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73화 (173/181)

34. 뒤틀린 꿈 (3)

데이진타우 제국이 지금은 멸망해서 없지만, 본래 그곳의 인간들은 주로 라만교를 믿었다.

라만교의 상위 천사인 라만은 천계의 대장장이다.

「이야, 수염 봐라.」

천사치고는 나와 비슷한 신장이다. 하지만 엄청난 근육질의 몸이라서 가로로는 웬만한 거구보다 덩치가 커 보인다. 몇 갈래로 땋은 긴 턱수염은 바닥에 닿을 듯하고 오른손에 쥐고 있는 손망치는 보기보다 무거운지 모루를 칠 때마다 주변 땅이 울린다.

카앙! 카앙! 카앙!

전 병력이 전장에 나간 지금, 나는 라만과 단둘이 있다.

라만은 다차원 거울 앞에서 나를 위한 무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은! 흑기사의 사철! 또 뭐라고 했지?!”

카앙! 카앙!

망치질 소리가 너무 커서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론의 갑각입니다!”

“론! 미크쉬의 크라켄 말이냐?!”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자네가 재결합을 몇 계까지 강화했다고?!”

“지금은 8계입니다!”

“나는 10계다! 너희 인간들 기준으로 말이지! 하하하!”

라만은 이런 상황에서도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데 9계가 가장 높은 거 아니었어?」

“저도 10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

카앙!

라만은 망치질을 멈췄다.

황금빛을 내는 모루. 그 위에서 망치질로 달궈진 도끼날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계라는 것은 인간들의 기준이지!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영력! 인간이 쓰는 마법과 주술은 본래 그런 요소로부터 힘을 빌려 쓰는 것이네!”

망치질이 끝났음에도 라만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천사나 악마들에겐 계가 없어! 빌리지 않으니까! 날 때부터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니까! 계로 나누어 구분할 필요가 없지!”

「뭔 소린지 모르겠네.」

“그럼 라만 님은 재결합 9계가 되었을 때 어떤 것을 쓸 수 있는지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모른다네! 어떤 능력이든 인간이 9계에 도달하는 건 본 적도 없고! 일단 너의 재결합과 나의 재결합은 다를 것이네! 우린 서로 다른 존재니까!”

라만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빨갛게 달궈진 도끼날이 허공으로 띄워졌다. 이어서 보이지 않는 손이 도끼날을 만지는 것처럼, 도끼날로부터 긴 손잡이가 뽑아져 나왔다.

이번에도 도끼날과 손잡이가 일체화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다면 반납해라.”

라만의 어조가 사뭇 진지해졌다.

“현계에 남았다간, 이 무기를 탐한 후대의 인간들이 또 전쟁을 벌일 수도 있으니깐.”

“뭐가 바뀐 겁니까?”

겉보기엔 전과 다를 게 없는 도끼다.

“많이 바뀌었지. 살점을 덧입히지 않아도 너의 안에 있는 악령이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을 게다.”

「그거 좋네. 싸우는 도중에 살점이 벗겨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검기의 위력도 조정할 수 있게 했지. 지금까지 자네가 쓰던 검기는 위력이 일정하지 않았나?”

“예. 악마들을 상대로는 턱없이 부족한 위력이었습니다. 그래도 영혼을 가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곳에 넘어와서는 견제 수단으로만 활용했습니다.”

“이제 검기에 너의 영력을 때마다 다르게 주입할 수 있게 되었네. 원한다면 작은 검기로 바위를 가를 수도, 큰 검기로 태산을 무너뜨릴 수도 있겠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언이나 하겠네.”

“예.”

“그 거추장스러운 건 버리게. 괜히 역이용당할 여지가 있어.”

라만은 내 소매를 가리켰다.

나는 소매를 걷어서 손목쇠뇌를 보여주었다. 흑기사의 사철, 론의 갑각, 아라나크의 실로 만든 무기다.

“이거 말씀이십니까?”

