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디 임팩트 1권 4화
“물러서!”
“흐흐흐, 겁쟁이 놈.”
사내는 도현이 겁을 집어먹고 발버둥 치는 것으로 보았는지 더욱더 사납게 검을 휘두르며 압박해 왔다.
몇 차례 검을 막아서던 도현은 사내의 검에 실린 힘에 적지 않게 놀랐다.
검술은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검에 실린 기운은 가벼운 게 아니었다.
도현은 빠르게 주변을 돌아봤다.
검과 방패, 철을 두드려 만들었을 여러 가지 형태의 날카로운 무기들이 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총이 아닌 검의 시대야.’
마치 과거로 회귀한 듯한 묘한 울림을 받은 도현은 상대방의 검을 교묘히 옆으로 밀쳐 내며 번개같이 사내의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이 싸움과 관련이 없다고 했잖아!”
도현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며 살짝 손목을 비틀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 쳤다.
서걱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도현을 공격하던 사내의 허벅지 양쪽에서 피가 동시에 솟구쳤다.
“크윽!”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사내가 주저앉자 도현은 손을 약간 떨었다.
20여 년간 검을 수련해 온 그였지만, 실전은 처음이었다.
‘진짜 사람을 벴어.’
피를 흘리며 무릎 꿇은 황소 뿔 투구의 사내를 쳐다보던 도현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칼을 한 번 더 휘두르면 충분히 사내를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묵직한 검의 무게와 후끈한 살의에 찬 공기들, 피 냄새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부상당한 병사의 눈빛.
도무지 꿈이나 환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진짜 현실이다.
조 박사의 실험이 성공해 차원 이동을 한 것으로밖에 여길 수 없었다.
철퍼덕!
어디선가 날아온 철퇴가 도현의 검에 부상당한 병사의 안면을 뭉개 버리며 도현의 짧은 상념을 깨 버렸다.
쇠사슬에 연결된 사람 머리만 한 철퇴를 무기로 사용한 거구의 사내는 힐긋 도현을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이 녀석과 싸우는 것을 봤다. 우리 편이면 복장을 제대로 갖추는 게 좋을 거야. 배신자가 아니라면.”
“난…….”
도현은 말을 하다가 옆에서 공격하는 또 다른 황소 뿔 투구의 사내의 검을 막아 냈다.
그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 준 거구의 사내도 이미 다른 자와 전투에 돌입한 상태였다.
‘싸우지 않고서는 이 전투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어.’
이들이 누구인지, 왜 싸우는지는 깊게 고민할 수도 없었다. 그저 서로 복장이 다른 양 진영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당하기보다는 한쪽과 싸우는 게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 뿐이다.
도현은 상대의 검을 옆으로 쳐 내며 뒤돌려차기로 상대의 안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투구에 보호되고는 있었지만 도현의 발길질에 실린 힘도 보통이 아니어서 상대방은 뒤로 벌렁 넘어지며 순간적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우지직.
도현의 발길질에 넘어진 병사는 곧 다른 진영의 병사로 보이는 자의 방패에 얼굴이 쪼개지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잔인한 모습에 도현은 굳어진 얼굴로 주변 바닥을 재빨리 쓸어 봤다.
서두르지 않으면 보이는 모든 사람과 다 한 번씩 싸워야 될 판이다.
‘저걸로 하자.’
내장을 쏟아 내며 죽은 한 병사의 머리에서 원형 투구를 벗겨 쓴 그는 싸우면서 하나둘씩 걸쳤는데, 자신의 몸에 맞는 갈색의 가죽 갑옷과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질긴 가죽 장화까지 착용했다.
이제는 누가 봐도 황소 뿔 투구 병사들과 맞서 싸우는 진영의 병사였다.
‘후우, 후우.’
도현은 거친 숨을 뿜어내며 또다시 한 병사를 쓰러트렸다.
‘도대체 몇 명째지? 일곱 명, 여덟 명?’
죽이지 않으려 해도 상대방은 목숨을 걸고 악착같이 덤벼들어서 사정을 봐줄 형편이 아니었다.
