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14화 (14/575)

[14] 디 임팩트 1권 14화

상해에서 활동하는 브로커들을 통해 수사 자료를 얻으려 했던 도현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버지 서재를 다시 정리해 볼게요. 혹시 뭔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고마워요, 홍영 씨.”

“내일 연락할게요. 그리고 백 관장님 일. 정말 마음이 아파요.”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무거운 얼굴로 뒤돌아섰다.

아버지가 3년 전 도장 피습 사건의 중심인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불같이 일어났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었을까?’

그는 그날 밤 밤늦도록 아버지 생각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겨우 잠이 들 무렵에서야 왜 아버지가 3년 전 홍 사부를 만나려고 상해로 오게 됐는지를 새삼 주목하게 됐다.

-도현아, 홍문기 그 친구가 또 오래된 무예서를 하나 구해 왔나 보다. 나보고 같이 연구해 보재.

홍 사부와 전화를 끊고 껄껄대며 웃으며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희미한 모습으로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홍 사부가 습득한 무예서를 보러 간다며 길을 나섰던 것이다.

홍 사부에게만 초점을 맞췄던 그는 아버지를 움직이게 한 근본 원인이 되는 그 무예서의 존재는 그동안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있었다.

“확인해 봐야겠어.”

검선문

“어떤 책을 말하는지 알겠어요. 고서점에서 그 책을 살 때 아버지 옆에 있었으니까요.”

도현이 간밤에 의문을 품어 왔던 무예서를 언급하자 홍영은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을 했다.

“무슨 책이에요, 그 책은?”

“고서점 주인의 말에 따르면 명 초에 주원장이 자신을 후원했던 무인들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 했다고 해요. 중국 대륙에 있던 많은 무술 문파들이 사라지고 청대에 이르러서는 영웅호걸들이 산과 호수를 날아다니는 건 소설 속 이야기가 됐고요. 그런 긴말을 한 뒤에 아버지에게 한 권의 고서를 내밀었어요. 도현 씨가 궁금해하던 그 책이죠. 검선문. 낡고 오래된 그 책 겉표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고서점 주인은 명 초에 멸문한 검선문의 비급이 바로 그 책이라며 아버지를 유혹했죠.”

그녀의 말에는 웃음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내용도 봤어요?”

“그럼요. 내공 심법이라는 것도 있고 검술도 기록되어 있고. 내가 보기에는 엉터리던데, 아버지는 달리 보이셨나 봐요. 비싼 값을 주고 사셨죠. 덕분에 그날 밤 어머니께 무척 시달림을 받으셨지만요.”

그런 책은 많았다. 당장 서울에 있는 도현의 집에도 아버지가 젊었을 적 구해 온 비급 아닌 비급이 여러 권이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제대로 된 무예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책은 왜요?”

“아버지가 상해에 오신 이유가 그 검선문 비급을 보기 위해서인 걸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기억나요. 아버지가 그 책을 보며 백 관장님을 부르셔야겠다고 한 말씀이요.”

“궁금하네요. 두 분을 만나게 했던 그 책이, 지금 집에 있어요?”

가볍게 물으며 차를 입에 대던 도현은 홍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멈칫했다.

“없어요?”

“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요. 한번 산 책을 다시 되팔 분도 아닌데.”

그녀는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서재의 책들도 일일이 확인을 했었다.

비교적 기억력이 좋은 그녀는 3년 전 비싼 값에 고서를 샀다고 어머니께 구박을 받으며 머쓱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책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서점 주인의 화려한 언변에 또 아까운 돈을 쓴다며 아버지 옆에서 불평을 토해 냈던 그녀였기 때문에 검선문 비급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디 빌려 주신 건 아니고요?”

“전혀요. 아버지는 책을 빌려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백 관장님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요…… 이상하네요.”

도현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아버지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라셨는지 밤새워서 적어 왔어요. 왕래하던 지인분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도요. 그리고 아버지는 원한이 없다고 하지만, 근처 작은 폭력 조직원들을 혼내 줬던 일들 하며, 제가 아는 선에서 다 적었어요.”

한마디로 홍영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다.

“왜 이런 걸.”

“밝히고 싶다고 했잖아요. 조사하세요. 미련이 남지 않도록.”

눈물을 흘릴 때면 한없이 연약해 보였지만, 반듯한 자세로 도현을 향해 낭랑히 말할 때는 여걸이 따로 없었다.

“대신 길게 끌지 말아요.”

도현은 노트에 꾹꾹 눌러쓴 그녀의 글씨들을 묵묵히 내려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녀의 마음이 담긴 노트를 가방에 넣은 도현은 검선문 비급으로 화제를 다시 돌렸다.

“홍영 씨, 아무래도 난 사라졌다는 그 비급이 자꾸 마음에 걸리네요. 3년 전 그 사건 이후에 본 적이 있어요?”

“못 본 것 같아요. 설마, 그 사건이 책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버지가 상해에 오신 이유가 그 책 때문이라면 그날 밤, 도장 안에서 두 분이 뭘 하고 계셨겠어요. 그 검선문 비급을 연구하고 계시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 책이 지금 존재하지 않아요. 한국에 계시던 아버지를 찾으실 정도로 홍 사부님에게 가치가 있어 보이던 그 비급은 어디로 갔을까요?”

