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디 임팩트 1권 5화
도현은 자리를 조금 비켜 주었다.
“하아, 오늘 전투는 근래 보기 드문 험한 전투였어. 그래도 살아남은 덕분에 보상은 두둑하게 받겠지.”
노병은 착용하고 있던 원형 투구를 벗어 옆에 놓으며 별이 촘촘히 올라온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노병의 옆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이곳이 어딘지 물어볼까? 왜 싸웠는지.’
도현은 망설이며 술통을 만지작거렸다.
조 박사 실험의 여파로 이곳에 떨어진 거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슨 수를 쓰든 버텨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정보라도 얻어야만 한다.
하지만 수상한 질문은 득보다는 실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술 마셔 보게. 내가 보급대로부터 간신히 구해 온 걸세.”
“아, 네.”
도현은 마지못해 술을 한 모금 했다.
쓰고 독한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전신이 바로 훈훈해졌다.
그는 몇 모금 더 한 후, 노병에게 술을 돌려줬다.
“싸움을 왜 하는 걸까요?”
망설이던 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듣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질문이었다.
“왜 하긴, 몰라서 묻나?”
거침없이 술을 들이켠 그는 입가에 묻은 술을 닦으며 뒤로 보이는 어두운 언덕을 가리켰다.
“저 언덕 너머에서 발굴 중인 지하 유적 때문이 아닌가?”
도현의 시선이 괴물처럼 웅크리고 서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운이 좋으면 지하 유적에서 여러 가지 귀중한 걸 발견할 수 있다는데, 이번엔 그 양이 상당한 가 봐. 그러니 우리까지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온 게 아닌가? 아무튼 지하 유적에서 금은보화나 보석 상자가 가득 나왔으면 좋겠어. 그래야 우리에게 보상으로 돌아오는 게 많지 않겠나?”
“그렇긴 하죠.”
도현은 적당히 대꾸를 했다.
“그런데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며칠 전 이곳에 도착했을 땐 자네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착각한 거겠지?”
노병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지자 도현은 속이 뜨끔했다.
마치 그가 이쪽 병사가 아닌 걸 안다는 것처럼 노병이 이야기를 꺼내자 도현은 가시방석 위에 앉은 기분이었다.
“괜찮네. 긴장하지 말게.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이해 못 할 아리송한 말을 남긴 그는 도현의 어깨를 다독이며 일어섰다.
“나이를 먹어선지 허리가 아파. 아, 그리고 말일세. 더는 다른 음식엔 손을 대지 말게. 물도 말이야, 알겠지?”
빙그레 웃음을 보인 그는 술통을 옆구리에 매달고는 휘적휘적 지하 유적이 있다는 언덕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 발걸음이 낮에 전장에서 보던 힘없는 걸음걸이가 아니라 사자가 걸어가듯 반듯하고 위엄이 흘러넘쳤다.
돌변한 늙은 병사의 모습에 도현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평범한 병사가 아니었어.”
그가 홀로 중얼거릴 때 사방에서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커헉!”
“독이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아!”
화롯불이 발버둥치는 병사들의 발길질에 넘어졌고, 불똥이 튀어 들판을 가득 메운 군막으로 옮겨붙었다.
바람까지 제법 불어서 불길은 천지사방으로 옮겨 다녔고, 입과 코에서 피를 쏟아 내는 병사들의 수는 더욱 늘어나 아비규환 지옥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 잘 뻗은 전투마들까지 거품을 물며 푸들푸들 떨다가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져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믿지 못할 괴사에 도현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급히 옆을 돌아봤다.
그와 조금 전 담소를 나눴던 노병의 자리에는 거구의 사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현도 키가 작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내 말을 듣고 복장을 잘 선택했군.”
씨익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낸 거구의 사내는 낮에 도현에게 어느 편인지 확실히 하라며 복장을 착용하라는 식으로 경고를 했던 인물이었다.
“운이 좋군. 그의 눈에 들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다니. 좋은 밤 보내게, 크하하하!”
한바탕 크게 웃은 그는 늙은 병사처럼 언덕 방향으로 뛰어갔다.
도현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거구의 사내와 늙은 병사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이렇게 만든 건가?”
수백 명이 넘게 모여 있던 군막은 어느새 유령이 머무는 자리처럼 고요했다.
움직이는 건 불타고 있는 군막들과 도현뿐이었다.
이성은 늙은 병사와 거구의 사내가 향한 언덕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도현의 발길은 그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손에 석궁을 든 도현은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어둠에 잠긴 언덕 너머로 기어 올라갔다.
오면서 언덕 주변을 지키던 수십여 명의 병사들이 모조리 죽어 있는 걸 봤다.
대부분 목에 구멍이 나 사망했다.
‘어둠 속에서 어떻게 단번에 치명상을 입혀서 죽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 깨끗한 칼자국이었다.
도현도 검의 경지가 결코 얕지 않은 뛰어난 검사였지만, 어두운 가운데 싸우면서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는 건 어려웠다.
‘도대체 그들은 누굴까?’
수백 명의 병사들을 독으로 죽여 버리는 그 악독함은 그가 어려서 아버지와 즐겨 읽던 만화책 속의 악당들보다 수십 배는 더 독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왜 쫓는 거지?’
