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8화 (8/575)

[8] 디 임팩트 1권 8화

“이십삼억.”

“뭐?”

“인근 부동산에 알아본 이 건물의 가치야. 전세로 살고 있는 집과 얼마 안 되는 예금통장의 잔액을 다 더해도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지. 그런데 내가 이 건물 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미련이 가득한 그의 말에 용주는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었고, 침묵은 길어졌다.

“돈이라는 거 참 무섭다. 검 못지않게 다루기 힘든 것 같아.”

도현이 일어서자 용주도 따라 일어나며 대꾸를 했다.

“네가 이제야 왜 이 형님이 돈 벌려고 아등바등 사는지 이해를 했구나? 자식, 좀 컸네? 사우나나 가자. 가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삼촌의 연구를 도와서 하루빨리 차원 이동 장치가 완성될 수 있는지나 얘기해 보자고.”

“우리라니.”

도현이 관장실에 검을 걸어 놓으러 가며 물었다.

“건물 팔리게 생겼는데, 임대료 번다고 일자리 찾으러 다닐 거야? 아니잖아. 어차피 몇 달 후면 없어질 곳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서?”

“아예 건물을 사 버려야지, 팔리기 전에. 그러려면 삼촌이 완벽히 제어가 가능한 기계를 만드셔서 국가가 됐든, 다국적 기업이 됐든 세일즈에 들어가야지. 그 곁에 너도 있으면 삼촌에게 한몫 떼 달라고 하기 얼마나 수월하겠냐? 이참에 너도 나랑 같이 삼촌 집에 살자.”

용주는 말을 하며 도장 안을 양손을 펼쳐서 가리켰다.

“여기 이곳? 걱정하지 마. 그때는 네 건물이 될 테니까.”

“내가 본 너희 삼촌은 돈에 연연하지 않는 분 같았어. 기계가 완성돼도, 네가 상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

“좋은 연구 시설을 갖춰서 또 다른 초고대 문명 장치를 만들 수 있다면 그때도 그런 생각을 하실까?”

음모 가득한 그의 시선에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사님 곁에서 제발 방해나 되지 마라.”

“같이 가평으로 갈 거지?”

“너 있는 것도 싫어하시는 기색이셨어. 나까지 가면 뒷감당 못 해. 괜히 너까지 쫓겨난다.”

도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으며 도현이 말했다.

“그런가? 그럼 곤란한데…….”

용주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우나 갔다가 너는 가평으로 가. 나는 아버지 뵈러 가고.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충북에 있는 정신병원에 오후 늦게 도착한 도현은 서둘러 면회 신청을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면회가 불가능할 뻔했다.

그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노트에 그가 이계에서 경험했던 장면들을 몇 컷으로 나눠 그려 나갔다.

지난번 면회에서처럼 만화를 보자고 하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분지 안에 위치한 지하 유적지를 막 완성했을 때, 언제나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 뒤에는 건장한 남자 간호사가 함께했다.

도현은 남자 간호사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보냈고, 간호사는 조금 떨어져서 습관처럼 TV에 시선을 두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홍 사부 아닌가?”

“아버지…….”

“중국에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아버지가 홍 사부라고 칭한 인물은 도현도 잘 아는 사람이다. 상해에서 쿵푸 도장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검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2년 정도 상해에 머물며 중국 검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인연이 되어 친구로 사귄 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중국 말을 섞어서 하고 있었다.

도현도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대응하며 아버지가 좋아하는 홍 사부 역할을 대신했다.

“자네 딸과 내 아들 녀석을 엮어 줬으면 하는데, 이놈이 영 눈치가 없어서 큰일이야. 지난번에 한국에 왔을 때 홍영이가 많이 서운했었지?”

도현은 건강함과 미모를 갖춘 홍 사부의 딸 홍영을 떠올리며 일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 그럴 거야. 일부러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맞춰서 비행기 타고 오기까지 했는데, 이 목석같은 놈이 도장에서 검술만 수련하고 군에 복귀하고 말았으니 말이야. 말 안 해도 내가 그 심정 이해해. 내가 미안하네.”

