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디 임팩트 1권 7화
“얼떨결에 네가 차원 이동을 하고 와서 깊게 생각을 못 했는데, 생각해 봐 한번. 삼촌이 차원 이동기를 완벽히 컨트롤해서 조정할 수만 있다면 현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수가 있잖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대발견이고, 제2의 식민지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어.”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쪽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도현은 용주의 말이 피부에 와 닿았다.
‘새로운 세계. 정복과 식민지.’
검술 도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무도에 빠져 있던 그로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삼촌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빌 게이츠니 뭐니 하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걷어찰 수 있을 정도로 부자가 되겠지.”
“너 지금 아주 좋아한다.”
“당연하지!”
용주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너하고 내가 목숨을 걸고 처음 실험에 참여했던 사람들 아니냐. 삼촌이 설마 우리를 나 몰라라 하겠냐? 우리도 부자가 되는 거라고!”
“식민지 얘기를 꺼낸 건 그들을 걱정해서 하는 소리 아니었어?”
“내가? 아닌데.”
용주는 불끈 쥔 주먹을 풀며 도현을 내려다봤다.
도현은 당장 큰돈을 벌 수 있는 사람처럼 몸이 달아올라 있는 그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지켜보자. 내가 분명 의미 있고, 놀라운 경험을 하고 돌아왔지만, 아직 박사님이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아 보였어. 너도 알잖아.”
“옆에서 도와주는 조수가 있다면 그 연구가 훨씬 빨라지겠지?”
“너 설마?”
“난 삼촌이 너무 천재이다 보니 약간 이상한 쪽으로 너무 치우치셨다 생각했어. 네게도 불평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삼촌이 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차원 이동 장치를 거의 완성하셨잖아? 이런 위대한 분을 이런 시골에 홀로 방치하는 건 조카 된 입장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야. 오늘부터 난 여기서 살면서 삼촌을 도와 드리겠어.”
“진심이야?”
“어. 연구는 못 해도 그분 수발이야 내가 기똥차게 들 수 있지.”
씨익 웃으며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도현은 걱정이 되었다. 자유분방한 그와 조금은 폐쇄적인 조 박사가 한집에 살면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벌어질까 우려도 됐다.
하지만 조카가 삼촌 일을 도와주겠다는데 그가 뭐라 할 입장도 아니었다.
“네 삼촌이 허락하실지 모르겠다.”
“오히려 좋아 하실걸.”
조 박사는 용주의 생각과 달리 혼자 있고 싶어 했다.
“누가 옆에 있으면 신경 쓰여.”
“없는 듯 있겠습니다. 삼촌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개도 돌보고 다 말라비틀어져 가는 텃밭도 제가 손을 볼게요. 집안일도 제가 다하겠습니다. 삼촌은 그저 하시던 차원 이동 장치의 보완에만 집중하세요. 저를 믿으세요, 삼촌.”
넉살 좋게 웃으며 싫은 기색이 역력한 삼촌을 용주는 설득했고, 조 박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을 했다.
“네가 이러는 건 하루빨리 차원 이동기를 완성하기 바라는 마음에서겠지?”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삼촌의 예리한 눈빛에 용주는 살짝 긴장을 하며 옆에 서 있는 도현을 쳐다봤다.
“뭐, 그런 셈이죠. 전 순수한 마음에서…… 안 그러냐, 도현아?”
“그런가?”
도현이 빙그레 웃고만 있을 때 조 박사가 둘의 어깨에 한 손씩 올려놓으며 한껏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꼭! 이번에는 결점을 보완해서 완벽한 차원 이동 장치를 개발할 테니까. 그래서 지상낙원이 펼쳐져 있는 이계로 제일 먼저 너희들을 보내 주겠다. 그걸 원하는 거겠지?”
‘전 돈이 필요합니다, 삼촌!’
용주는 속마음을 감추며 겉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 그, 그렇죠 뭐. 그건 그때 가서…….”
“박사님, 이만 전 가 보겠습니다.”
