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2화 (12/575)

[12] 디 임팩트 1권 12화

“우리 엄마, 지금 곗돈 갖고 튄 계주 잡아야 한다고 어제도 내게 전화하셔서 난리 치셨다, 삼촌 집에서 뭐 하냐고. 너와 할 일이 있어서 시간 없다고 하니까, 아무 말씀 안 하시더라. 오히려 너 좀 옆에서 잘 챙겨 주라고 하시더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용주는 운전을 하는 도현의 옆모습을 보며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백 관장님. 네게는 아버지지만, 우리 어머니에게는 삐틀어질 대로 삐틀어져서 나락으로 갈려는 자식 놈 정신 차리게 해 주신 고마운 은인이셔. 그리고 내게는 몽둥이도 서슴없이 휘두르시던 친구의 아버지셨고. 함께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내자.”

진심이 담긴 용주의 태도에 도현은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홍 사부와 아버지가 허무하게 돌아가셨어.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아 자식, 보험 약관 설명하냐? 그만하고 저기 휴게소에나 들러. 오줌 마렵다.”

도현은 용주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그까지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두 번 말 안 한다. 기회 줄 때 내 차에서 내려.”

“셧 업!”

용주는 아예 짐을 가지고 도현의 집으로 왔다.

삼촌이 차원 이동 장치를 완성했을 때 옆에서 덕 좀 보려고 했던 그의 계획은 무산이 됐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친구였다.

둘은 한밤중에 이계 얘기를 화제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참 신기하지 않냐? 우리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게. 그러고 보면 지옥도 천국도 있는 거 아닌가 몰라. 난 지옥 가기 싫은데. 젠장.”

“있겠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네 아버님까지. 모두 천국에 계실 거야.”

“그분들 뵈려면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큰일이다. 난 암만 해도 그렇게 착하게 살 팔자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너라도 착하게 살아라. 내 대신 천국 가게.”

“천국 가기 포기했어.”

도현의 단호한 어조에 용주가 흠칫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모조리 책임을 물을 거니까.”

거대한 바위는 쉽게 움직이지 않지만 한번 구르면 앞을 가로막는 건 사정없이 부숴 버린다.

용주는 도현이 그 바위처럼 느껴져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현장에 있던 환자들은 아무도 그날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어요. 슬쩍 지나가며 일부러 물어봤는데도 그래요.”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최성국은 덤덤한 시선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현과 용주를 보며 말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원하던 건 이런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내심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닙니다, 간호사님.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잃은 그쪽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후우.”

편치 않은 기색으로 커피를 마시고 일어난 최성국은 도현과 용주의 인사를 받으며 커피숍을 나갔다.

“이제 어쩌지?”

용주의 물음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중국으로 가서 홍영을 만나야겠어.”

같은 수법으로 돌아가신 홍 사부와 아버지를 볼 때 두 분은 공통된 사건에 같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 일이라면 먼저 드는 생각은 3년 전, 복면인의 피습 사건이었다.

“같이 가자.”

“단서를 발견하면 그때 연락할게. 한국에 있어.”

“이참에 나도 중국 구경이나 한번 해 보자.”

용주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서울 올라갈 때 운전은 내가 할게.”

“잠시만.”

도현은 커피숍을 나갔던 최성국이 다시 돌아와 이쪽으로 걸어오자 용주를 자리에 앉혔다.

“그냥 이대로 갈까 했는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요.”

최성국은 짧게 자른 머리를 한번 매만진 다음에 말을 이었다.

“사실 그쪽 아버지에 대해 얘기한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해요.”

도현은 긴장된 얼굴로 최성국의 입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게 하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라서요. 괜히 말했다가 그쪽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기도 하고.”

“괜찮습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해 주십시오.”

“현장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환자는 아니고요, 5층 독방에 있던 환자가 고인의 죽음을 목격했답니다. 장 씨라고 몇 주 전에 병원에 화재가 났을 때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분이 뭐라고 했습니까?”

용주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5층 쇠창살로 가려진 창가에 머리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요, 산책로 펜스를 어떤 노인이 훌쩍 뛰어넘어 오더니 갑자기 사라졌답니다. 그래서 어디 갔나 찾고 있었는데, 사라졌던 노인이 백남식 씨 앞에서 번쩍하고 나타나더니 또 번쩍하고 없어졌대요. 허깨비처럼요. 그리고 나서 백남식 씨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답니다. 장 씨는 놀라서 처음 노인이 넘어왔던 펜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사라졌던 노인이 때마침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서는 그 펜스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유유히 사라졌답니다.”

말을 하던 최성국은 도현과 용주의 표정이 너무 굳어 있자 헛기침을 했다.

“말도 안 되죠? 펜스 높이만 해도 정확히 3미터 95센티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겠어요. 과대망상증에 매일 접신을 해서 신과 통한다는 장 씨가 아무래도 저를 가지고 논 것 같아요.”

괜한 얘기를 했다는 뒤늦은 후회에 최 간호사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분 눈이 좋습니까?”

“네? 장 씨요?”

“예. 5층 높이에서 산책로 쪽을 봤으면 제법 거리가 있었을 텐데요.”

도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장 주변을 떠올리며 물었다.

“시력이 말도 못하게 좋아요. 밥 먹는 게 다 눈으로 갔는지, 좌우 2.0은 될 것 같아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런데 그건 왜?”

“최 간호사님, 그분과 제가 만나 볼 수는 없겠죠?”

“제 능력 밖입니다. 그리고 장 씨 그 사람은 우리 병원 내에서도 너무 유명해서 누굴 위장해서 면회 신청할 수도 없어요. 설마 장 씨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냥 집으로 가기 찝찝해서 다시 돌아와 해 준 얘기였지만 말을 듣던 그 순간도 그리고 말을 하는 지금도 최성국은 장 씨의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도현이 관심을 갖자 덜컥 마음에 부담이 됐다.