“거기 장전된 단 한 발의 은화살. …주물을 재결합해서 만든 것이로군.”

「여왕의 독니.」

여왕의 독니는 내가 로브 속에 숨기고 있던 단검이다.

흑기사의 사철, 론의 갑각, 이물의 뼈로 만들어진 뼈칼을 섞어서 완성한 주물이 바로 여왕의 독니다. 그것에 찔린 대상이 만약 사악한 존재라면 상당한 통증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여왕의 독니를 은화살처럼 위장해두었다.

샤와 싸우다가 필요하다면 단 한 발의 노림수로 써먹으려 한 것이다.

“만약 그걸 빼앗겨 샤에게 역으로 찔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네.”

「황제한테 은화살로 찔렸던 때처럼?」

“샤를 두려워하게 된다면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벼랑 끝까지 몰리겠지.”

“두렵지 않습니다.”

“주물의 효과로 인해 두려울 수 있다는 뜻이네. 역이용당할 여지가 있다고.”

라만은 황금빛 모루를 다차원 거울 너머로 던져버렸다.

키잉!

모루는 새하얀 빛과 함께 거울 너머의 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다. 자네가 그런 주물에 역으로 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샤는 무조건 두려운 존재라네.”

솔직히 그 말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나는 더 이상 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녀석을 원망하고 녀석에게 분노한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온몸을 도끼로 패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고 있다. 그렇게나 증오스러운 상대다. 그래서 두려울 일이 없다.

그런데 라만의 깊은 눈이 내 속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

“하지만 놈의 실체를 직면하게 되었을 때 두렵지 않을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네. 우리의 여신, 세인트 님께서도 놈의 흉악한 모습을 보고 일편의 공포를 느끼셨다고 하니깐.”

「세인트 여신까지도……?」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공포가 아닐 것이네. 해석과 상상에 의한 공포의 가중이지.”

그렇다면 실제로 샤를 보고도 살아남은 존재는 세인트 여신이 유일하다는 뜻이겠다. 녀석의 실체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아는 것도 세인트 여신이 유일하다는 말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눈으로만 본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뭔가를 보면서 생각이라는 걸 하는 존재들이지 않나.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야. 샤는.”

나는 라만의 뜻에 따라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손목쇠뇌를 벗었다. 그것을 그대로 라만에게 넘겼다.

“주의하겠습니다.”

라만은 내 가슴 정중앙을 주먹으로 가볍게 밀었다.

“만약 놈이 두렵거든…. 에이, 쯧.”

“…?”

“자네 같은 인간을 처음부터 그 친구가 거뒀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만은 그렇게 푸념하더니 하려던 말을 이어서 했다.

“만약 놈이 두렵거든, 놈도 자네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게.”

* * *

천계의 군대는 촉수의 대지를 온 사방에서 에워싸는 구도로 진군하고 있다.

이에 맞서 10마리의 악마가 각자 군단을 이끌고 전장에서 맞서고 있지만, 10명의 상위 천사와 천계의 군대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네이트 님. 전장에 깔렸던 악이 촉수의 대지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샤가 본격적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는 증거죠.”

“이 넓은 전쟁터에서 추종자들을 지원할 악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까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대비하는 거겠죠. 그게 아니라면 부하들의 목숨으로 시간을 벌고, 마지막에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대비 혹은 반격을 꾀하고 있겠군요. 어느 쪽이든 저희에겐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키이이잉!

촉수의 대지를 둘러싼 전쟁터에서도 성역은 확장되고 있다. 악마와 피조물들은 약해졌고, 천사들은 더 강해졌으며, 시시각각 더 강한 천사들이 나타나 전장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래도 악마들은 천계의 군대가 촉수의 대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빠르게 확장되던 성역은 촉수의 대지 앞에서 확장을 멈추었고, 바로 그 경계선을 기준으로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전선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천사들이 우세했지만, 전선이 형성된 다음부터는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은 치열한 공방전이 되었다.

