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부서진 꿈 (3)
붉게 물든 하늘, 영혼의 먹구름들이 갓난아기의 얼굴을 하고서 저마다 울기 시작했다.
- 으애애애앵!
- 으애애애애애앵!
‘라후미야를 보내다니…. 샤에겐 페인이 그렇게까지 경계대상이었다는 말이냐.’
만카라는 생각했다.
‘이건 새싹을 태산으로 짓밟으려는 것과 같다.’
직후, 전장의 천사들과 만카라의 배후에 있던 나락불탑의 빛이 꺼져버렸다.
쿠구궁!
이윽고 악이 들끓는 대지를 노란빛으로 감싸 성역을 유지하던 나락불탑이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네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죽었는지 알 것만 같다. 엑수스….’
그때 만카라는 엑수스와 같은 마음이 되었다.
* * *
때는 네이트가 아그니샤를 화신으로 삼아 핏빛세계로 넘어간 날.
핏빛세계에 다차원 거울이 세워진 첫날이었다.
새하얀 구름 위로 대지의 조각들이 떠다니는 천국.
엑수스의 황금빛 신전으로 가는 널찍한 길에 문지기 가르간이 서있다.
쿵! 쿵!
가르간은 아주 거대한 식탁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새하얀 천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문지기다. 그런 가르간 앞에 만카라가 당당히 섰다.
“가르간.”
“…….”
문지기 가르간은 거대한 몸으로 길을 막고서 비켜주지 않았다.
“내가 들어갈 수 없다면 엑수스보고 나오라 해라.”
“…….”
가르간의 전신을 가리고 있는 새하얀 천이 순풍을 맞은 것처럼 흔들거렸다. 그러자 곧 가르간의 천을 주먹으로 살짝 치우며 그가 걸어 나온 것이다.
“뭐냐, 만카라. 나는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용건만 간단히 해라.”
“지유토가 절명했다.”
“네가 불타 다음으로 선택한 인간 말이냐?”
“그렇다.”
“불타는 정식으로 화신이 되기 전에도 회귀자를 무찔렀지. 비록 미크쉬의 피조물에게 당하긴 했지만…. 그 피조물의 악명이 뭐였던가?”
“몰아치는 만타였다.”
“지유토를 죽인 녀석은?”
“그 또한 만타다.”
“아비와 아들이 쌍으로 만타에게 당했군. 늦기 전에 지유토를 화신으로 만들어주지 그랬나?”
“내가 지유토에게 빙의하기 직전에 그가 살생을 발동하고 말았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군. 하지만 살생이라도 필요악이라면 화신의 조건 충족에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닌가?”
“지유토는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살생을 발동하였다.”
“그런데 왜 네가 그 몸으로 들어가지 못했지? 뭔가에 가로막혔나?”
“만타와 싸우던 도중이었다. 그의 살생은 보호가 아닌, 보복이 되고 만 것이다.”
“….”
“살생을 발동한 직후, 지유토는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목적을 망각하고 말았다. …눈이 멀고 만 것이지. 그래서 빙의할 수가 없었다.”
“불타의 아들이라고 해서 기대했거늘 실망스럽군.”
“네가 할 소리냐. 전쟁광 같은 자보다는 나은 인물이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엑수스는 의외로 그 부분에서 만카라에게 굽혔다.
“내 잘못은 인정하고 있다. 인간들이 악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고 말았지. 지유토를 책망하려던 건 아니다. 단지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다.”
전과 달라진 엑수스의 모습을 본 만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나도 감정이 격해져서 실언을 하고 말았지. 방금 발언은 사죄하마.”
“그래서, 핏빛세계에서도 성역 밖에서 자유로이 싸울 수 있는 육체가 하나 없어졌다는 뜻이로군. 이러면 모두가 네이트의 계획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돌고 돌아서 페인인가….”
“비첸 오솔로니오 아바타라 폴 엑수스, 아그니샤, 지유토 같은 자들을 화신으로 핏빛세계에 두어도 결국 빙의 시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도 너처럼 페인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페인만큼 성역 밖에서 자유로이 싸우며 놈들의 거대한 악을 흡수하고 강해질 수 있는 그릇이 달리 있는가?”
“하지만 오로지 페인만 생각해선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 차선책이 없게 된다.”
“흐음.”
“게다가 페인은 업보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갈 자가 아닌가. 우리 같은 천사가 빙의해서 쓸 수 있는 그릇도 아니고…. 그가 지옥에서 미쳐버리거나 악에 현혹되어버린다면 인간의 세계는 샤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부정하진 않겠다. 확실히 인간의 정신으로는 미치지 않고서 견디기가 어려운 세계지. 끌려가서 미쳐버리거나, 미쳐서 끌려가고 말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페인이 보여준 모습은 천사라도 본받을 수 있는 면모가 있을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그가 피에 물든 만큼 내일의 그까지 신뢰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만카라의 우려에 엑수스는 단언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엑수스. 너의 강인한 의지는 알지만 때때론 의지만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지금은 네이트와 나의 의지지만, 나중엔 우리 모두의 의지이자 계획이 되겠지.”