“믿지 마세요. 그거 순 지어낸 얘기라니까요.”

“최 간호사님,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노인의 인상착의 좀 환자에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틀 뒤 다시 만난 최성국이 건넨 스케치북에는 유치원 어린아이가 그린것보다도 못한 형편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다소 실망하는 도현을 보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세요. 그 사람 말 믿을 게 못 된다니까요. 막상 그려 보라고 하니까 이런 그림을 그리잖아요.”

동그라미 안에 눈 코 입이라고 그려 넣은 것은 그게 눈이고 코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느껴질 만한 수준이어서 도무지 그림만으로는 노인의 이미지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에다 부탁하지도 않은 팔다리까지 제멋대로 그려 놔서 더 이상했다.

‘우연에 일치였나?’

도현은 4미터가량 되는 펜스를 뛰어넘고,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빠른 움직임을 갖춘 노인이 혹시 그가 찾던 범인이 아닌가 의심을 해 왔다.

내가 고수는 평범한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수준이어서 보통의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오히려 장 씨의 말이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진짜 범인이 노인이었는지, 아니면 상상 속 창조물인지.

“도현아, 이거 손가락이 여섯 갠데?”

옆에서 같이 그림을 내려다보던 용주가 해골 뼈처럼 그려 놓은 손을 보며 말했다.

“뭐?”

“여기 이 손. 자세히 봐 봐. 손가락이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야.”

얼굴에만 집중하고 있던 도현이 그제야 손을 신경 써서 봤다.

그러고 보니 친구의 말처럼 손가락이 여섯 개였다.

‘왼손은 손가락이 여섯 개. 오른손은 멀쩡해. 그렇다면 의도를 했다는 건데.’

도현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 간호사를 쳐다봤다.

“혹시 여기 이 손은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겠는데,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린 거 아니에요?”

대답을 하던 그는 도현의 진지한 눈빛에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이왕 도운 거 내가 확실히 도울게요. 내일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장 씨에게 물어봐서 전화드리죠. 됐죠?”

“도와주신 거 잊지 않겠습니다.”

도현은 씨름 선수처럼 체구가 큰 최성국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켰다.

받았으니, 언젠가 몇 배로 더해서 돌려줘야 했다.

장 씨는 일부러 손가락 여섯 개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매의 눈처럼 어려서부터 눈이 너무 좋았다는 그는 자신이 아니면 귀신처럼 움직이는 노인을 볼 수도 없고, 그 짧은 사이에 왼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이제 장 씨의 말을 신뢰하느냐 마냐는 전적으로 도현에게 달려 있었다.

“왼쪽 손가락이 여섯 개인 노인만 찾아다니면 되려나?”

도장에서 장 씨가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용주의 말에 그림을 말아 쥐며 대답했다.

“애초에 환자들의 말을 믿기로 하고 접근했던 거야. 장 씨가 어떤 환자였건, 믿고 가자.”

“한국인일까? 아니면 중국인?”

“3년 전 사건은 중국에서 벌어졌어. 3년 후, 홍 사부가 죽고. 그리고 얼마 뒤, 한국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도장 벽을 노려보며 말을 맺었다.

“시작은 중국이고 끝은 한국이지. 그럼 다시 시작해야지. 중국에서부터.”

홍영은 아버지의 죽음을 힘겹게 이겨 내고 다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한국 대형 유통 업체의 상해 지사로,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한국어도 유창했던 그녀는 통역과 상해 지사장의 비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나름 엘리트 인재였다.

미모도 뛰어나서 상해 지사로 파견 나와 있던 한국 본사 출신의 젊은 사내들치고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는 사내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감히 회사 사장 아들인 상해 지사장이 버티고 있는 벽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저녁에 약속 있어요?”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젊은 지사장의 물음에 서류를 내밀던 홍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때문이신지.”

“조용히 묻고 싶은 일들이 있어서요. 괜찮다면 퇴근 후 저녁 어때요?”

그녀가 한동안 대답이 없자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던 그는 힐끗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요? 선약이 있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지사장님.”

“흠, 그래요.”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에 기댄 그는 가만히 책상 앞에 서 있는 홍영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간단히 여기서 지금 얘기 나누도록 하죠. 나, 다음 달이면 한국 본사로 발령이 날 겁니다.”

“네?”

처음 듣는 소식에 홍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성격이 모나서 마음에 안 맞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게 쉽지 않아요. 곁에서 지금처럼 날 보필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국에 나랑 같이 갑시다.”

“제가요?”

“이미 한국 본사에는 내가 추천을 해 놨어요. 업무 능력도 그 정도면 우수하고, 연봉을 비롯해 직급도 오르고 모든 게 나아질 겁니다.”

반듯한 외모의 그가 살짝 미소를 보이며 책상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홍영 씨, 나 지금 어렵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상해가 죽고 싶도록 좋으면 모를까, 아니면 나랑 같이 한국에 갑시다.”

홍영은 기분이 묘했다.

그의 제안이 공적인 느낌보다는 사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 났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어렴풋이 들렸던 상해 지사장과 자신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들도 그때서야 갑자기 심각하게 여겨졌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에요. 일주일 정도 생각해 봐요.”

그녀의 말을 중도에 막으며 지사장은 서류에 시선을 뒀다. 하지만 홍영은 분명히 해 두고 싶었다.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떠나면 어머니가 혼자 계셔야 해요.”

“압니다. 홍영 씨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계시는 거. 그래도 언제까지 어머니와 살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당신의 미래도 있잖아요. 어머니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