“그건…….”

도현은 몇 년 전 군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일을 회상했다.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던 홍영이었다.

내심 그녀를 의식하고 있던 그도 검 따로 마음 따로였지만, 끝내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은 하지 못하고, 그렇게 헤어져 군으로 복귀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중학교 때였다. 상해로 아버지와 3박 4일간 여행을 다녀왔는데, 타는 듯한 붉은 옷을 입고 당차게 그와 검을 나누던 그녀였다.

당연하게도 그의 상대는 될 수 없었고, 그녀는 씩씩거리며 검을 버리고 권법으로 달려들었다.

그마저도 안 되자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던 홍 사부의 품으로 뛰어들었었다.

‘홍영.’

그녀를 생각하자 말로 표현 못 할 어떤 감정이 잔잔하게 가슴을 울렸다.

“걱정 말게. 내 아들 녀석도 사람 보는 눈이 있으니까. 아무렴 그런 좋은 아냇감을 마다할 리 있나?”

도현은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본심을 듣게 되자 쑥스러워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이 친구가 웃네? 하하하!”

아버지의 밝은 웃음소리에 도현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홍 사부 역할을 계속했다.

하지만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남자 간호사가 손목시계를 가리키자 면회 시간이 끝났음을 알고는 갈 준비를 했다.

‘만화 그린 건 다음에 보여 드리자.’

“다음에 또 올게요. 건강하세요.”

“벌써 가려고?”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아버지의 눈빛에 도현은 의자에서 떼던 엉덩이를 다시 붙였다.

“곧 다시 볼 수 있어요. 며칠 내로 다시 올게요.”

“가지 말게, 홍 사부.”

“아버지…….”

“나 요즘 힘드네. 밤마다 악몽을 꿔. 그 괴물 같은 자의 검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수십여 년간 쌓아 온 내 마음속 검이 그자로 인해 단칼에 부서져 버렸어.”

부드러웠던 도현의 눈매가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3년 전 아버지는 중국에서 홍 사부와 함께 있는 도중, 누군가의 피습을 받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원인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때 입은 부상 후유증이었다.

복면을 해서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다는 홍 사부와 아버지의 말씀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지만, 출중한 무예가인 홍 사부와 자신이 존경하는 최고의 검객인 아버지를 무력화시키고 머리에 검상을 남긴 자가 누군지 그는 끊임없이 궁금했고, 찾아내고 싶었다.

그가 지난 3년간 도장에서 두문불출하며 수련에만 정진한 이유는 칼로 바위를 자르겠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저 지경으로 만든 범인을 언젠가 찾아내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는 강한 복수심 때문이기도 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아버지를 괴롭히는 게 무엇이든지, 제가 걷어 낼게요. 믿으세요, 아버지.”

아들의 따뜻한 말에 백남식은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 주겠나?”

“네.”

“그래도 조심하게. 평생 보지 못한 고수였으니까. 그만 가 보게. 홍영이에게 안부 전해 주고.”

도현은 오늘따라 진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아버지에게 가슴 뭉클한 정을 느끼며 일어섰다.

“아, 잠깐만.”

백남식은 아들의 팔을 붙잡았다.

“가는 길에 내 아들 만나면 이 말 꼭 전해 주게. 검으로 바위를 자르는 미련한 짓은 그만두라고 말이야.”

도현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 사부님은 잘 계실까?”

서울로 올라가며 도현은 중국 상해에 사는 홍 사부에게 안부 전화를 하려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휴대폰을 도로 내려 놨다.

“잘 계시겠지.”

홍 사부와는 3년 전 그 일 이후 연락이 뜸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온 그때였다.

창백한 얼굴로 아버지 면회를 마친 홍 사부는 도현에게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며 거듭 사과를 했다.