“그러니까 너의 말에는 논리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증명해 보이겠다.”
“……정말이지 막무가내로군.”
그러자 엑수스는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두고 봐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 * *
몽마는 셰르카를 저주했다.
“죽어버려! 셰르카 이 씨발년아! 너도 똑같이 당할 거야! 똑같이…!”
끝내 셰르카는 심문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몽마의 위에서 일어나 페인이 지나간 길을 눈에 담았다.
“퀴이이…”
드라쉬르의 그림자들이 몽마를 붙들어 세웠다. 이리는 몸과 영혼의 탈출까지 완벽하게 속박된 몽마에게 다가갔다.
으드드드득!
이리가 녀석의 온몸을 휘감았다.
“카하아악!!!”
이리는 몽마의 복부와 목구멍에 촉수를 집어넣었다.
으드득! 으득!
몽마의 살가죽 안에 있던 것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남기지 말고 먹거라. 몽마에게서 쓸만한 주술을 찾아 흑마법으로 해석할 것이다.”
“퀴익! 퀴익!”
그때였다.
“…이 소리는 뭐지?”
그녀의 귀에는 들렸다.
먼 후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영혼들의 소리였다. 먼 전방에서 전율하고 있는 영혼의 소리였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저 앞에서, 천 걸음 정도는 떨어진 곳에서부터 크나큰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페인이 영력 발산을 강화하여 새로운 주술을 발동한 건가?”
“퀴익퀴익.”
“미르파스의 존재감이 지워졌다. 그가 미르파스의 악을 흡수해서 새로운 주술을…”
철퍽!
이리는 몽마의 쪼그라든 사체를 버리고 셰르카의 곁으로 왔다.
“…불쾌한 느낌이다.”
“퀴이이. 퀴이….”
“…페인의 것이 아니었구나.”
“퀴이익.”
이리는 두꺼운 촉수 하나를 내밀어 셰르카의 얼굴을 핥았다.
“네 말이 맞다. 미르파스의 지원군 같은 존재가 온 것이겠지. 이미 미르파스는 죽은 것 같지만.”
“퀴이익.”
“그래. 어서 페인에게 합류…”
“퀴익!!”
이리가 촉수로 셰르카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쩌어어어어엉!!!!!
넘어진 채로 위를 보니 무언가가 교차했다. 아주 거대한 바닥 같은 것이 교차하여, 양옆에 있던 어둡고도 높은 벽을 수평으로 잘라버린 것이다.
그러자 근방의 영혼들이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으며, 이리가 그녀의 몸 위로 포개지듯 쓰러졌다.
바로 그때 셰르카는 몽마가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 닥쳐! 씨발, 어차피 나도 죽은 목숨이야! 이미 늦었어! 다 듣고 계셨다고! 아아아악!!!
- 죽어버려! 셰르카 이 씨발년아! 너도 똑같이 당할 거야! 똑같이…!
천 걸음 정도 떨어진 전방에서부터 크나큰 소란을 몰고 오는 존재.
‘라후미야?’
푸우우우….
이리가 그녀의 몸 위에 선혈을 쏟아냈다.
“이리!!”
셰르카는 상반신을 세웠다. 자신의 품에 있는 이리를 살펴보았다.
“퀴이이….”
절단된 촉수들이 상처를 수복하고 점점 작아지더니 힘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왜, 왜 그러느냐?”
셰르카는 자신의 옷에 묻은 피와 이리가 흘린 피를 흑마법의 검은 연기로 뽑아냈다. 그것을 이리에게 강제로 먹였다.
하지만 이리는 여전히 기운이 없다.
“어서 일어나라.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 않으냐.”
“퀴익….”
“몸에 있는 상처는 다 고쳤는데 왜….”
셰르카는 작아진 이리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그렇게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광기의 산맥 전체가 수평으로 잘려서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
문득 깨달았다.
더는 영혼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세상 속에 적막이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죽어서 침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퀴이익…….”
“놈이 오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너의…”
“퀴이이이…!”
이리는 애타게 울었다.
무섭고 아프다는 것이다.
분명히 상처는 다 수복했는데.
