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공허한 꿈 (4)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이 세계에 동화되었고, 내 영혼이 갖고 있던 악을 보게 되었다.
“배고파…….”
가뭄의 생존자가 벌어진 턱을 내게 들이밀었다.
“진정한 굶주림은……. 그런 거야….”
나는 녀석을 밀어냈다. 있지도 않은 손으로 녀석을 민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녀석이 사라지기를 바라면 곧 사라졌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방관자.
“만약… 만약 내가 그 참상을 보고도… 그냥 무시한 거라면… 날 개새끼라고 불러도 돼….”
“개새끼야.”
방관자는 울상이 되어서 사라졌다.
“무는 구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세계가 나의 꿈입니다.”
“라후미야. 이 좆같이 생긴 새끼야.”
라후미야의 긴 몸이 나를 중심으로 돌았다.
“인류의 역사 속에 당신만큼이나 크나큰 고통을, 크나큰 슬픔을 겪어본 자가 있을까요?”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야.”
“아니요. 단언컨대 당신이 만약 자살기도자처럼 약해빠진 패자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그만큼의 고통과 슬픔을 겪기도 전에 진작 죽고 말았겠죠.”
라후미야의 혐오스러운 눈알들이 가까이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시선들이 형체도 없는 내 몸을 핥는 것만 같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한계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계치가 너무도 높았죠. 그래서 당신은 누구보다도 큰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아프다며 피를 흘릴 때 당신은 묵묵히 내장을 쏟아냈고, 누군가 슬프다며 눈물을 흘릴 때 당신은 눈물이 메마르고 말았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당신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크나큰 고통과 슬픔을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라후미야는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악마 따위가 동정이라니.
“나는 이 고요한 세계가 좋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평온하긴 하네.”
아무 자극도, 아무 사건도, 빛도, 소리도 없는, 오로지 악으로 들어찬 칠흑의 세계.
“그동안 괴롭게 뛰어왔던 당신에게 주어진 최고의 안식처입니다.”
“나는 여기서 탈출하고 싶은데.”
“그러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보고 싶다고.”
“그들 모두가 죽게 될 겁니다. 그들은 당신과 달리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를 보고 있으면 악마들이 인간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이유를 뼈저리게 알 것 같아.”
“현계로부터 분리된 건 천사들도 같습니다.”
“맞아.”
천사가 답답하고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악마를 두려워하고 악마에게 분노하던 때가 있었다.
“인간에게 악마는 너무 나쁘고, 천사는 너무 착하거든.”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네 쪽은 아닌 것 같다.”
“당신의 노고와 희생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라후미야를 지워버렸다.
그러자 타락한 승천자가 나타났다.
“지옥에서 다시 보자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게. 넌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어디에도.”
타락한 승천자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네놈이 날 먹어치우지 않았나.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죽어서도, 어디에도.”
“죽어서도 뉘우치지 않았네.”
“나는 군중이 요구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 말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네 추악한 욕망에 충실한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정말 오로지 군중만을 위해서 일을 벌였다면 지금이라도 조금은 이해해 주겠는데 말이야.”
“나도 군중의 일부였다.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사람이었지.”
“진짜 미친 새끼.”
“네놈도 욕망이 있었다. 사악한 것을 죽이고, 사악한 것을 학대하여 그것들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며 즐겼지. 네놈과 내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래서 내가 양아치처럼 지나가는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싸웠냐, 이 광신도 강간마 새끼야?”
“대상의 차이를 논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가진 본질의 폭력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네.”
“그래, 알겠어. 너도 나도 똑같이 폭력적이고 추악한 욕망을 가진 놈들이었지. 아니다. 어쩌면 내가 휘두른 폭력이 네가 보여준 폭력보다 더 크고 잔악했을지 몰라.”
“이제야 인정하는군.”
“그럼 사람들은, 네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던 군중들은 지금 너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승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네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넌 인간으로 태어나선 안 됐어.”