혹 그가 그냥 부상만 입히면 곁에 있던 다른 자들이 귀신같이 달려들어서 그런 사람들의 목숨을 끝까지 취해 버렸다.
피를 흘리며 고꾸라지는 자들을 보면 도현은 심장이 떨릴 정도로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아야 돼!’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도현은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검을 수련하는 검객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며 누누이 마음가짐을 강조해 온 아버지다. 서서히 20여 년을 수련해 온 검객으로서의 차가운 비정함과 평정심을 회복한 그는 부드럽게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다만 태양이 점점 기우는 걸 보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기회를 봐서 이 전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느새 그 주변으로 여러 명이 한데 뭉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 중심엔 그가 존재했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도현이 마음을 다잡고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자 그 진가가 나타났고, 자석에 쇳가루가 달라붙듯 강해 보이는 도현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뭉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도현이 전장을 벗어나기 위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근처 병사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 이동하며 전투를 해서 전장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어찌 된 일인지 전장의 한복판에 더욱 가까워졌다.
결국 그는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버텨야만 했다.
노을이 진 들판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도현은 병장기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자네 굉장하던데, 검은 어디서 배운 건가?”
주름이 가득한 늙은 병사는 도현의 곁에서 죽기 살기로 붙어 다니며 위험을 여러 번 넘겼다.
그중 두어 번은 도현이 직접 목숨을 구해 주어서, 그 고마움이 각별했다.
“아버지께 배운 겁니다.”
“훌륭한 부친을 두었군.”
도현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피가 잔뜩 묻은 병장기들을 옆을 지나는 수레에 실었다.
수레에는 아군과 적군이 죽으며 남긴 무기들이 가득했다.
이들이 왜 싸웠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한쪽을 선택해 싸워야만 했던 도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는지 친하게 지내려고 다가왔던 늙은 병사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뒤돌아섰다.
“나중에 보세.”
도현은 혼자 있게 되자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밤이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그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수백 명의 병사들 틈에 낀 도현은 격렬한 전투 뒤에 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안이 오목하게 들어간 넓은 접시에 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받던 그는 횃불을 얼굴에 가져다 대는 사내를 쳐다봤다.
일반 병사와 달리 은빛 갑옷을 걸치고 옆에 검을 찬 사내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 소속이지?”
도현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뭐라도 먹은 뒤에 이곳을 벗어나자 싶어 망설인 끝에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는데, 실수한 것 같았다.
“복장을 보면 커딜 영지에서 온 병사 같은데, 왜 그쪽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배식을 받는 거지?”
도현의 시선이 은빛 갑옷을 걸친 사내의 어깨 뒤로 보이는 또 다른 배식 줄에 갔다.
‘내 복장이 어디가 달랐나?’
그러다 문득 가죽 갑옷 위에 낙인처럼 찍힌 문장을 생각해 냈다.
복장은 비슷해도 손바닥만 한 크기로 찍힌 문장은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제가 배고파서 착각을 했나 보군요.”
도현은 신분이 있어 보이는 사내에게 정중히 대꾸를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기다려.”
사내의 지시에 도현은 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 하는데, 곳곳에 병사들이 가득했다.
뚜벅뚜벅 걸어온 사내는 도현을 노려보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같이 승리한 날, 우리 영지의 병사들과 너를 차별할 필요는 없겠지. 가지고 가라.”
그의 손에는 고기 수프가 가득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긴장을 푼 도현은 접시를 받아서 커딜 영지 소속의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래 있을수록 내 정체가 의심받겠어.’
그는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작정하며 같은 문장이 장식된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들 속에 스며들었다.
불을 피워 놓은 곳과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얼굴을 숙이며 음식을 먹던 그는 누군가 앞에 서자 조용히 고개를 세워 상대방을 응시했다.
“그걸로 되겠나?”
낮에 함께 전투를 벌였던 늙은 병사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받게. 전투 후엔 이런 걸 먹어 줘야지.”
그가 건네는 럭비공만 한 통 안엔 종류를 알 수 없는 술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앉아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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