“페, 페인…. 그의 눈이라면 네가 아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셰르카는 눈이 없다. 셰르카가 보고 있는 세상은 사실 이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리가 볼 수 없는 것은 그녀도 볼 수 없다. 상처를 다 수복했는데 계속 아픈 이유는 이리도 셰르카도 알 수 없다. 어떤 상처가 남아있는 건지 어떤 질병에라도 걸린 건지 어떤 저주라도 당한 건지 이리가 아픈 원인을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페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조금만 참아라! 절대 눈을 감아선 안 된다!”
이리가 눈을 감으면 그녀도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제길…!”
전방에서 라후미야가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존재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리의 죽음이다.
그래서 그녀는 전방으로 여러 차례 전이하기 시작했다.
샤아아!
미르파스의 사체 근처에 있을 페인과 합류해야 한다. 그리고 이리를 치료해야 한다.
- 으애애애애앵!!
죽음 같은 침묵이 깨지고 탄생의 소리가 울렸다. 하늘을 포함해 온 사방의 공기 속에 있는 영혼들이 갓난아기 같은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시끄럽다…!”
곧이어 미지의 존재가 낯익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다.
- 셰르카.
그녀의 모친.
-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의 아주 어렸을 적 기억에 새겨진 목소리였다.
- 광기의 숲을 벗어나고 싶었어. 너무 늦기 전에 도시에서 널 키우려고 했는데….
- 네 아빠가 잿빛세계로 추방당하고…
샤아아!
셰르카는 계속 전이했다.
- 네가 혼자서는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어….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엄마의 욕심도 있었고….
“퀴이이…. 퀴이….”
이리는 파들파들 떨리는 촉수로 셰르카의 품속에 더욱 파고들었다.
- 그런데 이럴 줄 알았으면….
- 처음부터 낳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샤아아!
- 네 동생이 엄마 배를 찢고 나온 것도 전부 벌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주 좆같은 주술이구나!”
샤아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페인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셰르……
이번엔 어둠 속에 있는 무언가가 손아귀까지 뻗어왔다.
샤아아!
셰르카는 재빠르게 전이하여 미지의 손아귀를 피했다.
샤아아!
계속 전이했다.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한 마음으로 전이했다. 계속 들려오는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자꾸만 때리는 듯했다.
샤아아!
그녀는 마침내 어두운 길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여기서 그가….”
이곳은 공터다.
광기의 산맥과 새로운 산맥이 맞닿은 곳이라서 자연스럽게 공터 같은 장소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 뒤에 있는 광기의 산맥은 수평으로 잘려서 흩어지고 있으며, 저 앞에 있는 어두운 산맥도 다른 산과 마찬가지로 잘려서 흩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터에는 강철로 된 벽이 있었다.
“제국의 결투장! 페인의 주술이다!”
셰르카는 지면을 박차서 단숨에 강철 벽 위로 올라왔다. 여러 겹으로 된 강철 벽들이 있다. 벽 너머에는 죽은 악귀들이 가득하고 한쪽 구석에 연달아 무너진 강철 벽들이 있었다.
그 무너진 강철 벽들의 끝에 미르파스의 사체가 있다.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여 끝내 죽임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미르파스를 쓰러뜨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페인!!!”
침묵하는 세상 속에 그녀 자신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퀴이이…….”
그래서 그는 어디에 있는가.
“페인! 제발 나와라! 어디로 간 것이냐!”
이렇게 싸움의 흔적이 있는데, 미르파스의 사체가 있는데, 이겼으면서, 이리가 아픈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르파스를 해치운 다음엔 함께 전이하여 나락불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엇갈렸나…?!’
셰르카는 자신이 빠져나온 광기의 산맥을 돌아보았다. 어둠으로 이루어졌던 산맥이 무너져서 흩어지고 있다.
‘지나온 길이 소실되어서…. 합류하지 못한 건가?’
하지만 페인이라면 셰르카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겐 존재 추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역시 그가 합류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합류하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합류할 수 있었을 터. 애초에 이쪽에서 페인에게 합류하는 것보다 페인이 이쪽에 합류하는 게 정상적인 흐름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나타나질 않고.
“퀴이…….”
이리의 호흡이 옅다.
이제 결단해야만 한다. 더는 배회해선 안 된다. 이대로 페인을 찾아다닌 끝에 그의 도움을 받아 이리를 치료하거나, 지금이라도 영혼이 잿물에 소실될 위험을 감수하고 나락불탑으로 전이하여 만카라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일단은 페인이 여기에 남아있을 리가 없다…!’
이곳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미르파스를 죽이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미르파스를 해치우고서 저 앞에 있는 라후미야를 곧장 노리러 달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굳이 든든한 만카라와 천사들을 배후에 두고서 말이다.
따라서 페인은 앞이 아닌 뒤에 있다.
샤아아!
셰르카는 전이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미르파스가 움직임을 멈췄어. 거의 정지한 것처럼.」
나는 악귀들에게 명령하여 미르파스를 죽이도록 했다. 곧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은 미르파스의 악이 내 영혼으로 흡수되었다.
