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차원의 강령술사-181화 (완결) (181/181)

36. Epilogue. 완성된 세계 (完)

「네이트가 오면 무슨 말을 하려고?」

「윤회할 거야? 아니면 천국으로 데려가달라고 할 거야?」

‘고맙다고 할 거야.’

나는 계속 기다렸다. 해가 떨어져서 밤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중앙교회를 들락날락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도 네이트는 오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이라도 네이트가 올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믿으며 계속 기다렸다.

그러자 새벽에 아그니샤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내 묘비 앞에 서서 은빛 십자가를 응시했다.

“…당신.”

설마, 나는 뒤를 확인해 보았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다. 은빛 십자가뿐이다.

“당신 말이에요. 페인 씨.”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지금 거기에 있죠?”

‘어떻게 알았어? 내 존재감이 느껴져?’

“있다면 뭐라도 해보세요.”

지금의 나는 무능력자다.

나는 칠흑 같은 세계에서 망자가 되었고, 그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 그 세계에 있던 악을 전부 흡수한 능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흡수한 악과 영력을 모조리 소모하여 어지러운 차원을 건넜고, 실재세계로 넘어와서 다시 무능력한 망자가 된 것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깥을 돌아다녔어요.”

‘그래! 아그니샤! 나 여기에 있어!’

“이상했거든요.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인데. 왕국의 어디를 가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었는데 말이죠.”

아그니샤가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뺨을 따라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도 무표정이다.

“그런데 아까 그 순간, 오직 그 순간에만 바람이 불었어요. 심지어 이곳은 사방이 꽉 막힌 분지인데 말이에요.”

있다면 뭐라도 해보라고 했다. 내가 여기에 있다면 뭐라도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손이 없어서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를 잡고자 상상하고 노력했다.

“제 마음에 짐이 있어요…. 이기적인 말을 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저는 이 짐을 덜어내기 위해,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행복해. 다 만족스러워.’

“당신이 구원받았으면 좋겠어요.”

‘너부터 구원받으라고. 이렇게 좋은 세상이 됐는데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5년을 기다렸어요.”

답답하다. 아무리 의지를 가지고 목소리를 크게 내보려고 해도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네 덕분에 여기로 온 거라고! 아그니샤!’

「뭐라고 말하든 어차피 안 들려.」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 바람이 불 수 없는 분지에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것이 이상해서 내가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바람이 불게 하면 된다.

나는 그녀의 몸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있어요?”

그녀 또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 여기에 있어.’

그러자 그녀는 내가 생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찾았어요? 빛.”

그녀의 미소였다.

‘찾았어.’

좀 전까지 무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녀가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었다.

“네이트 님은 내일 새로운 해가 떴을 때 오실 거예요.”

내일 새로운 해가 떴을 때.

‘고마워.’

그녀가 내 목소리를 들었을 리가 없지만, 그녀는 나와 똑같은 말을 했다.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 * *

나는 새로운 해가 뜨고서 네이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당연한 것이지만, 중앙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네이트와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차원과 인과율이 안정되고 있어요. 4년 전에 왕국의 어느 도축업자가 악령화를 일으킨 이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악령이 되진 않았죠. 그게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악이었던 거예요. 샤로부터 시작되어 차원을 넘어온, 잘못된 악이었죠.”

「일부러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게 아니더라도 도축업자가 가축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가 업보로 쌓였잖아. 그런 억울한 업보 같은 건 아직 변화가 없는 건가?」

“변화되었어요. 죄라는 것의 기준이 달라졌고, 누가 얼마나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처리는 대체로 죽은 후의 인과율에 맡기게 되었죠. 누구든지 자신의 업보는 죽어서야 깨닫게 되는 세계가 되었다는 거예요.”

「괜히 질문했다.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해.」

‘마법과 주술도 사라졌습니까?’

“마법, 주술, 흑마법, 영력의 개념이 사라졌어요. 근원이 사악한 힘은 지옥으로, 근원이 선한 힘은 천국으로 돌아갔다는 뜻이죠. 이제 이 세계는 오로지 인류의 것이 되었어요.”

‘샤는 어떻게 됐습니까?’