그의 도장에서 벌어진 피습 사건이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싶어서 도현은 도리어 그를 많이 위로했었다.

홍 사부는 그 뒤로 몇 개월에 한 번씩 전화를 주다가 작년부터는 연락이 아예 끊겼다.

아버지 일로 부담이 돼서였을까?

통화할 때마다 힘들어하는 게 느껴져 도현은 그분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구태여 먼저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그분의 상처도, 아버지의 상처도 아물겠지 싶었다.

“누굴까…… 그날 아버지에게 검상을 남긴 자가.”

홍 사부와 원한을 가진 사람의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홍 사부는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고, 아버지 역시 피습한 복면인이 홍 사부를 두고 이러저러한 말은 일절 없었다고 했다.

그저 도장으로 들어와서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는 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입을 모아 그랬다고 하는지라 도현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현지 공안들도 범인은 잡지 못하고 흐지부지돼 버렸다.

하지만 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일반인들 수십여 명이 칼을 들고 덤벼들어도 아버지는 그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으면 넘겼지, 결코 머리에 검상을 입고 쓰러지실 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강하다. 그런 아버지가 괴물 같은 자의 검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복면인은 상상할 수 없는 고수가 분명했다.

“아버지를 쓰러트릴 만한 검의 고수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홍 사부랑 동시에 상대하면서.”

모르긴 몰라도 넓디넓은 중국 대륙에서도 흔치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돌봐야 할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중국을 떠돌며 범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만나면 똑같이 돌려주겠어. 아버지 인생을 망친 대가를.”

날이 더워지는 초여름,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조금 들어왔다. 전날 건물주의 얘기를 듣고 한숨도 못 잔 도현은 피곤함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라면 사흘을 안 자고 수련에 정진해도 멀쩡할 그의 육체와 정신이었지만, 도장이 없어진다는 중압감은 그의 몸도 마음도 일반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상태에서 검을 들고 싸우면 백전백패겠지.”

불 꺼진 방 안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더 성장해야 돼.’

주위 환경과 감정에 따라 몸의 상태와 정신이 요동치는 건, 진정한 고수가 아니었다.

도장의 일과 그의 몸가짐은 별개의 문제였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오늘 만나고 온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는 몸을 옆으로 뉘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팔을 은은하게 비췄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팔에 시선이 간 그는 팔뚝에 생긴 타투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불을 켜고 타투를 살폈다.

왜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타투의 색깔이 바뀌었어!”

검은색이었던 타투가 지금은 은은한 황금색으로 변화된 상태였다.

원형의 테두리와 안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선들은 동일했고 크기 역시 같았지만, 타투를 이루는 기본 색감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게 대체.”

타투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용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주야, 어디냐?”

-가평이지. 삼촌 드릴 커피 타고 있었어. 왜?

“이상한 일이 좀 생겨서.”

-무슨 일?

“팔에 생긴 타투 색이 변했어.”

-뭐?

비통

이른 아침 안개를 뚫고 가평에 도착한 도현은 개밥을 주는 용주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는 일 없이 잠만 자는 녀석이 먹는 건 어지간히 밝혀. 새벽부터 밥 달라고 얼마나 짖어 대는지. 천천히 먹어, 이 똥개야.”

입에 담배를 물고 쭈그려 앉아서 개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용주가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미안하다. 새벽부터 오라고 해서.”

타투의 색깔이 변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조 박사가 찾은 것이다.

“아니야. 박사님은?”

“잠깐 주무시고 계셔. 너 오면 깨우래.”

용주는 말을 하며 도현의 팔에 시선을 두었다.

“좀 보자.”

남방을 입고 있던 도현이 팔소매를 걷어 올리자 금으로 그린 듯한 타투가 드러났다.

“신기하네. 분명 검은색이었는데. 어디 아픈 데는 없냐?”

“괜찮아.”

타투가 어젯밤보다 더 진한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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