죽은 병사들의 복수나 정의를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그건 저것 때문이었어.’
언덕에 오른 도현은 천천히 숙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화산 분화구처럼 쑥 들어간 분지 중앙에 파르테논신전처럼 웅장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건물이 보였다.
주변에 쌓인 흙과 돌들로 보아 매몰되어 있던 유적을 발굴하는 모습이었고, 늙은 병사가 언급한 지하 유적이 바로 저 건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분지를 미끄러지듯 내려간 도현은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활활 타오르는 화로의 불길이 밝히고 있는 유적의 입구로 다가갔다.
날개를 펼친 흉측한 괴물의 상이 양옆에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기에 낮에 그렇게 큰 전투가 벌어지고 수백의 사람들이 몰살을 당해야만 하는 거지? 단순히 금은보화 때문일까?’
도현의 발길을 이끈 건 지하 유적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그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수백의 병사들을 독살하고 지하 유적지를 지키던 사람들까지 잔인하게 죽인 것으로 보이는 늙은 병사와 거구의 사내 때문이다.
아까는 그냥 넘어갔지만, 안에 들어가서는 이들과 어떻게 부딪칠지 염려가 됐다.
호기심이 극에 달했지만 도현은 주먹을 크게 한번 쥐었다 펴며 천천히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집으로 가는 게 먼저야. 안전하게, 욕심부리지 말자.’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가 지하 유적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까스로 떨쳐 낸 순간, 오른쪽이 환해졌다.
“빛이다!”
지하 연구실에서 그를 삼킨 붉은 빛 무리가 소리 없이 등장한 것이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빛을 향해 급히 다가가다가 멈칫했다.
‘집으로 가는 통로가 맞을까? 혹시 더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된다면?’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빛이 서서히 약해지려 하자 석궁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붉은 빛으로 뛰어들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집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사라질지 모른다.
‘제발, 집으로 가기를.’
아버지의 상처
용주와 조일민은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도현이 사라진 연구실 빈 공간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촌.”
“왜.”
“도현이 차원 이동을 한 게 맞겠죠?”
“그렇게밖에 볼 수 없다.”
어딘지 뿌듯함이 밴 삼촌의 목소리에 용주가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기쁘세요?”
“기뻐하면 안 되냐?”
“너무하십니다, 삼촌!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도현이가 사라졌다고요!”
“돌아올 거야.”
“언제요? 벌써 두 시간이 넘게 지났잖아요. 금방 돌아온다면서요.”
용주는 도현이 허공에서 스르륵 사라진 장면이 눈에 선했다. 그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이었다.
처음에는 삼촌의 말도 안 되는 연구가 결실을 맺은 건 아닌지 흥분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몇 분이면 돌아올 거라며 자신만만했던 삼촌은 말수가 적어졌고, 팔짱을 낀 상태로 연구실 안을 빙빙 돌아다니며 그를 불안케 한 것이다.
“어쩔실 거예요. 도현이 찾아내시라고요!”
용주의 닦달에 퀭한 눈으로 도현이 사라진 빈 공간을 보고 있던 조일민이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들갑 떨지 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도현이는 아름다운 낙원과 같은 곳에서 즐거워할지 몰라. 돌아오면 내게 고마워할 수도 있어.”
“위험한 곳일 수도 있어요.”
“돌아오면 물어보자꾸나.”
“그러니까요. 물어보게 제발 도현이 좀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요, 삼촌!”
“사내놈이 왜 이렇게 마음이 좁아! 고작 몇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용주는 삼촌의 몸을 가리켰다.
“지금 떨고 계시잖아요. 춥지도 않은 여름에. 삼촌이 계속 불안해하시니까 제가 더 그러는 거잖아요.”
“몸살기가 있어서 그래.”
휙 돌아선 조 박사는 떨리는 몸을 간신히 제어하며 차원 이동 장치 앞에 섰다.
관처럼 생긴 차원 이동 기기는 전선이 몽땅 타고 겉 표면도 그슬린 고물로 전락한 상태다.
‘왜 안 오지? 몇 분 안에 돌아왔어야 하는데. 그리고 왜 기기 안이 아니라 밖에서 사라진 거지?’
성공한 실험이라면 기기 안에서 조카와 도현이 함께 차원 이동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현은 기기 밖으로 나온 상태에서 홀로 갑자기 증발하듯 몸이 사라져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차원 게이트의 영향 때문에 도현이 사라진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조 박사는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알고 싶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제발 돌아와라, 도현아!’
연구에 대한 결과도 궁금했고, 조카가 친형제처럼 여기는 도현이 이대로 차원의 미아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며 그는 몸부림을 쳤다.
“으아아아아!”
쉰 목소리로 괴성을 지르는 삼촌의 행동에 뒤에서 지켜보는 용주는 가슴이 철렁했다.
너무 삼촌을 몰아붙여서 스트레스가 폭발했나 싶었다.
“삼촌, 진정하세요. 제가 좀 마음이 급했어요. 기다려 볼게요.”
