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80화 (180/181)

35. 공허한 꿈 (5)

인류의 마지막 문명.

재건된 세인트 왕국은 태고의 전쟁이 끝났을 때처럼 탄탄한 성역의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

왕국에서는 무너졌던 건물이 세워지고 파손된 도로가 정비되었다. 까맣게 타버렸던 경작지는 오히려 비옥한 토지가 되었고, 썩어버렸던 해안과 사막에는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멸망한 문명의 폐허에서 역사와 문화를 계승한 생존자들이 개척자가 되어 새로운 문명을 건국했다. 먹는 입보다 먹을 것이 더 많았고 사람의 숫자보다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았다.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싸우지 않았고, 싸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폐허 위의 평화 속에서 인류는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세인트교는 말했다.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다.

어둠은 빛의 배경이라고 했다.

죽음은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방법이라고 했다.

슬픔은 마음이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절망은 희망을 찾기 위한 발판이라고 했다.

세상은 여전히 빛난다고 했다.

아무리 어둡게 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빛난다고 했다. 정말로 세상이 어두웠다면 우리는 빛으로 태어나지 않았을 테니.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나 어두웠다면, 그렇게나 끔찍한 세상이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테니.

그래서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빛난다고 했다.

그래서 지옥 같다고 해도 사실은 지옥이 아니었다.

신들은 자비롭게도 인간의 세계와 지옥을 분리해두었으니.

결코 지옥이 아니었다.

* * *

중앙교회에 불어온 산뜻한 바람이 그녀의 금발을 간질였다.

“아그니샤.”

“파보크 님.”

그녀는 갑옷이 아니라 평범한 신도복을 걸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녀의 뒤에 붙어있던 은빛 십자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늘이 5주년이네.”

“네. 어서 가시죠.”

두 사람은 중앙교회의 뒤편에 있는 묘지로 들어왔다. 과거에 악과 싸웠던 전사자들의 하얀 비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묘지를 채우고 있다.

그중에 가장 앞, 가장 중앙에 커다란 은빛 십자가가 세워져있었다.

“오늘도 네이트 님이 이곳을 보다 가셨네요.”

“여전한가?”

“미약하지만 그분의 영력을 느낄 수가 있어요. 이 십자가를 주물로 써서요.”

“우리 세대가 영력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야. 그마저도 감각이 둔해졌지만.”

네이트와 파보크는 은빛 십자가 아래에 하얀 꽃을 한 송이씩 두었다.

“반드시 그 세계에서 탈출하고 천국에 갔으면 좋겠군.”

“그것도 본인이 원해야 갈 수 있는 거겠죠.”

“원하지 않을까. 그의 여동생이 성불하여 천국으로 갔다면 말이지.”

“글쎄요. 리인은 진작 윤회했을 것 같아요. 행복한 가정이 있는 곳에서 건강한 몸으로요.”

“페인이라면 동생이 그러길 바랄 수도 있겠지.”

“그가 그러길 원한다면 네이트 님께서 들어주실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했거든요.”

“페인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겠군.”

“그는 현계에 남아서 저희를 관찰할 수도 있어요. 일종의 수호신이자 관찰자처럼요.”

산뜻한 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그게…. 그에게 구원이 되었을까?”

“항상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제게 남은 마지막 영력을…. 네이트 님께서 남겨주신 영력을 모두 그에게 쓰고 있으니까요. 칠흑 속에 갇힌 그가 차원 너머의 제 목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말이죠. 이후는 본인이 선택할 거예요.”

그러면서 네이트는 보이지도 않은 바람을 눈으로 좇듯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파보크도 그녀를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뭐였죠?”

“음?”

네이트는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녀의 동공에는 명확하게 초점이 잡혀있었지만, 역시나 그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는 그녀 자신도 파보크도 알 수가 없었다.

* * *

나는 무지개처럼 어지럽게 색상이 뒤섞인 미지의 차원을 나아갔다. 나더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은 한 점의 작은 빛을 따라서 끊임없이 나아갔다.

그러다 어떤 차원의 벽을 뚫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감각이 내 영혼을 부글부글 끓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칠흑의 세계에서 흡수한 거대한 악이 함께 씻겨나가서 영혼이 정화되는 것만 같았다.

비록 갖고 있던 악이 씻겨나가면서 힘은 잃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차원의 벽을 넘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윽고 내 주변에 펼쳐진 것은 실재세계였다.

「이거…. 아그니샤의 무기잖아?」

‘아그니샤!’

두 사람이 커다란 은빛 십자가 앞에 서있었다.

“오늘도 네이트 님이 이곳을 보다 가셨네요.”

“여전한가?”

“미약하지만 그분의 영력을 느낄 수가 있어요. 이 십자가를 주물로 써서요.”

여기에 비석처럼 꽂힌 십자가가 그런 용도였다고 한다.

‘파보크!’

「왜 반응이 없지?」

“우리 세대가 영력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야. 그마저도 감각이 둔해졌지만.”

「아.」

망가진 인과율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지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들이 내 영혼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고인이 됐네.」

두 사람은 은빛 십자가 아래에 하얀 꽃을 한 송이씩 두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내 묘비인 것 같다. 나를 추모하러 온 것 같다.

“반드시 그 세계에서 탈출하고 천국에 갔으면 좋겠군.”

나는 탈출했다. 악으로 들어찬 칠흑 같은 세계에서 탈출했다. 네이트가 보여준 빛 덕분에.

“그것도 본인이 원해야 갈 수 있는 거겠죠.”