조 박사가 호언장담은 하고 있었지만, 차원 이동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할지는 미지수였다.
검을 바라보는 도현의 시선은 어딘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똑같은 검인데, 굉장히 낯설다.’
의도치 않게 이계에서 실전을 경험하고 온 그는 검이 요물처럼 다가왔다.
피를 먹고 호흡을 하는.
쿵!
호검술의 기본자세를 취하며 특유의 빠르고 호쾌한 검술을 펼치던 도현은 검 끝에 허공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보인다! 검에 공기가 갈라지고 있어. 내 검이 길을 찾으려고 하고 있어!’
도현은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검의 길이 다시금 꿈틀되자 온몸에 희열감이 솟구쳤다.
상승 검도로 가는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게 스스로 검의 길을 터득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배운 검식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 의미 없이 휘두르더라도 그 안에 검술의 이치가 담기게 하는 것이다.
병원에 계신 아버지가 그렇게 닿고자 노력하던 상승 검도의 길을 도현은 이미 3년 전 얼핏 엿봤지만 그 이후로는 크게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시 검의 길이 조금씩 엿보이고 있었다.
쿵!
맨 발바닥으로 도장 안을 좁다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르는 도현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들었고, 태산처럼 무겁고 때로는 호쾌하던 호검술의 검세는 버드나무가지처럼 낭창낭창 해지며 부드러움까지 겸비해 가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서 만근거석의 힘으로 내리긋던 검도 보기에는 단순한 검세로 느껴질 무렵, 도현은 짤막한 탄성을 내며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아, 이 뒤로 뭐가 더 있을 텐데, 이것이 끝이 아닐 텐데.’
검의 길을 개척해 가던 그는 호검술 12식이 모두 끝나자 안타까움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아는 호검술 12식이 품고 있던 모든 걸 집약해 검의 길을 개척해 갔지만, 그는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호검술은 전반 12식에 후반 4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화통이 터지지만 후반 4식은 절전되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귓전에 쩌렁쩌렁 울리는 게, 아무래도 후반 4식을 찾아 익혀야 검의 길을 완성해 상승 검도의 길로 제대로 접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쉽지만 그래도 큰 진전이 있었어.”
도현은 나비 같은 발놀림으로 도장을 가로지르더니 목각 인형을 스쳐 지나며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그저 가볍게 한 일자로 휘두른 건 같았지만 목각 인형의 목과 손, 그리고 발목에 붙어 있던 작은 풍선들이 동시에 큰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일 검에 이제 네 군데를 동시에 공격할 수가 있게 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 검에 세 군데였는데, 한 군데를 더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촌각의 차이로 발생하는 놀라운 검의 세계는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무인의 세계였다.
“백 관장 있나?”
건물주의 등장에 도현은 진검을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칼집에 꽂고 돌아섰다.
도복을 입은 상태로, 검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온 도현은 도장 입구에 서 있는 건물주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건물주는 늘 뒷짐을 지고 다니는 6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땀범벅이군. 운동 중이었나?”
가평에서 오는 길에 건물주와 통화를 했던 도현은,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는 그의 말이 궁금했다.
“네, 들어오시죠.”
도현은 건물주 박 사장과 함께 좁은 관장실로 향했다.
“그래, 부친은 여전하신가?”
“좋아지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에 강골이던 자네 부친이 병원에 있다니, 참 세상일이라는 게 알 수가 없어.”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박 사장이 하늘이 원망스럽다는 듯 한탄을 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20여 년 전, 내가 대출을 해서 처음 지은 이 5층짜리 건물에 세입자가 안 바뀐 곳은, 이곳이 유일해. 그만큼 정도 가고, 관심이 생겨.”
박 사장의 말에 도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잘해 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박 사장은 커피를 한 모금 한 후 관장실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다시 말했다.
“어제는 도장 불도 꺼져 있고 문이 굳게 닫혀 있던데, 관원들이 이제 아예 한 명도 없는 건가?”