용주가 삼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할 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용주와 조 박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뒤를 돌아다봤다.
연구실 바닥에 등을 보이고 쓰러져 있는 사내가 보였다.
“뭐, 뭐야?”
사내는 투구와 가죽 갑옷 차림에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긴 부츠를 신고 있었고, 허리에는 검이, 옆구리 근처에는 석궁이 옆으로 뉘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에는 적지 않은 피가 묻어 있어서 한바탕 큰 전투를 치르고 온 사람처럼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용주는 조심스럽게 사내의 몸을 바로 눕혔다.
체형을 보자마자 도현이 아닐까 내심 기대를 하면서도 이런 복장으로 온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을 바로 눕히자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삼촌! 도현이에요!”
“그래, 돌아왔어. 도현이가 돌아왔구나, 하하하!”
기뻐하던 둘은 그러나 곧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현이 죽은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야! 도현아! 정신 차려 봐!”
피가 사방에 말라붙어 있는 투구를 벗긴 용주는 옆구리 사이에 고리가 연결된 가죽 갑옷까지 재빨리 벗겨 내며 소리를 쳤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됐기에 이런 걸 몸에 걸치고 있어. 피는 또 뭐고. 야! 도현아! 도현아!”
숨은 쉬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친구를 보며 용주는 삼촌을 노려봤다.
“이게 아름다운 낙원에 갔다 온 모양새입니까?”
“조용히 하고 얼른 업어! 병원 가게!”
“도현이 잘못되면 다 삼촌 책임이라고요.”
“그러게 왜 데리고 와! 너만 오지!”
“그게 할 소리예요? 아, 정말.”
“알았어. 내 책임이다. 그러니 그만하고 업어!”
“업고 있잖아요.”
조 박사는 힘없이 쓰러져 있는 도현을 조카의 등에 업히며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죽으면 안 되네.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내게 해 줄 말이 있잖아. 아니,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아무튼 죽지 말게. 난 자네가 참 마음에 든다고.”
조 박사는 바닥에 뒹구는 무기와 갑옷, 투구를 보고 도현이 차원 이동을 경험하고 왔다는 걸 확신했다.
그에게 들을 게 많았고, 한편으로는 정말 생명에 지장이 없었으면 했다.
“그러셨습니까?”
갑자기 도현이 용주의 등을 밀어내며 두 다리로 지하 연구실 바닥에 굳건히 섰다.
“어?”
용주와 조 박사는 도현이 정신을 차리자 깜짝 놀라며 멍하니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집으로 돌아온 게 너무 기뻐서 잠시 장난을 쳤습니다.”
“어, 그랬나? 아니야, 괜찮아. 아주 잘했어, 하하하!”
조 박사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전에 없이 친근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며 크게 웃었고, 용주는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식이, 사람 놀라게 하기는. 평소에 장난도 잘 치지 않는 놈이 왜 하필 지금. 놀랬잖아, 자식아! 확!”
“미안하다.”
도현은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무기와 방어구를 내려다봤다.
‘돌아왔어. 집으로.’
쏴아아아.
샤워 꼭지에서 나오는 물줄기에 몸을 맡긴 도현은 머리카락에 엉켜 붙은 피딱지를 비롯해 얼굴과 몸 곳곳에 묻어 있는 피를 깨끗이 제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그의 피가 아닌 타인의 피다.
욕실 타일이 붉게 물드는 걸 묵묵히 바라보던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20여 년을 검을 수련했지만 대련이 아닌 진짜 살과 뼈를 베는 실전을 경험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죽어 가는 사람의 눈동자를 그렇게 가깝게 보는 일 역시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가 그 현장에 없었더라도 그의 손에 죽은 여러 사람들은 같은 운명이었을까?
양심의 가책과 전쟁터와 같은 그곳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위안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어려서부터 검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을 대변하듯 굳은살이 철판처럼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검사가 검을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목검으로 타이어를 내려치며 어려서부터 그의 손아귀 힘을 강하게 길러 준 아버지 수련 방식 때문에 생긴 굳은살이었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저쪽 세계의 병사들은 검술이 단순했지만 무기를 다루는 근력은 넘쳐서 몇 차례 검을 나누고 나면 검을 잡은 손에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아마 대한민국의 검도 사부들이 넘어가서 그들과 검을 겨룬다면 필시 낭패에 처할 것이다. 그들의 검에 담긴 힘을 견딜 수 없으면 말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에서 검은, 냉정한 검일 수밖에 없어.”
도현은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을 꽉 움켜쥐다가 팔뚝 안쪽에 그려진 뭔가를 발견하고는 눈이 커졌다.
깨끗해야 할 피부 위에 그가 알지 못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뭐지?”
그는 비누칠을 하고 때수건을 이용해 문신을 지우기 위해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약물을 이용해 진짜 문신을 새겨 놓은 것처럼 피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언제 이런 게?”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문신은 원형 테두리 안에 기하학적인 여러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조였다.
손으로 왼쪽 팔뚝 안쪽에 새겨진 문신을 더듬어 보던 도현은 마른 웃음을 흘리며 샤워실 밖으로 나갔다.
문신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이미 생긴 걸 되돌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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