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디 임팩트 1권 2화
“안녕하세요, 김 사장님.”
“아, 예.”
박 선생의 친구인 김 사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도현에게 인사를 깊게 했다.
“오다가 그 친구 만났습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갑니까? 안 그렇습니까, 관장님? 호검술이라는 절세의 검법을 배우려면 이를 악물고 수련을 해야지 말이야.”
“다 사정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요. 나랑 약속을 같이했으면서. 하아, 이거 어쩐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사실, 전 몸이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지만, 친구가 버티고 있어서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를 꾄 그 친구가 먼저 그만두고 말았으니……. 미안합니다, 백 관장님. 40대를 넘기다 보니 몸이 생각처럼 따라 주지 않아요.”
솔직한 그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압니다. 그래도 오래 버티셨습니다.”
“솔직히 힘은 들었지만 하체가 건강해진 느낌은 들었는데, 이거 많이 아쉽습니다.”
“어느 운동이든 꾸준히 하십시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도현은 김 사장이 사라지자 갑자기 목이 말라 왔다.
지난 3년간 수없이 겪어 왔던 일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의미가 달랐다.
‘이제 한 명.’
왠지 그마저 오늘 그만둘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도 채 안 된 20대 초반의 대학생은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기가 껄끄러웠는지, 전화상으로 다닌 지 일주일도 안 됐으니 회비 중 일부를 환불받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왔다.
도현은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죠.”
불 꺼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도현은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진검을 좌정한 다리 위에 올려놓고 몇 시간째 명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관원 없이 이 자리만 그대로 유지하자.”
아버지의 추억이 깊게 밴 이 공간이 중요한 것이지 어차피 그는 아버지처럼 남을 가르치는 게 애초에 재미가 없었다.
그는 도장의 관원들이 줄어드는 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호구를 입고 죽도로 호쾌하게 대련하는 일반적인 검도관들과 달리 심신의 단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고생만 시키는 검술 도장이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아쉬웠지만 도현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3년간 몇 안 되는 관원들 교육시키며 밤낮으로 검 수련에만 몰두했던 터라 수입이 변변찮았고, 이는 그대로 누적돼 통장의 잔고를 압박해 왔었다.
어차피 돈을 벌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도현은 검을 뽑아 들고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가상의 적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날리기 시작했다.
-통일마, 통일마 무섭게 치고 들어와 어느새 2위를 제치고 선두를 바짝 뒤쫓고 있습니다.
“달려라, 달려!”
“그래, 통일마! 저력을 보여 줘! 새끼마에게 지면 안 되지!”
실내 스크린을 보며 쥐어짜듯 소리치던 사내의 얼굴이 터질듯 부풀어 올랐다.
통일마가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두고 극적으로 역전하는 순간 사내는 경마권을 와락 움켜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 이대로 가는 거다, 통일마! 반 바퀴 남았어!”
“거, 아저씨, 좀 조용합시다. 귀청 떨어지겠네.”
단정하게 생긴 젊은 사람이 비딱하게 쳐다보자 통일마를 응원했던 사내는 그를 흘깃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더욱더 응원 소리를 높였다. 딱 보니 새끼마에게 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응원을 다시 시작하자마자 새끼마가 머리를 거칠게 한번 흔들더니 앞서 가는 통일마를 따라잡았고, 결국 그대로 선두를 유지하며 끝을 내 버렸다.
“그래, 씨팔! 바로 그거야, 새끼마! 내가 뒷심 강할 줄 알았어! 딱 보면 안다니까, 으하하하!”
귀청 떨어진다고 심술을 부렸던 젊은 사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내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고함을 연신 질러 댔다.
“아저씨, 다음에는 새끼마에게 거세요. 뒷심 좋다니까.”
“이 사람이 누구 약 올리나!”
눈을 치켜뜨는 사내를 뒤로하고 용주는 환전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환전소를 그대로 지나쳐 화장실에 들어가서 크게 한번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새끼마에 걸고 싶었는데.”
사실 그는 통일마도 새끼마도 아닌 엉뚱한 말에 걸었다.