하지만 천사들은 명심해야 했다. 촉수의 대지로부터 튀어나오는 녀석들은 무한하지만, 이쪽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교착상태가 되었네요.”

“동시에 무의미한 소모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네이트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하죠.”

쩌어엉! 쩌엉!

발키리 수천 명이 네이트 진영의 상공에서 섬광과 함께 출몰하여 촉수의 대지를 향해 비행했다. 이에 맞서 영혼의 먹구름들도 제각기 뒤틀린 피조물들을 토해내 발키리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발키리는 십자가, 검기, 단검, 번개, 빛을 가지고 싸웠다. 뒤틀린 피조물들은 뼈, 촉수, 손톱, 발톱, 꼬리, 어둠을 가지고 싸웠다.

그때부터 하늘에서는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빛과 어둠이 뒤엉키게 되었다. 죽은 발키리가 지상으로 추락하고 죽은 피조물이 촉수의 대지에 떨어져 미지의 주둥이에 삼켜졌다.

“전방! 비명의 편린 다수 출몰!”

지상에서 거대하게 일어선 그림자들이 지저귀는 새의 소리를 냈다. 그것들로부터 시작된 어두운 깃털이 상공에 포물선 궤도를 그리면서 지상의 천사들에게 떨어졌다.

퍼퍼퍼펑!

깃털은 폭발했다. 그러한 폭격 속에서 천사들은 방패나 보호막을 전개하였고, 피조물들은 천사가 폭격에 대응하는 순간을 노려 돌격해서 전선을 몇 발자국인가 밀어냈다.

쿠웅!

그러자 돌격을 마친 피조물들 앞에 네이트의 거대한 십자가 세 개가 떨어졌다.

키이이이잉!!!

전장에 꽂힌 거대한 십자가들이 빛줄기를 쏘아내 비명의 편린들을 꿰뚫었다.

그 신성한 광경을 후방에서 지켜보는 악마가 있었다.

“왜 하필 내가 네이트를 맡는 거냐고!”

열 마리의 커다란 지네가 일어서서 하나의 머리를 이루고 있는 형태.

녀석은 자기 진영에 떨어지는 십자가들을 보며 억울해했다.

“못 오게 해! 천사가 하나라도 촉수의 대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분이 날 죽일 거라고!”

샤아아!

녀석의 주변, 짓무른 땅에서 새빨간 살점으로 이루어진 지네 같은 피조물들이 기어 나왔다.

“십자가부터 갉아버려!”

스스스스슷…!

지네 같은 피조물들은 땅을 헤엄치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십자가 세 개를 보호하고 있는 천사들의 발밑으로부터 튀어나와서 용암을 토하고 화염을 뿜어댔다.

“으아앗!”

“십자가에서 벗어나지 마라!”

“수호자들!”

쿠구구궁!

백마에 탄 수호자들이 원뿔형 창과 방패를 내세웠다. 그들의 커다란 갑옷, 창, 방패는 닥쳐오는 화염을 보호막으로 막고 쏟아지는 용암을 강풍으로 밀어냈다.

“퀴기기긱!”

그러자 지네 같은 피조물들은 땅에 용암을 토해냈다. 자기들 덩치보다 훨씬 방대한 용암을 토해내 파도를 일으켰다.

“다들 물러서시오!”

“우리가 막겠소!”

수호자들이 모두 앞으로 나와서 대열을 갖추었다. 그들은 밀려오는 용암의 파도를 향해 일제히 창을 내질렀다. 그러자 각자의 창끝으로부터 투명한 아지랑이가 회오리치며 전방으로 뻗어갔다.

촤아아…

용암의 파도가 좌우로 갈라졌다.

갈라진 용암의 파도 끝에 지네 피조물들이 있었다.

어느 수호자가 외쳤다.

“포드키엘들이여!”

그러자 수호자들 뒤에 있던 포드키엘 부대가 앞으로 달려 나와서 철퇴를 날렸다. 전방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는 철퇴들이 도중에 사슬을 끊고서 구르기 시작했다.