“그렇잖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당분간 문을 닫으려고요. 물론, 임대료는 지금처럼 드리겠습니다. 건물 관리비도요.”
“아니, 왜? 문을 닫았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왜 아까운 돈 낭비를 하려고?”
“완전히 문을 닫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퇴원하시면 그때 다시 열려고요.”
“기특하군, 기특해. 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심이 커.”
“별말씀을요.”
도현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건물주의 태도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렇게 자신을 살갑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계산이 철저하고 임대료도 칼같이 받아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참 난감하게 됐어.”
“무슨 말씀인지?”
“내년에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로 투자 이민을 가게 됐거든. 그래서 이 건물을 정리하려고.”
“아…… 투자 이민요.”
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건물이 봐서 알겠지만 20년이 넘다 보니 많이 낡았어. 아마 팔리게 되면 헐고 새로 짓게 될 거야. 길 건너 건물 봤지? 그런 식인 거지. 보기 좋은 고층 빌딩으로.”
“네에.”
“자네도 마음에 준비를 해. 당장은 아니지만 몇 개월 후면 주인이 바뀔 테고, 그럼 여지없이 이 건물은 헐리게 될 거야. 아버지를 이어 젊은 사람이 도장을 이끌어 가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나도 정이 들고 해서 일부러 이런 말까지 해 주는 거니까, 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 알겠지?”
도현은 아버지와 자신의 추억이 깊게 밴 도장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암에 걸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에서 어린 자신을 껴안으며 아버지와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셨던 오래 묵혀둔 기억들이 더해지자 가슴의 답답함은 극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죠.”
도현은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건물주가 돌아가고 홀로 된 도현은 관장실에 걸어 놓은 진검을 뽑아 들고 미친 듯이 도장 내부를 휘저었다. 터질 듯한 심정을 이대로 폭발시키지 못하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이얏!”
외마디 기합 소리와 함께 도장 구석에 있던 낡은 타이어가 칼에 두 조각이 되어 덜렁거렸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쉰 도현은 검을 손아귀에서 빙그르르 돌려 칼끝을 밑으로 내린 후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힘껏 내리꽂았다.
바닥에 꽂힌 검이 진한 살기를 내뿜으며 일자로 똑바로 섰다.
“어떡할래, 백도현. 검이나 수련하면 그게 다인 줄 알던 이 한심한 자식아, 이곳을 어떻게 할래!”
돈도 없고, 당면한 현실에 무능력해 보이기까지 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도현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생전하지 않았던 욕을 입에 담으며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검을 뽑아 다시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민은 무슨 이민이야? 우리나라처럼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도장 바닥에 땀을 흘리며 누워 있는 도현을 힐끗 본 용주는 건물주를 탓했다.
어제 건물주가 찾아왔던 전후 사정을 전화로 듣고 놀라서 쫓아온 것이다.
도현이 이곳을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는지 친한 친구인 그가 모를 리 없었고, 마음이 그도 착잡했다.
“에이 젠장! 조금만 더 있으면 삼촌이 떼돈을 벌게 해 줄 텐데. 내가 가서 건물 늦게 팔라고 할까? 얼마 전 뉴질랜드에 지진도 일어나서 분위기 흉흉하다고 말이야. 다시 생각하시라고.”
“건물주에게 뺨이라도 안 맞으면 다행이겠다.”
도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속상해서 밤새워 가며 수련했냐? 도장 안에 아주 땀 냄새가 진동하네.”
“잠이 와야지. 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 이곳은 지키고 싶었는데.”
가라앉은 친구의 음성에 용주는 조용히 옆에 앉으며 맞은편 벽에 걸린 백남식 관장의 사진을 올려다봤다.
고 1 때 이곳에 건들거리며 왔다고 호되게 혼난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중학교 때부터 그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반항아였다.
고 1 때 같은 반에 도현이가 오지 않았고, 백남식 관장의 훈육을 듣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꼬였을 것이다.
“백 관장님도 이해하실 거야.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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