벽을 잡고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던 그는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도현이잖아?”
그는 경마 얘기로 시끄러운 화장실과 건물 내부를 빠르게 뛰어서 밖으로 나온 뒤 급히 전화를 받았다.
“하아하아, 여보세요.”
-왜 그리 숨이 가빠?
“숨 하나도 안 가쁜데.”
용주는 대답을 하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거친 숨을 몇 번 토해 냈다.
-실내 경마장에서 나왔지?
“자식이 무슨. 아니야, 인마!”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저녁 같이 먹자. 도장으로 와.
“오늘 교육 없냐?”
-관원들이 어제 모두 나갔어.
“크크크.”
-왜 웃냐?
“역시 넌 운동은 잘해도 경영은 아니라니까. 도장도 사업이야, 자식아. 진작 내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아버님 계실 때보다 훨씬 나았을 텐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용주는 말을 하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와서 대련 한번 할까?
도현의 말에 용주는 딸꾹질을 하며 전화를 냉큼 끊었다.
도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둘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무도인이 술 좋아해서 큰일이다. 너 그래서 언제 바위를 두 동강 낼래?”
용주의 타박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소주가 채워진 술잔을 내려다봤다.
콧속으로 알코올 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가능이나 한 걸까?’
작은 통나무까지는 단숨에 잘라 낼 수 있지만, 돌을 두부 자르듯 베어 낸다는 건, 아직 꿈같은 이야기였다.
알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강하게 채찍질하며 지난 3년 동안 도장에서 치열하게 수련해 왔다. 자신이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아버지에게 분명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도현아, 도장 문 닫으면 뭐 할 거냐?”
“찾아봐야지.”
“세상이 아주 뭣 같은 게 누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서는 수억, 수십억을 앉아서 벌고, 누구는 개같이 고생하고도 한 달에 돈 몇백 벌기 어려워. 아주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내가.”
용주는 고기와 야채를 입안에 넣고 으적으적 씹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너 개인 지도 한번 안 해 볼래?”
“개인 지도라니?”
도현의 물음에 용주가 입가를 손바닥으로 싹 닦으며 대답했다.
“아는 사람 중에 자식 농사 잘못 졌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어. 나와 비슷하대. 쳇, 감히 누굴 비교해. 아무튼 이제 막 고 2 올라간 놈인데, 아주 개차반이래. 몽둥이찜질해서라도 인간답게 만들고 싶다면서 나보고 아는 사람 있냐고 물어.”
“나보고 하라고?”
“어. 도장에서 교육시키는 것처럼만 하면 그 녀석 몇 달이면 정신 번쩍 들 것 같던데. 유명하잖아, 너희 아버지 때부터 빡신 교육. 내가 몸소 겪어 보기도 했고, 흐흐.”
용주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단정한 얼굴과 달리 입이 조금 거칠고 성격이 독한 친구였다.
호검술을 다 익힌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도현은 용주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 성격 고치는 거 쉽지 않다. 자신 없어.”
“야, 너는 네 자신을 몰라서 그래. 너 얼마나 지독한 놈인데. 그 집에 일주일에 서너 번씩 들러서 아주 그놈을 아작을…….”
“용주야, 그만하자.”
“아, 자식, 보수가 괜찮은데.”
“네가 하면 되지.”
용주는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대꾸했다.
“나는 안 된단다. 에이,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술이나 마시자. 너도 솔직히 관원 없이 문 닫는 게 속 편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용주는 도현이 든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소리 나게 부딪쳤다.
순식간에 소주 몇 병을 비웠지만 도현은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식당을 나온 그는 용주와 함께 도장 근처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낡은 연립 빌라 3층.
도현은 술에 취한 용주를 방에 뉘였다.
그 역시 요즘 뭔가 답답한 일이 있었는지 평소 주량을 넘어 많이 마셨다.
“도현아, 이 형님만 믿어라. 사업 하나 크게 터트려서 내가 도장이며 뭐며 팍팍 밀어줄게.”
“고맙다. 불 끈다.”
