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75화 (175/181)

34. 뒤틀린 꿈 (5)

네이트는 페인에게 이야기했다.

“샤를 상대로 존재감을 숨긴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당신이 다른 차원으로 간다고 해도 녀석은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촉수의 대지 중심에 있는 샤에게 도달하기 위해선 반드시 존재감을 숨길 필요가 있다. 대놓고 샤에게 접근하면 녀석이 자기 나름의 대비를 하면서 어떤 수작을 걸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습을 해도 어려운 상대인데 정직하게 정면돌파를 했다간 그나마 있던 승산조차 더 희미해질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수단이 가르간이었다.

“문지기 가르간의 갑옷은 당신의 존재감을 숨겨줄 수 있어요.”

천사들의 신성한 세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되어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상위 천사들이 소유한 신전은 일종의 군사기지이자, 무기창고이자, 훈련장이자, 병영이었다.

그러한 신전을 지키는 문지기들을 가르간이라 칭한다. 그들도 영혼이 있고 자아가 있는 천사들이기 때문에 각자의 이름이 있지만, 우리가 포드키엘이나 발키리를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문지기들도 가르간이라 통틀어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신전을 지켜야만 하는 가르간들이 기어코 전쟁에 투입될 것이다.

따라서 이건 가르간들의 숭고한 희생과 천계의 위험부담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가르간은 무엇이든 가릴 수 있는 천사거든요. 당신은 가르간의 가림막에 숨어서 이동하는 거예요.”

“가르간이 하나라면 의미가 없을 겁니다. 반대로 가르간이 많다면 그만큼 샤의 공격이 분산되어서 제가 녀석에게 무사히 도달할 확률이 높아질 겁니다.”

“촉수의 대지로 향할 가르간은 총 30명이에요.”

샤의 입장에서는 30명의 가르간이 온 사방에서 촉수의 대지로 진입해오는데, 그중에 어느 가르간에 페인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 *

천계의 군대가 촉수의 대지를 에워싸는 구도로 총공격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10개의 진영에서 가르간을 3명씩 내보내 총 30명의 가르간이 이동을 시작했다.

각 진영에서 천사들은 가르간을 방패로 삼아 함께 움직였다. 가르간들이 촉수의 대지에 무사히 진입할 수 있도록 호위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피조물 군단은 가르간들을 집중 공격했다. 기껏 확보해둔 전선까지 포기하면서 병력을 결집하고 가르간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가르간들이 촉수의 대지에 진입하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샤는 힘을 모으기 위해 전장에 있던 악을 빨아들이는 중이고, 악의 영향력이 약해진 전장에서 악마와 피조물들은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피조물 군단과 악마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천계의 군대는 촉수의 대지 앞까지 가르간을 호위하기 위해 싸웠고, 상위 천사들은 촉수의 대지 앞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악마들을 상대했다.

결국엔 30명의 가르간 중 28명이 촉수의 대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카휘칸, 헤인, 쑤머이타!”

촉수의 대지에 진입한 어느 가르간은 불안정한 피조물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쑤탈룬! 샤르토룸!”

녀석들의 육체는 반투명했다. 즉, 육체와 영혼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떠도는 악이나 영혼의 흐름에 따라 몸이 출렁이기도 하고 갑작스레 흩어져 사라지기도 하였다.

샤아아아아…

쿠웅…!

가르간 앞에 불안정한 영혼의 벽이 세워졌다.

“쑤탈룬! 쑤탈룬!”

“샤르토룸! 카휘칸!”

녀석들은 영혼의 벽 너머에 붙어서 가르간을 막으려고 했다.

쿠웅!!

가르간은 거대한 몸으로 영혼의 벽을 향해 몇 차례나 돌진했다.

쿠웅!!

그럴 때마다 영혼의 벽은 더욱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피 같은 어둠을 흘려댔다.

“카쓰모튀안! 텔피라텝! 로힌! 쑤쓰이샤!”

주변에서 춤을 추는 듯한 어둠의 촉수들이 가르간의 몸을 휘감았다. 이어서 어두운 실타래가 가르간을 또 휘감았다.

“로힌! 쑤쓰이샤!”

곧이어 영혼의 벽이 가르간에게 돌진했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이 터졌지만 가르간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혼의 벽 너머에 달라붙은 불안정한 피조물들이 외쳤다.

“쑤쓰이샤!”

“쑤쓰이샤!”

지면으로부터 피가 분출되어 가르간의 새하얀 천을 붉게 물들였다.

치지지직…!

가르간의 천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천의 틈새로 가르간의 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막쏘르! 리휘!”

춤을 추는 어둠의 촉수 사이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가르간을 강타했다. 동시에 괴물의 기다란 주둥이가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며 가르간에게 달려들었다.

으적! 으적!