“원하지 않을까. 그의 여동생이 성불하여 천국으로 갔다면 말이지.”

“글쎄요. 리인은 진작 윤회했을 것 같아요. 행복한 가정이 있는 곳에서 건강한 몸으로요.”

「리인이 윤회했을 수도 있다고?」

“페인이라면 동생이 그러길 바랄 수도 있겠지.”

리인이 천국에서 살아간다.

혹은 윤회한다.

「어땠으면 좋겠어?」

당연히.

‘윤회했으면 좋겠어.’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리인의 삶은 너무 짧고 암울했다. 그 아이는 다시 태어나서 더 나은 삶을 살다가, 실컷 살다가 천국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가 그러길 원한다면 네이트 님께서 들어주실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래, 아까 아그시냐가 말했잖아. 오늘도 네이트가 이곳에 왔다 갔다고. 여기서 기다리면 네이트가 우리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거야.」

“페인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겠군.”

“그는 현계에 남아서 저희를 관찰할 수도 있어요. 일종의 수호신이자 관찰자처럼요.”

‘나 여기에 있어.’

나는 네이트와 파보크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육체도 없이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내 존재감을 느끼지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그게…. 그에게 구원이 되었을까?”

그러자 아그니샤는 대답했다.

“항상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제게 남은 마지막 영력을…. 네이트 님께서 남겨주신 영력을 모두 그에게 쓰고 있으니까요. 칠흑 속에 갇힌 그가 차원 너머의 제 목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말이죠. 이후는 본인이 선택할 거예요.”

좋다.

이거면 충분하다.

정말이지 과분할 정도다.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셰르카라면 다르지 않을까?」

「걔는 영혼의 소리를 듣잖아.」

「너와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 셰르카가 있었다.

나는 급히 두 사람을 지나쳤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탓에 존재 추적을 발동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 저택에 있겠지!」

“……방금 뭐였죠?”

“음?”

나는 나를 돌아보고 있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중앙교회를 빠져나갔다.

세인트 왕국이다. 거리에는 활력이 넘친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삶의 의지와 희망이 돋보인다. 잘 됐다. 정말 잘 됐다.

“조금 있다가 역병 교수들의 집회가 있대.”

나는 거리를 빠르게 가로지르면서 행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집회? 어디서?”

“셰르카의 안식처에서.”

안식처.

저택이라면 그런 단어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셰르카가 역병 교수, 역병 의사 집단을 통솔하기 위해 어떤 거점을 구축한 모양이다.

「셰르카의 안식처가 어디야?」

모른다. 하지만 곧 집회가 있다고 했으니까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이고 있으리라.

나는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거리를 내 아래에 두고서 행인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니 상당수가 어느 방향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던 것이다.

행인들을 따라서 비행했다.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앞서갔다. 그러자 도시의 외곽까지 나오게 되었다.

「저쪽! 역병 의사들이야!」

이렇게 멀리서도 그들의 특징적인 복장이 뚜렷하게 보인다. 어두침침한 방독면에 로브를 두르고 있는 역병 의사들이다.

나는 역병 의사들의 뒤에 붙었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를 엿들어 정보를 얻으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들은 셰르카의 안식처로 이동하는 길에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어쨌든 셰르카의 안식처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한 것 같다.

낮은 언덕이 있고 저 언덕의 꼭대기 중심에 우산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가로등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낮은 벽돌 울타리가 언덕을 둘러싸고 있으며, 울타리의 출입구로 보이는 곳에 세 역병 교수들이 수십의 역병 의사 집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운 자들이다.

「매! 독수리! 올빼미!」

나는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주술을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강령술사 페인 님으로부터 시작된 ‘역병 혈맹’은 주술과 흑마법의 조화를 통해 거악을…”

매가 연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건 왜일까. 듣는 귀가 한둘이 아닌데.

「셰르카는?!」

‘당연히 저 위에 있겠지.’

나는 역병 교수들을 지나쳐서 언덕의 위로 올랐다. 우산 모양의 가로등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홀연히 보이는 것은 묘비였다.

묘비에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녀는 고요한 꿈을 이루었다?」

그녀는. 셰르카는.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축복이 저주가 되어서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그 저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이었지만, 그녀는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의지를 가졌다. 의지를 가진 채 나를 만났고, 나와 함께 싸우다가 꿈을 가지게 되었다. 기억이 난다.

- 꿈이 생겼다.

- 뭔데?

-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 조용한 세계에서 잠을 자보고 싶구나.

셰르카의 나이는 150살 이상을 넘긴 상태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죽었어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흑마법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그 흑마법 또한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있어선 안 될 것들이 사라지고 돌아가야 할 것들이 돌아가게 된 세계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백골(白骨)이 되었다.

그녀는 도심으로부터 동떨어진 조용한 외곽의 작은 언덕 위에, 이리를 닮은 가로등 아래에 안치된 것이다.

이렇게나 고요하게.

「셰르카가 없으면 아무도 우리 말을 못 들어주잖아….」

‘아니야. 있어.’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칠흑의 세계에서 찾았던 한 점의 빛을 떠올리며 중앙교회로 돌아왔다. 은빛 십자가로 된 묘비로 돌아와서 가만히 기다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네이트가 올 것이다.

「언제 오는데?」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로 네이트가 또 찾아온다는 건 확신할 수 있다.

「네이트가 오면 무슨 말을 하려고?」

「윤회할 거야? 아니면 천국으로 데려가달라고 할 거야?」

‘고맙다고 할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