거실로 나온 그는 아버지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한쪽엔 아버지가 모아 둔 온갖 무예 서적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출처가 불명확한 검법 서적들부터 갖가지 무기들을 활용해 전투에 이용하는 법, 각종 격투술과 체술 서적들까지.
아버지는 스스로 검도인이라고 칭했지만 상대방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종류의 무술을 사용하는지 알아보는 폭 넓은 안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경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며 어린 그에게도 호검술만이 아니라 서재에 있는 갖가지 무술들을 두루 섭렵하게 한 것이다.
놀랄 만큼 빠르게 익히고 숙련시키는, 엄청난 자질의 도현을 보며 백남식이 뿌듯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국어와 일어로 된 서적을 몇 권 꺼내서 옛날 생각을 떠올리던 그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책상에 아버지와 찍은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이 보였다.
명문대를 갈 실력이었지만 공부에 별 흥미가 없던 그는 대학교를 포기하고 바로 군에 입대했었다.
아버지는 너 할 대로 하라고 아무 말 안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그의 장래에 대해 분명 걱정했던 것 같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전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사진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린 도현은 그 상태로 시간을 잊은 듯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용주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이미 새벽 수련을 마친 도현이 식탁에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식탁 의자에 앉은 용주는 손에 쥔 봉투를 올려놓았다.
“뭐냐?”
도현의 물음에 용주가 코를 파며 대답했다.
“도장 유지비로 보태 써. 도장 유지하려면 임대료 꼬박꼬박 나갈 것 아냐.”
이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됐어. 내가 벌면 돼.”
“아, 자식. 운동만 하느라 네가 세상 물정을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너 취직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대학물 먹어도 일자리 없다고 난리야!”
“막일이라도 하면서 유지하면 돼. 체력 단련도 되고.”
“노가다가 우습냐? 뭐 툭하면 노가다 한대. 너 같은 놈이 노가다 판에 가면 다른 사람들 비교돼서 욕먹어.”
“용주야.”
“왜?”
용주는 수저로 국을 맛보며 힐긋 쳐다봤다.
“아직 난 빚은 없다.”
“그러니까 내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나 빚 얼마 안 돼. 걱정 말고 받아.”
“이거 뭐냐 그럼?”
도현이 조금 굳은 얼굴로 용주의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어젯밤 용주가 거실을 지나다 떨어트린 휴대폰이었다.
아침에 도현은 우연히 용주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가 계속 와서 혹시 급한 일인가 싶어 슬쩍 앞 내용만 확인한 것이다.
용주가 보니 빚 독촉 문자메시지가 여러 건이었다.
“아, 자식들, 아침부터 지랄들이네. 큰돈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병원에 계신 백 관장님, 내게도 아버지 같은 분이셔. 도장 유지하는 데, 나도 도울 수 있는 거 아니냐?”
“나중에 도와. 빚 다 갚고.”
도현이 눈에 힘을 주자 용주는 입을 내밀며 돈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먹던 용주는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슬쩍 곁눈질로 누군지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채무자는 아니었다.
“예, 삼촌. 아니에요. 지금 도현이 집이에요. 네? 오늘요? 죄송한데요, 제가 요즘 바빠서요. 나중에……. 후우, 알겠습니다. 이따 찾아뵐게요.”
답답한 얼굴로 전화를 끊는 그를 보며 도현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삼촌이 오늘 집에 오래.”
“왜?”
“왜긴 왜겠냐. 또 무슨 테스튼가 뭔가 때문이겠지.”
용주의 삼촌은 초고대 문명 연구가이자 과학자로, 주변에선 살짝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이였다.
작년에도 초고대 문명의 설계도를 이용해 사람의 몸을 작아지게 만들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며 그와 용주를 장치 안에 들어가게 해 놓고 테스트를 했었다.
당연하게도 몸이 작아지거나 하는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시골집에 위치한 지하 연구실에 온갖 기계들을 모아 놓고 음산한 불빛 아래에서 연구를 하는 분이었다.
“이번엔 무슨 테스트?”
“몰라 나도. 가 보면 알겠지. 너도 같이 갈래? 도장 문도 닫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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