“페인. 당신이 샤의 악을 모두 짊어지고 차원 너머로 사라졌죠. 지금쯤 당신이 갔던 그 차원 너머의 세계도 사라졌을 거예요. 따라서 샤의 잘못된 악과 꿈도 소멸한 셈이죠. 샤와 같은 영혼을 가진 존재가 나타날 일은 영원토록 없을 거예요.”

‘정말 다행입니다.’

네이트의 황금빛 동공이 나를 꿰뚫어보고 있다.

“당신의 영혼은 정화되었어요. 업보와 악이 사라지고, 근원이 사악한 힘이 사라지게 되면서 당신의 능력 또한 사라지게 되었죠.”

나는 죽은 존재다. 무능력한 망자가 되었다.

‘리인은 윤회했습니까?’

“당신이 성불시킨 그 영혼은 천계를 떠돌다가 현계로 내려와서 윤회했어요.”

‘그건 리인이 원한 일입니까?’

“원했어요. 당신을 위해서.”

무슨 말인가 싶다. 천국에서 살든 실재세계에서 윤회를 하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면 되는 게 아닌가. 어째서 한번 죽고 성불까지 한 그 아이가 마지막에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나를 위한 선택이 어째서 ‘윤회’라는 말인가.

“세인트 여신님께서는 그 가여운 영혼에게 사사로운 죄를 묻지 말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갈 기회를 주자고 하셨죠. …당신의 사정까지 고려해서 최대한 좋은 환경으로 보내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되는 거야?」

“원래는 영혼의 의지와 인과율의 선택에 맡겨야만 해요. 천계의 심판은 엄청난 선행을 축적한 영혼이나, 반대로 엄청난 악행을 축적한 영혼만을 대상으로 하거든요. 그밖에 다른…. 당신 말대로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빴던 대다수는 모두 심판 없이 인과율에 따라서 윤회해요.”

즉, 천국으로 승천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자들은 극소수라는 말이었다.

“이제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으신가요?”

‘제가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

“많죠.”

‘….’

애석하게도 당장 네이트에게 말하고 싶은 ‘나의 미래’가 없다. 칠흑 같은 세계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는데 그동안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선 하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만 걱정하셨죠? 그래서 정작 본인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하나도 모르겠는 거잖아요?”

정곡을 찔렸다.

그래도 네이트는 내게 자비로웠다. 선택권을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망자인 나의 영혼을 이 자리에서 곧장 거두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과율에 따르면, 이 세계를 나처럼 육체가 없는 영혼이 배회해선 안 되는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게요.”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네이트는 잠시 천계로 올라갔고, 나는 내 묘비 앞에 남아서 정말로 나를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페인.」

「나도 결국엔 사라질 존재야.」

「난 악령이잖아.」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고 깊게 고민하려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내 안의 악령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천국으로 가.」

「거기서 실컷 살다가, 천국에서의 삶이 질리면 윤회하라고.」

「그동안 엄청 고생했잖아?」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였다. 묘지를 나와서 중앙교회의 찬란한 정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계속 고민했다.

나는 어느 세계로 가서 어떤 존재가 될지 선택할 수 있지만 내 안의 악령은 아니다.

내 안의 악령은 사라져야만 한다. 사악한 존재니까. 인과율에 어긋나는 존재니까. 내가 갈 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니까.

그러다 나는 무심코 중앙교회로 들어왔다.

“아빠! 저거! 저거!”

“이곳에서는 조용히 해야지.”

“강령술사님이야?”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아이가 내 존재를 눈치챈 건가 싶어서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이는 짧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던 것이다.

「저건…. 너잖아…?」

한 손에 악마의 머리를, 다른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든 것 같다.

그리고 내 조각상의 아래에는 짧지 않은 글귀가 있었다.

괴물의 독니가 그의 목덜미를 물자, 그는 독액을 삼켰다.

지옥불이 그를 태우자, 그는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였다.

부정한 빛이 그를 가루로 만들자, 그는 부정한 어둠으로 일어섰다.

끔찍한 질병이 그의 생살을 썩게 하자, 그는 병자들을 치료하였다.

사악한 군대가 그를 짓밟자, 그는 더 사악한 괴물 군단을 불러냈다.

「신화가 됐네.」

심장이 몇 번이나 터져도 살아남아 용맹하게 싸우던 불사신.