촉수, 실, 피, 손, 이빨. 주변에 있는 모든 악과 어둠이 가르간을 공격하고 있다. 가르간의 붉게 물든 천이 찢어지고 녹았다. 그래서 천으로 가려졌던 가르간의 진짜 모습이 노출되고 말았다.

그것은 은빛 갑옷을 걸친 거체(巨體)였다.

“카휘칸…?!”

“헤인! 샤사라!”

은빛 갑옷이 노출된 순간부터 가르간은 반격을 시작했다.

쩌엉!!!

천 속에 숨기고 있던 검으로 불안정한 영혼의 벽을 장엄하게 베어버렸다. 그러자 검이 직접 닿지 않은 주변 영역까지 베였다.

“샤아아아!”

“샤아…!”

불안정한 존재들은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가르간을 공격하던 어두운 형체들은 전부 절단되어서 지면을 나뒹굴거나 허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르간이 검을 꺼내는 바람에 절단된 천이 스르륵 떨어지자, 은빛 갑옷과 장검으로 무장한 거체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쿠웅!

가르간은 그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쿠웅!

땅울림이 주변의 사악한 영혼들을 떨게 하였다.

쿵쿵쿵쿵쿵!

그렇게 뛰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가르간을 막으려던 불안정한 존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몸을 가리던 천을 다 잃어버린 가르간.

천을 잃어서 몸이 드러났는데 페인이 없다는 건, 녀석들의 입장에서 이 가르간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가르간이 촉수의 대지 중심에 도착한다고 하여도 샤에겐 상처 하나도 입힐 수 없을 테니.

쿵쿵쿵!

천을 잃어버린 가르간은 계속 뛰었다. 검은 물이 용암처럼 끓는 강을 그냥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를 감싸고 있는 은빛 갑옷이 검은 물에 잠겨 순식간에 녹슬었다.

치지직! 치직!

검은 강을 건너던 가르간은 조금씩 조금씩 신장이 낮아졌다. 그러다 다리를 잃고, 하반신을 잃고, 허리까지 검은 강에 잠겨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 * *

이쪽 가르간도 좀 전에 천을 잃어버리고 고독한 뜀박질을 시작한 참이다.

쿵쿵쿵쿵쿵!

그 어떤 존재도 천을 잃어버린 가르간에겐 손을 대지 않았다. 녀석들이 가르간에게 손을 대지 않아도 이곳의 환경이란 난관이 많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땅은 늪이 되어 가르간을 삼켰다.

또 어떤 곳에서는 얼굴이 달린 바람이 불어서 가르간의 은빛 갑옷을 조금씩 깎아내다가 끝내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환경들을 극복하더라도 끝내 검은 강이 기다리고 있어, 가르간은 하나둘씩 검은 강을 한계선으로 죽어갔다.

…쿵!!

하지만 이 가르간은 검은 강을 건너고 말았다. 강 너머로 건너오니, 촉수가 들끓던 곳의 한복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가르간은 지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지평선으로부터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을 오르자 또 드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그래도 가르간은 멈추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 수상한 가르간….

가르간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 강을 건넌 가르간… 네놈… 유일.

- 의심…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인…

- 정답… 사실… 천이 아니라… 갑옷 안에…

- 페인…

가르간은 이곳에서 유난히 붉게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달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중심이 완벽하게 어둡다. 테두리를 따라서 퍼지는 붉은 광원이 초월적인 존재의 눈빛 같다.

- 나의 아버지….

- 방해… 금물….

그 눈빛은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 *

페인은 물었다.

“가는 길에 가장 조심해야 할 놈은 누굽니까?”

“브텔론이죠.”

네이트는 녀석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른 추종자들은 몰라도 브텔론에게 걸리는 일만큼은 없어야겠죠. 샤와 싸우기 전에 브텔론을 만나게 된다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예요.”

페인은 만전의 상태에서 샤를 상대해야만 한다. 샤를 상대하기 전에 다른 것들을 만나서 영력이나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안 된다.

“얼마나 강한 추종자입니까? 브텔론이란.”

“지옥에서 두 번째로 강한 악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샤의 아들이죠. 오로지 파괴에 모든 능력이 집중된 존재예요.”

페인이 라후미야의 악을 흡수한 덕분에 웬만한 악마들은 전부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브텔론은 예외였다.

“브텔론은 너무 먼 곳에 있어요. 당신이 어떤 공격을 하더라도 닿지 않을 위치에 있죠. 게다가 그 무지막지한 힘은 언제나 주변 일대를 파괴하는 것이에요. 게다가 시야까지 넓어서 일단 눈을 마주치면 도망치기란 불가능하고, 그늘에도 숨을 수 없죠.”