그러자 승천자는 달관한 얼굴로 중얼댔다.
“나는 다음 생에…. 악마가 되어야겠군.”
“악마로 태어날 기회도 안 줄 거야. 씨발놈아.”
나는 타락한 승천자를 지워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멸망한 비첸크로이 제국의 황제가 나타난 것이다.
비첸 오솔로니오 아바타라 폴 엑수스.
“아쉽군.”
“뭐가?”
“내 방식이 너무 과격했던 것 같네.”
황제는 침울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 눈빛을 보고 있으니 타락한 승천자 때문에 격정 되었던 감정이 한층 누그러지는 것 같다.
“조금만 온건하게 했다면…. 진짜 엑수스가 내 몸에 빙의할 수도 있었겠지.”
“…그걸 이제 알았냐?”
“그래도 내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내가 죽었겠지.”
“죽었어야지.”
“그땐 몰랐다고. 너를 죽인 일로 인해서 그 많은 사건들이 연달아 터질 줄 미리 알았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었을 거야.”
“죽지 않고 다른 선택을?”
“그래.”
“흠.”
그러더니 황제는 애써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모든 사건의 시초는 내 죽음이 아니라 승천자의 죽음이었네. 그래서 당시의 내 생각을 돌이켜보면, 전쟁은 불가피했어. 승천자가 없는 왕국을 어찌 삼키지 않고 구경만 하겠나?”
“내가 널 설득하려고 했겠지.”
“…그렇다면 난 너에게 설득되었을 것이야. 너를 갖기 위해서라면 전쟁을 철회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세인트 왕국의 평화만 보장하는 일이네. 나는 분명 바다를 건너서라도 정복활동을 계속하려 했을 것이야.”
“그래도 나는 널 설득하려고 했을 거야. 그게 어렵다면 너와 친구가 되는 방향도 시도했을 거야. 내가 너에게 다른 목표를 제시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재밌는 발상이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회귀자를 죽여서 능력을 흡수하지 그랬나?”
“죽여서 고유 능력을 흡수하는 건 완전히 운에 맡기는 거야.”
“아쉽구나. 정말로 아쉬워. 내가 미쳤었지….”
“나도 미칠 뻔했어. 나중엔 정말로 미쳐버렸고.”
“네 손에 피가 묻게 만든 것은 나였다. 내 부하와 백성들은 어리석은 왕을 둔 탓에 그렇게 피를 보고야 만 것이지.”
“….”
나는 침묵했다. 그러자 황제는 쓸쓸하게 등을 보이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안녕?”
“벨드샤.”
“……나도 널 갖고 싶었어.”
“꺼져라. 너랑 할 이야기는 없으니까.”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안 돼?”
“동정심이라도 유발하려고?”
“그때…. 비첸크로이 제국, 수도에서 말이야.”
“거기서 널 처음 봤지.”
“나는 정말…. 반갑게 인사한 거야….”
“….”
“그런데 네가… 날 무서워해서…. 나도 너랑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잖아…? 네 안에 있는 그 녀석처럼…. 둘을 품으면 두 배로 강해지지 않았을까…?”
“그것도 거짓말이잖아. 날 집어삼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겠지.”
“들켰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다기보다는, 내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악한 존재는 내 안의 악령 하나뿐이니까.”
“정말로 신뢰해…?”
“가장 신뢰해.”
“페인. 본디 악령이란 악마가 보내는 것이네. 시초부터 악마가 창조한 것들이지.”
벨드샤는 그리운 목소리를 흉내 냈다.
“주술적인 힘을 휘두르기 위해선 서로가 필요하다. …자네와 자네 안의 악령이 그 조건 하나로 협력한다는 일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게. 하물며 자네는 자네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악령과 공유한다고 하지 않았나. 반대로 자네는 어떤가? 자네는 자네의 안에 있는 악령이 어떤 진의를 갖고 있으며, 진정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전부 꿰뚫어볼 수 있는가?”
