악마가 될 수도 있는 존재야.”
샤를 추종하는 미르파스. 그리고 녀석의 피조물들.
천계와 인류의 적이다.
“너는 페인…. 너는 셰르카….”
몽마는 긴 혀를 날름댔다.
“둘 다 맛있겠어….”
“네년이 우릴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으냐?”
“페인은 더 맛있을 거야.”
그 순간, 몽마 옆에 있던 요마가 책을 펼쳤다. 그 책에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어둠이 양옆의 어두운 벽에 스며들었다.
샤아아아!!!
페인과 셰르카가 있는 곳의 양쪽 벽에서 어둠으로 이루어진 가시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가시는 페인이 갖고 있는 영적 저항 7계를 이겨낼 수 없었는지 그의 몸에 닿자마자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동시에 셰르카는 이리를 활짝 펼쳤고, 펼쳤던 이리를 곧바로 접어버렸다.
그러니 그 자리에 셰르카는 없었다.
“퀴이익!”
그녀는 짧은 거리를 전이하여 요마의 뒤에서 나타났다. 이리는 촉수를 내질러 요마의 온몸을 휘감았다.
뚜두둑!!
요마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다. 목뼈까지 부러뜨렸는지 녀석의 머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였고 입가에서 새빨간 혈액이 흘러나왔다.
그때 몽마는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감히 내 동생을….”
몽마가 셰르카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몽마의 손으로부터 어둠으로 된 채찍이 튀어나와 셰르카의 허리를 휘감은 것이다.
그 채찍이 가시덩굴처럼 변하였다.
쿠지직!
셰르카는 채찍에 붙잡혀서 허공에 떠올랐다가 지면에 거칠게 추락하였다. 몽마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팔을 휘둘러 셰르카를 어두운 벽이나 붉은 대지에 여러 차례 처박았다. 그러는 사이에 이리는 요마에게서 떨어져 몽마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더 아프게 해줘….”
팔다리와 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요마는 지면에 쓰러진 채로도 어둠을 조종했다.
샤아아!
이리를 쏙 빼닮은 어두운 형체가 요마의 책 위에서 나타나 이리의 뒤를 쳤다. 그리고 붉은 촉수와 어두운 촉수의 싸움이 이어졌다.
퍼엉!
공기가 터지는 소리. 뒤늦게 바람이 밀려나는 소리.
광속을 발동한 페인은 쓰러진 요마에게 접근해서 도끼를 치켜들었다. 아니, 이미 도끼를 요마의 목을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반전은 없었다.
쩌거걱!
요마의 머리가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한 후 지면에 떨어졌다. 그리고 공중에 흩뿌려진 요마의 혈액이 페인을 중심으로 모여들어서 붉은 덩어리가 되었다.
“퀴익…! 퀴이이익…!”
페인의 붉은 덩어리는 이리와 검은 이리를 집어삼켰다. 혈액 속에 갇힌 이리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어둠으로 이루어진 이리는 그대로 가둬버린 것이다.
‘영혼축출.’
샤아…
어둠의 이리는 붉은 덩어리 속에서 사라졌다.
“퀴익!”
진짜 이리는 곧바로 뛰었다. 지금도 셰르카를 채찍에 달아놓고 휘두르고 있는 몽마를 죽이기 위해서다. 그때 페인도 이리와 함께 내달리면서 도끼를 휘둘러 검기를 사출해냈다.
콰콰아!!
몽마에게 검기가 명중했다.
하지만 몽마는 상처 하나도 입지 않았다.
“이걸 봐라! 페인!”
몽마는 채찍을 움직여 셰르카를 허공에 매달았다. 그리고 몽마가 빈 왼손을 셰르카에게 향하자, 왼손의 손가락 끝으로부터 다섯 개의 어두운 채찍이 튀어나와 셰르카의 사지와 머리를 휘감은 것이다.
“퀴이이이!!!”
이리가 촉수를 내질렀다. 하지만 어두운 무언가가 강풍처럼 몰아쳐 이리를 튕겨냈다.
페인은 그 어두운 강풍을 뛰어넘고서 몽마에게 주술을 발동했다.
「몸속에 피가 흐르는 존재들이야.」
‘방혈.’
“카학…!”
몽마는 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몽마의 저항 능력이 높아서 방혈만으로 즉사시킬 수는 없었다.
부웅!
이어서 페인의 도끼가 몽마에게 날아들었다.
몽마의 허리가 잘렸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 매달린 셰르카의 사지와 머리가 다섯 방향으로 뽑혀나갔다.
뚜드드드드득!!
셰르카의 몸을 이루던 것들이 붉게 찢어져서 지면 위에 떨어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당할 뻔했구나.”
페인의 뒤에서 이리를 들고 있는 셰르카가 걸어 나왔다.
“…허나 당할 뻔한 건 저년들도 마찬가지인가.”
“이게 몽마의 능력인지, 만카라와 싸우고 있는 회귀자의 능력인지는 몰라.”
“상관없다. 몇 번을 다시 싸워도 우리가 이길 것이다.”
어둡고 드높은 벽이 양옆을 가리고 있다. 비좁은 협곡 사이에 있는 길처럼 앞쪽이 훤히 보인다.
앞쪽 길의 중간에 요마와 몽마가 서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너는 페인…. 너는 셰르카….”
몽마는 긴 혀를 날름댔다.
“둘 다 맛있겠어….”
“쯧.”
셰르카는 혀를 차고는 재빠르게 전이했다. 그녀는 요마의 뒤에서 나타나 흑염을 사출했다. 동시에 이리가 촉수를 꺼내서 땅을 박차며 몽마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둘을 노린 것이다.
콰아아아아!!