「공중에 있는 놈인가 보네.」

“하늘에서 퍼붓는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렇다고 떨어지는 공격을 피해 지하로 숨는다는 것도 무의미해요. 브텔론의 공격은 대지를 뒤집고 지형을 바꾸거든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요. 몇 번이고 초토화시키죠. 단순히 위력만 따지자면 샤보다 강해서, 영혼의 벽이라도 깨부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도대체 무슨 힘이야….」

“상위 천사 여럿이 방패를 세우고 거기에 영혼의 벽까지 더해야 간신히 막을 수 있겠죠. 그마저도 브텔론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격파되겠지만요.”

녀석의 공격은 최소한의 위력으로도 대지를 뒤집는 수준이며, 절대적인 위력만으로 따지면 샤보다 강하다는 악마다. 오로지 그런 쪽에만 능력이 치우쳐진 것이다.

“최대한 많은 가르간이 강을 건너야 간신히 브텔론의 눈을 피할 수 있겠군요.”

“네…. 얼마나 많은 가르간이 촉수의 대지를 뚫고서 검은 강을 건너냐가 관건이죠. 다행히도 브텔론은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하는 악마거든요.”

가르간 둘이 검은 강을 건넌다면 2분의 1 확률. 넷이 건넌다면 25분의 1 확률. 그런 식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가르간의 숫자에 따라서, 각 가르간이 공격받을 확률 또한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간은 모두 같은 속도로 촉수의 대지를 돌파할 것이다. 먼저 돌파한 가르간이 있다면 걸으면서 조금이라도 영력을 회복하고, 늦은 가르간이 있다면 속도를 맞추기 위해 뛰기로 계획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강을 건넌 가르간들이 동시에 같은 속도로 이동할 것이다.

「무섭긴 하지만…. 가르간이 둘만 강을 건너도 확률은 반반이야. 절망적이진 않지.」

“만에 하나라도 녀석에게 걸린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 브텔론에게 걸린다면…. 방법이 없어요.”

그만큼 위험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가르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놈의 생김새는 어떻습니까?”

그때 네이트는 하늘을 가리켰다.

「미친….」

붉은 하늘에 떠있는 칠흑 같은 달.

“언제나 저 위에 있었어요.”

* * *

촉수의 대지는 천계의 예상보다 험난했다. 30명으로 출발했던 가르간은 촉수의 대지에 진입하면서 28명으로 줄었고, 촉수의 대지에 있는 난관을 거치면서 절반 이하로 숫자가 줄었다. 그러다 검은 강에서 또 많은 가르간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검은 강을 넘게 된 가르간은 단 하나.

브텔론의 공격을 받을 확률은 100%가 되고 만 것이다.

- 종말… 예행(豫行)….

칠흑 같은 달의 왼쪽에서부터 붉은 점이 생겨나 오른쪽으로 이동하더니 중심에 고정되었다.

그 붉은 점이 브텔론의 동공이었다. 브텔론의 초월적인 시선이었다.

“…….”

최후의 가르간은 브텔론에게 검을 겨누었다.

쿠구구구…

이윽고 브텔론의 주변에서 새로운 별들이 생겨났다. 그 별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

쿠구구구궁!

사실, 별들이 커지는 게 아니었다.

별들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핏빛의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도시를, 하나의 대륙을 몇 번이나 멸망시킬 수 있는 종말의 불덩이들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그런 공격을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퍼붓고 있다.

- 묵시록(默示錄)….

가르간은 거대한 장검을 휘둘렀다. 빛으로 된 강력한 검기를 날려서 떨어지는 불덩이들을 베어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가 너무 많았고, 너무 넓은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끝내 수백 개의 불덩이 중에서 수십 개를 놓치고 말았다.

푸욱!

가르간은 자기 앞에 검을 꽂아서 보호막을 전개했다.

그 순간, 문명이라곤 없는 대지였지만 수십 번의 멸망이라도 보는 것만 같았다.

경이롭게도 가르간은 수십 번의 종말적인 폭발 속에서 꿋꿋이 서있다가, 폭발이 끝난 후에 몰아치는 강풍을 맞아서 갑옷이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투두두둑…!

그리고 은빛 갑옷의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브텔론은 무너진 갑옷의 잔해 속에서 페인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 페인은 없었다.

- 존재감….

순간, 브텔론의 붉은 점 같은 동공이 휙 움직였다. 최후의 가르간이 쓰러졌으니 가르간이 숨기고 있던 페인의 존재감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브텔론은 페인의 존재감을 따라서 시선을 옮긴 것이다. 시선을 옮기면서 당황한 것이다.

- 어째서…

혹시 방금 해치운 가르간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른 가르간이 또 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방금 해치운 가르간이 마지막이었다.

애당초 페인은 30명의 가르간 중 하나에 숨은 게 아니었으니.

- 어떻게……!

그는 이미 촉수의 대지 중심에서 샤와 조우하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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