몸소 악인을 처단하던 저승사자.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뒤집어쓰고 다차원을 구원한 영웅.

스스로 지옥까지 찾아가 악마들에게 도끼를 휘두른 페인.

강령술사.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자, 악마들의 악마였다.

“응. 강령술사님이셔.”

“악마를 혼내주는 거야?”

「죽여버리는 거지. 피를 쏟게 하고 내장을 뜯어내고 마지막엔 영혼까지 씹어삼켜서…」

“나쁜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야.”

“내 방에 걸려있는 그림도 강령술사님 그림이야?”

“응. 강령술사님께서 악마들을 쫓아주시잖아.”

“저 가면이 무섭게 생겼어.”

“악마들이 더 무서워하지. 나쁜 사람들도 무서워하고.”

“나쁜 사람들은 왜?”

“나쁜 사람들에겐 저승사자가 되어서 찾아오시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지.”

“난 착하니까 잡혀가지 않을 거야.”

아버지는 아이에게 가르쳤다.

“엄마랑 아빠가 밤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그거야. 아무리 깊고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아무리 무서운 악마가 찾아와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강령술사님이니까.”

아이는 내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신화를 동경하는 듯했다.

“아빠.”

“응?”

“강령술사님이 우리 편이라서 다행인 것 같아.”

뭔가 알 것 같다.

내가 무엇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다.

「정했어?」

‘사람들이 정해놨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지금 보니 이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무언가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보니 무언가가 되고 만 것이다.

「그건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아니잖아.」

‘원해.’

기억을 되짚어 돌아간다.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그 끝에 찾아낸 것은 나의 시작이었다.

‘사악한 것을 사냥한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악령이 지나온 이야기다. 그리고 앞으로도 걸어가게 될 길이다. 그 이야기가 처음에는 타의였지만 점차 자의가 되었고, 나의 마지막 꿈이 된 것이다.

‘같이 지옥으로 가자.’

「미친놈아!」

‘거기서 악마들을 관리하겠어. 잘못된 놈들을 골라서 사냥하겠어. 그렇게 살아갈 거야.’

「그건 좀 아니지!」

‘싫다고?’

「나는 좋아! 좋다고! 그런데 넌 다르잖아!」

와중에 악령이 욕망에 충실하지 않고 내 걱정이나 하고 있다.

「지옥에서 영원히 악마나 사냥하면서 살아가는 게 너한테 좋을 것 같아? 정말로?」

‘언제든 차원을 넘나들 수 있어.’

강령술사는 차원을 넘나든다.

‘영원히 지옥에서만 살겠다는 게 아니야. 그 일에만 사로잡혀서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면서 살겠다는 이야기지.’

가끔 이렇게 실재세계로 와서 사람들이 잘 살고 있나 구경도 하고. 지옥에서 사냥도 하고. 천사들과 대화도 하고.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랑 헤어지기 싫다고 고집부리지 마.」

‘너랑 헤어지기 싫어. 그 이유도 맞아.’

「그럼 제발…」

‘만약 리인이 천국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면 널 내 영혼에서 떼어내버리고 천국으로 갔겠지.’

「…어어?」

‘그래서 윤회한 것 같아.’

나는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예상은 했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인은 달랐던 것 같다.

리인은 내게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전부터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리인은 깊게 고민한 끝에, 나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알겠어. 우리 둘은 계속 영혼이 붙어있을 거야. 그래서 네가 나랑 같이 지옥에 간다고 해. 그럼 나는 악령이지만, 넌 결국 뭐가 되는 거야? 인간도 아니고 악령도 아니고….」

나를 그런 것으로 분류할 생각은 없다. 나는 인간의 마음과 악령의 힘을 갖고 있는 존재다.

‘악인한테는 저승사자. 악마에겐 악마라고 하잖아.’

「그게 어쨌다고?」

‘내가 그거라고.’

저 아버지와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빛을 등진 조각상처럼. 저것에 적힌 글귀처럼. 신화처럼.

바로 저것이 내 모습이다. 내가 만들어냈으며, 사람들이 정하게 된 내 모습이며, 신화로 포장된 내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영원히 기억하게 될 내 모습이다.

그래서 이 순간, 나는 저 모습을 동경하게 되었다. 꿈꾸게 되었다.

나는 다차원의 강령술사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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