요마를 집어삼켰던 흑염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그때 흑염 속에서 책을 펼치고 있는 요마가 뭔가를 발동했고, 요마의 책으로부터 이리를 쏙 빼닮은 어두운 형체가 두 마리나 소환되어 셰르카에게 돌진했다.
같은 순간에 몽마는 각 손가락마다 채찍을 뽑아내 총 열 개의 어두운 채찍을 휘두르며 이리의 붉은 촉수를 베어내고 있었다.
「이러면 되돌리는 의미가 있나?」
「우리의 영력도 싸우기 전으로 돌아왔잖아. 우리의 기억도 그대로고. 서로에게 무의미한 되풀이잖아.」
‘그럼 회귀자의 능력은 아닌 거네.’
진짜로 시간이 되돌아간 거라면 이쪽의 기억도 사라졌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건 몽마의 능력이다.
타앗!
페인은 이번에도 광속을 발동했다. 이리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몽마에게 접근하여 도끼를 휘둘렀다.
부웅!
몽마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그의 도끼를 회피하였다. 그러자 페인은 근거리에서 검기를 사출하였다. 몽마의 몸에 닿아서 폭발한 검기가 잠시 시야를 가렸다.
“페인… 어디로 간 거야…”
가려졌던 시야가 확보되자, 페인이 있던 자리에서 나타난 건 흑기사 한 마리였다.
“크어어어어!!!”
흑기사는 장검 두 자루를 몽마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몽마는 흑기사와 거리를 벌리려다가, 자신의 뒤에서 날아드는 이리의 촉수에 오른팔을 묶이고 말았다.
쩌겅…!
몽마는 일단 이리에게 가고 있던 채찍의 궤도를 틀어서 눈앞의 흑기사를 휘감았다. 흑기사의 사철 갑옷이 어두운 채찍에 묶인 채 일그러졌고, 그러자 흑기사의 투구 사이에서 방대한 혈액이 물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혈액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몽마를 노렸고, 몽마는 자세를 낮추어 혈액을 피하였다.
“퀴익!”
그런데 몽마 뒤에 있던 이리가 흑기사의 혈액을 받아먹은 것이다.
“뭣…?”
이리는 수십 개의 촉수를 휘둘렀다. 그러자 각각의 촉수가 저마다의 검기를 하나씩 사출하였다.
콰아아! 콰아아! 콰아아!
연속적으로 사출된 검기는 몽마의 움직임을 제한하였다. 바로 그때 몽마의 머리 위에서 페인이 떨어지고 있었다.
쩌거거거걱!!!
페인은 몽마의 정수리부터 골반까지를 일직선으로 갈라버렸다.
…쿠웅!
몽마는 몸이 두 덩이로 나뉘어 쓰러지고 말았다.
…쿠웅!
때마침 요마도 쓰러졌다.
셰르카가 만들어낸 검은 구슬 같은 것들이 요마의 온몸에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더…. 더 해줘….”
요마는 셰르카의 발목을 붙잡고서 애원했다.
“이거는… 별로 안 아파……”
“빌어먹을 년이.”
셰르카는 요마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흑염을 머금었다.
화아아아!!
요마의 핏물 같은 머리칼이 태워지고, 요마의 얼굴 가죽이 녹아내렸다.
샤아아…!
그러자 요마의 얼굴 가죽 뒤에 있던 것이 드러났다.
“페인! 내가 말했지?! 추악하게도 생겼다고!”
요마의 얼굴 가죽 뒤에서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무수한 구더기가 요마의 두개골을, 관절을, 모든 뼈를 대신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또냐.”
드높고 어두운 벽이 양옆에 있어 마치 비좁은 협곡 사이에 놓인 길 같다.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요마와 몽마였다.
“몽마가 싸움을 또 되돌렸다.”
“그래. 시간을 되돌린 건 아니야.”
“영력도 기억도 그대로다.”
“그게 문제야.”
“응?”
페인은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주술을 발동했다.
‘초고온.’
콰아아아아아아!
전방의 비좁은 길을 뜨거운 화염이 채웠다. 요마와 몽마는 화염 속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임계점.’
화염은 점차 하얗게 변하다가 날카로운 굉음을 내는 초록색 빛줄기가 되었다.
……츠즈즈…
초록색 빛줄기가 꺼지자, 요마와 몽마는 보이지 않는다.
“또 영력이 되돌아왔어. 싸우기 전으로.”
그가 말하자 요마와 몽마가 또다시 저곳에 서있는 것이다.
“차라리 시간을 되돌리는 거라면 괜찮은데….”
“그러게 말이다. 지금도 우리 뒤에서 시시각각 미르파스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으니.”
광기의 산맥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르파스의 군단은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들은 페인과 셰르카의 뒤를 쫓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전투로 얼마나 시간이 끌렸는가.
「아직 미르파스는 구경도 못했잖아.」
성역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이라 천사들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정말로 이쪽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천사들은 기꺼이 지원하러 올 것이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만카라도 엑수스처럼…. 날 구하려고 하다가…’
「그만.」
「이렇게 되풀이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하는 것도 악마들이 좋아하는 방식이야.」
셰르카가 페인의 팔을 툭툭 쳤다.
“통찰력을 가지고 생각해보아라.”
페인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고민했다. 잠깐 고민하고 있으니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금방 떠올랐다. 하지만 페인은 떠올린 그 방법을 입 밖으로 꺼내길 주저했다.
그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셰르카는 페인과 같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저년들을 상대하지.”
“위험해.”
“언제는 안전했나?”
세르카는 이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에 검은 연기를 둘렀으며, 자신의 배후에 야수의 그림자를 소환했다.
“어서 미르파스와 결판을 짓고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