선생의 목소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녀석이 선생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는 사실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초연한 기분이다.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으려고 한다.
“자네는 녀석을 들여다볼 수 없는데, 녀석은 자네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지. 그럼에도 자네는 그 관계를 신뢰한다니…. 그건 그것대로 무서운 일이라네.”
“그땐 그랬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벨드샤를 지워버린 후 악령에게 물었다.
“그렇지?”
「뭐라는 거야, 징그럽게.」
* * *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실재세계를 보고 싶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잘 지내는지도 보고 싶고.”
「부활은 없어. 너는 진정한 의미에서 죽었다고. 육체는 썩고 영혼은 이 세계에 갇혀서 망자가 됐잖아.」
“윤회할 수는 없는 거냐?”
「윤회도 영혼이 그곳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천사들이 주도해서 모든 차원의 인과율을 고치기 시작할 거야.」
「그러면 주술도, 마법도, 영력이라는 개념도 실재세계에서는 사라지게 되겠지. 잿빛세계도 없어질 거고. 그러다 이 세계도 없어지면, 우리의 존재도 함께 사라지는 거야. 깔끔하게.」
샤로 인해서 생겨난 것들이 모두 없어지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칠흑 같은 세계도 언젠간 사라지게 되는 게 순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싶다. 내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실재세계를,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실재세계를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주술이라도 발동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갖고 있던 악이 이 세계에 퍼져버렸어. 물감을 풀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고유 능력도 주술도 전부 사라졌고.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그저 이곳에서 존재하기만 하는 거야.」
이후 나와 악령은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민했는지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의 긴 시간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여기가 악으로 들어찬 세계라고 했지?”
「응.」
“그럼 이 세계에 있는 악을 흡수할 수는 없는 거야?”
「응…?」
“배 안 고파? 그동안 여기서 아무것도 안 먹었어?”
「아니, 아니, 배가 안 고파서…. 시도도 안 해봤는데?」
이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지나온 걸까.
“먹어봐.”
망설일 것 없다. 방법을 찾았으면 시도한다.
「……된다.」
“돼?”
「흡수가 돼! 영혼으로 흡수가 가능하다고! 망자라도 영혼은 영혼이잖아! 영혼은 존재니까!」
악으로 들어찬 세계.
너무 많이, 너무 빼곡하게 악으로 들어차서 온 사방이 칠흑으로 보일 지경인 세계.
악이 버려진 쓰레기통 같은 세계.
‘전부 다 흡수해! 전부 다 개방하고 강화하라고!’
「뭐라도 될 때까지 계속 흡수할게! 효율은 별로지만 잃어버렸던 영력도 차오르는 것 같아!」
또 시간이 흘렀다. 이 세계에 있는 악을 모조리 흡수할 때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나조차 알 수 없는 크기의 영력이 영혼을 채우게 되었고, 악으로 들어차서 칠흑으로 보였던 세계 너머에 작은 빛이 보였다.
나는 그 빛에 이끌려서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다. 그 빛이 어디에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다차원 능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무지개처럼 어지럽게 색상이 뒤섞인 미지의 차원이 펼쳐졌다.
미지의 차원은 내가 오랜 시간에 걸쳐 흡수한 악과 가지고 있던 영력을 모조리 깎아버렸다. 그 감각이 마치 뜨거운 불길 속을 내달리는 실타래라도 된 것 같았다.
「꿈.」
「…세계.」
「꿈으로부터 탄생한 세계가 너무 많아.」
모든 존재들의 꿈이 멋대로 새로운 세계가 되거나 뒤틀린 차원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곳에서 떠돌아선 안 될 영혼의 조각들이 미지의 차원에서 서로 뒤엉킨 채 잔존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오로지 작은 빛을 좇았다.
그 작은 빛이 나더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