쿠직쿠직쿠지지직!!

지네 피조물들은 구르는 철퇴에 깔려서 곤죽이 되고 말았다. 좌우로 갈라진 용암의 파도가 점점 낮아지다가 지하로 흡수되고 말았다.

덕분에 거대한 십자가 세 개를 지켜낼 수 있었다.

키이이이잉!!!

십자가들은 다시금 네이트에게서 영력을 받아 강대한 빛줄기를 상공으로 쏘았다.

상공에서 발키리를 상대하고 있던 피조물들이 붉게 타오르며 쓸려나갔고, 그것들보다 위에 있던 영혼의 먹구름들도 강풍에 떠밀리는 연기처럼 군데군데가 흩어지게 되었다.

그때 상공의 발키리들은 촉수의 대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입니다!”

“멈추지 마세요!”

쐐애앵!

적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발키리 부대는 놀라운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대지를 폭격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촉수의 대지 위로 진입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촉수의 대지 상공으로 접근하니, 인근 진영의 상공으로부터 다가오는 아군 부대가 보였다.

“잠시 멈추고 ‘해태’들과 합류해야 합니다!”

구름 같은 갈기, 네 다리, 용처럼 비늘로 무장한 살갗, 위턱으로부터 길게 빠져나온 어금니.

그 외모가 영락없는 짐승처럼 생겼지만 그들도 엄연히 천사들이었다.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이다. 발키리들아.”

“당신들과 힘을 합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태고의 전쟁 때도 현계의 작은 구역만 수호하시던 분들이….”

“놈들은 만카라를 살해했다.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현계를 수호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수호할 나라도, 마을도, 사람도 없게 되었다.”

해태들은 요동치는 촉수의 대지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모두 천자마(天子魔)의 종자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들이 말하는 천자마란, 샤를 뜻한다.

“인간을 수호하던 형제들 또한 윤회 없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 …그들을 위로하고, 이런 참극이 다시는 없도록 천자마의 종자들을 모조리 들이받아 으깨버릴 것이다.”

그쪽 진영에서도 사연이 있던 것이라고, 발키리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다른 발키리 부대와 해태 부대까지 모두 합류하였다.

“저희의 임무는 촉수의 대지 상공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실패할 경우엔?”

“레르드휘.”

그때 높은 하늘로부터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뱀 같은 악마가 출몰했다.

- 아아아아아!

- 으아아아아아아!

녀석은 영혼의 먹구름 속을 비집고 다녔다. 그러면 영혼의 먹구름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적어도 레르드휘 하나는 최대한 오래 붙잡고 있어야만 해요.”

“너희 발키리들은 후위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을 아낌없이 휘두르도록 해라. 우리가 너희의 마법에 휩쓸리든 말든, 해태의 비늘 갑주는 신성한 공격에 면역이니까.”

“당신들은요?”

“전위에서 육탄공세를 하겠다.”

해태들이 발키리보다 앞서 비행을 시작했다. 그러자 높은 하늘에 있던 레르드휘가 영혼의 먹구름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들과 고도를 맞추었다.

* * *

샤의 숨통을 끊는다는 하나의 계획.

그리고 각 진영이 해야 할 세부적인 계획까지 전부 전달받았다.

이곳은 잿빛세계의 오두막이다.

“크르르…”

“키익, 키이익…”

마당에서 수많은 악귀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샤에게서 완벽하게 존재감을 숨길 수 있는 방법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천사들은 수단이 참 다양하구나.」

「아,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차원 너머의 정보가 읽힌다. 핏빛세계에 남겨둔 극소수의 불나방들이 내게 정보를 보내오고 있다.

「라후미야.」

셰르카는 영혼의 벽을 전개하여 자신과 라후미야를 가뒀다. 그리고 방금 그 영혼의 벽이 사라진 것이다.

영혼의 벽이 사라진 후 불나방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움직임이 느려진 라후미야였다.