‘포기한 건가?’
그러자 악령은 죽기 직전 미르파스의 악이 갖고 있던 감정을 읽어냈다.
「아니야. 포기했다기보다는…」
「전율하고 있어.」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순간적인 통증과 함께 세상이 뒤집히는 것은.
「허리가 잘렸어!」
후두둑!
공중에서 나의 내장과 피를 본 직후, 상반신이 지면에 떨어졌다.
쿠득쿠득쿠득!
그 즉시 나의 상반신과 하반신의 상처로부터 붉은 것들이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그렇게 절단된 양쪽 몸을 끌어다 붙였다.
「봤어? 봤냐고!」
‘봤어.’
허리가 잘려서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보였을 때 무언가 내 위쪽으로 지나갔었다. 아니, 그 순간 내 시야의 ‘위쪽’에서 지나갔다는 것은 곧 내 ‘아래쪽’에서 지나갔다는 것이다.
즉, 그 지나간 것이 내 허리를 잘라버렸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지나간 그것은 아주 넓고, 얇고, 기다란 바닥 같았다. 그런 바닥 두 개가 서로 교차하여 가위처럼 내 허리를 잘랐던 것 같다.
「씨…」
‘왜?’
「발!」
언제나 내 머릿속에서 울리던 악령의 목소리가 이질적이게도 위아래에서 들렸다. 하나는 이마의 위쪽에서, 다른 하나는 턱의 아래쪽에서.
「영혼까지…」
「잘렸어!」
매우 짧은 순간 깔끔하게 절단된 몸이 뒤늦게 흘러 떨어지는 것처럼, 나와 악령의 영혼도 너무 깔끔하게 절단되어서 한 박자 늦게 떨어진 것이다.
파악하자. 생각하자.
이런 엄청난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당연히 악마 이상의 존재일 것이다.
좀 전에 미르파스를 해치웠는데 연달아 그런 존재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 녀석이 성역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천사들과 함께 협공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너는 영혼부터 이어붙여.’
「알…」
「겠어.」
재결합 8계, 방혈 8계, 영안까지 있으면 절단된 영혼이라도 이어붙일 수 있다.
내 안의 악령이 그렇게 영혼을 이어붙이는 사이에 나는 고유 능력을 발동했다.
‘존재 추적.’
셰르카가 왼쪽 대각선 방향에서 빠르게 전이해오고 있다. 그녀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려서 내게 합류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요마와 몽마는 무사히 해치웠다는 뜻이겠다.
‘셰르카랑 합류해서 전이할 거야. 그전까지는 다 붙일 수 있지?’
「벌써 거의 다 붙였…」
「어.」
나는 무너지고 있는 어둠을 몸으로 밀어내며 그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대략 이백 걸음.
- 으애애애애앵!!
하늘에서 갓난아기들의 울음이 들려온다.
「됐어!」
「그런데 영혼의 먹구름들이 왜 저렇게 우는 거야?!」
그녀에게 합류하기까지 백 걸음 남았다.
‘새로운 악마가 온 거겠지.’
미르파스가 있는 방향으로부터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진다. 미크쉬와는 비교도 할 수 없고 미르파스조차도 내 뒤에서 접근하는 미지의 존재에 비해선 작은 것이었다.
혹시 내 뒤에 있는 존재가…
「널 죽이려고 샤가 움직인 거 아니야?!」
「다른 악마들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아니길 빌어야 한다. 당장 여기서 샤를 상대하는 건 승산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이야…!」
오십 걸음 남았다.
「씨발! 뒤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잖아!」
바로 그때, 미지의 존재가 그리운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 널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늘에 있는 갓난아기들의 울음이 너무 격렬해져서 기괴하게 들릴 정도다.
- 엄마가 미안해.
이건 듣지 않을 것이다. 가짜다. 시끄러워서 안 들린다. 듣지 않을 것이다. 가짜다. 가짜다. 가짜다. 가짜다. 가짜다.
이 어둠 너머, 열 걸음 앞에 그녀가 있다. 그녀도 내게 합류하기 위해 미르파스의 사체가 있는 방향으로 전이하는 중이다. 그곳으로 가면 안 되는데. 그곳에서 위험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는데.
- 이런 세상에 널 낳아서.
- 이런 집안에 널 낳아서.
- 엄마가 정말로 널 사랑했다면,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이딴 개수작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바로 앞, 한 장의 어둠 너머에 있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 그녀를 불렀다.
“셰르……”
그때 나는 무언가에 당해서 죽고 말았다.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보니,
“애옹.”
단 한 마리의 고양이가 구름 위에서 멀뚱멀뚱 날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