「놈이 지쳤어. 심하게.」

궁지에 몰린 그녀가 무슨 각오로, 어떤 심정으로 싸웠을까. 이길 수 없는 상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 슬픔과 상실감에 휩싸인 채 어떻게 싸웠을까. 스스로 만든 지옥 속에 악마와 단둘이 갇혀서 어떤 싸움을 해왔을까.

그녀가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죽음보다 더한 희생이었으리라.

“후우….”

라후미야는 지쳤다.

전장에서 악마들에게 힘이 되었던 악은 촉수의 대지로 빨려가고 있다.

‘하필이면 라후미야가 셰르카에게 간 것도 사실은 샤의 명령이었겠지.’

「존나 너무하긴 해.」

‘셰르카…. 라후미야….’

몰랐을 때는 녀석의 존재감만으로도 위협을 당했다. 하지만 이제 녀석을 알고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면 녀석을 간단히 짓밟을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생긴다.

‘가자.’

키이잉!!

나는 순식간에 차원을 건넜다. 잿빛세계와 핏빛세계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차원에 발을 들였다.

‘존재 추적해.’

「저쪽이야.」

나는 라후미야를 지나쳐서 셰르카를 추적했다.

「저거야.」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엄마…”

등에서 자라난 두 팔이 양쪽 귀를 틀어막고 있다. 크게 뜨고 있는 눈꺼풀 안쪽은 텅 비어있다. 손톱이 너무 길어서 바닥에 끌리고, 다리 대신 수십 개의 붉은 촉수가 달려있다.

“엄마… 엄마…”

그런 몰골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변했는데,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야.’

「그래. 그럼 라후미야부터…」

“시끄러워!!!”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긴 손톱을 휘둘렀다.

쐐애액…!

손톱을 따라 어두운 검기가 함께 움직여서 허공을 갈랐다.

「뭐야?! 여긴 두 세계의 틈새인데!」

‘귀가 밝잖아.’

셰르카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엄마… 엄마…”

더는 지켜볼 수 없다.

키이잉!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다차원 능력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공허한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엄마……?”

나는 그녀의 머리를 도끼 손잡이로 강타했다.

퍼억!

두개골이 반쯤 부서져서 뇌수를 질질 흘리고 있다. 뇌수를 질질 흘리면서도 자신만의 어둠 속에 손을 뻗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가장 사랑했던 자를 애타게 찾고 있다.

“엄마아아…”

「이렇게 해놨으면 당분간 못 움직일 거야.」

나는 그녀를 등졌다.

그러니 라후미야가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페인.”

느껴진다. 라후미야의 억울함이.

부조리한 싸움, 비참한 최후, 억울한 불운, 잔혹한 현실이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번엔 라후미야가 그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녀석은 내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좋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너는 굉장히 곤란한 입장이겠지.”

잠깐의 적막이 있었다.

녀석은 내 생각을 읽었다.

“내 말을 들어보고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까?”

“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내 실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장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기의 산맥이었던 곳. 나와 셰르카가 지나간 길목이다.

「이 새끼들 모르고 있었네.」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장소는 언제든 차원을 건너서 돌아올 수 있다는 거.」

어차피 이 일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샤는.

하지만 당장의 라후미야는.

“너는 그냥 모르고 뒈졌으면 좋겠는데.”

“아하.”

라후미야는 유난히 붉게 빛나고 있는 칠흑 같은 달을 한번 올려다보고,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교활하군요.”

퍼어엉!!!

나는 위력을 극대화한 검기를 날려서 라후미야의 혐오스러운 머리를 세로로 갈라버린 후 대지로부터 피를 뽑아내 촉수를 만들었다. 그것을 라후미야의 갈라진 머릿속에 처박아서 녀석의 본체를 끄집어냈다.

철퍽!!

그것은 피를 뒤집어쓴 태아의 모습이었다.

“으애애애애앵!!!”

나는 울고 있는 라후미야를 짓밟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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