“도현 씨, 그런 가짜 비급은 고서점에 수두룩해요. 알잖아요.”

“홍영 씨, 지금 중요한 건 당신과 내 생각이 아니라 홍 사부님 입장에서 바라본 그 비급이에요. 그분이 책을 되팔거나 남에게 빌려 주실 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그 비급은 어디 있느냐는 거죠.”

“헤헤, 먼 길 잘 다녀오셨습니까, 사부님.”

순박한 웃음을 보이는 제자의 모습에 노인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소매가 넓은 도포 차림에 머리에는 낡은 관을 쓴 장신의 제자는 도관 앞 나무 그늘에서 늘어지게 자다가 사부가 나타나자 번개처럼 일어난 것이다.

“못난 녀석. 입에 침이나 닦아.”

“예?”

귀밑머리에 흰머리가 수북이 나기 시작한 중년의 제자는 얼른 소매로 침을 닦으며 도관 안으로 들어간 사부를 쫓아갔다.

깊은 산중의 도관은 밑으로는 계곡 물이 흐르고 있었고, 뒤로는 거대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도관 안 태상노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뒤편에 있는 절벽 속 동굴에 마련된 처소에서 옷을 갈아입은 노인은 한여름에도 으스스한 한기를 내뻗는 황옥에 좌정한 채 지그시 눈을 내려 감았다.

“후우, 흡.”

노인이 호흡을 할 때마다 황옥에서 뿜어 나오는 한기들이 파도처럼 밀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고,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중년의 제자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사부가 일단 운공에 들어가면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됐다.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차를 타서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운공을 마친 사부가 벼락같은 시선으로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부님, 제가 사부님 좋아하는 차를 타 왔습니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제자가 말했다.

“가지고 오너라.”

“네, 사부님.”

다탁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제자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가신 일은…….”

“알 것 없다.”

“사제들이 하는 일을 묻는 게 아닙니다.”

“하면?”

“그 일 말입니다, 사부님.”

“네놈 때문에 오래간만에 살생을 하게 됐다.”

“사부님, 기어이 손을 쓰셨습니까?”

벌떡 일어나며 성난 표정을 짓는 제자의 모습에 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실성을 한 게냐?”

“왜 죽이셨습니까! 제가 적당히 손을 봤다고 했잖습니까!”

헤픈 미소를 보이며 순박해 보이기만 했던 제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추상같은 기상을 보이는 당당한 사내가 서 있었다.

노인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나를 훈계하는 것이냐?”

“그들과 약속을 했습니다. 목숨을 살려 주기로요. 사부님의 제자, 이청선이 약조를 했단 말입니다.”

“그럼 너는 나와 맺은 약조를 왜 어겼느냐?”

“사부님, 그건…….”

청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올 동안 절대 도관을 비우지 말라 했거늘!”

노인이 호통을 치자 동굴이 진동을 했다.

“술이 좋아서 도관을 비웠더냐!”

노인이 손을 휘두르자 청선의 몸이 뒤로 튕겨져 동굴 벽에 크게 부딪혔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검선문을 이을 자가 기사멸조의 죄를 지어?”

스르릉.

노인이 옆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자, 서늘한 검 기운이 동굴 안에 가득 찼다.

머리카락들이 하늘로 치솟고 흰 수염이 뻣뻣해진 게 노인의 화가 극에 이른 것 같았다.

“네놈을 당장!”

“사부님!”

기개 있게 맞서던 청선이 돌연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바짝 엎드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이놈이!”

기개 있게 맞서던 제자가 다시 비루한 당나귀처럼 행세하자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일어나지 못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고개를 쳐들며 슬쩍 위를 올려다보는 제자의 모습에 노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눈을 지그시 노려봤다.

“왜 이러는 거냐. 가만히 있으면 내 뒤를 이어 지고 무상한 경지에 이를 것인데,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 몇을 죽였다 하여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내가 정녕 너를 죽이고 자질도 미천한 것들 중 한 명을 다시 뽑아 네 자리를 대신하게 해야 하겠느냐? 청선아, 말을 해 봐라.”

제자의 목덜미에 칼을 대며 노인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아닙니다, 사부님.”

“자중하고 자중해라. 검선문의 비급이 세상에 유출됐다. 네가 비록 사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급히 회수했다고 하나, 내 지시를 어기고 도관을 비워서 도둑이 들게 하고 분란을 일으킨 죄, 매우 크다 하겠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리고 우리는 도인이 아니다. 네가 관을 쓰고 도포를 걸쳤다 하여 진짜 도인인 줄 아느냐? 검을 배운 자는 냉정해야 하는 법. 다음부터는 손에 인정을 두지 마라. 그런 면에서 청선 너는 세상에 자리 잡은 네 사제들에게 배울 점이 있어.”

철컥.

검을 회수한 노인이 뒤로 물러나자 청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 앞에 섰다.

“사부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그들만 죽이셨습니까? 아니면…….”

“네가 살려 준 두 놈만 죽였다. 더는 묻지 마라.”

손을 휘젓자 청선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 동굴을 나갔다. 밖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상해 다윤로는 문화 거리로, 골동품과 고서를 다루는 가게들도 적지 않게 위치 한 곳이다.

도현과 홍영은 은은한 등이 켜진 좁을 골목길을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

“저녁을 먹고 올 걸 그랬어요.”

미안했는지 도현이 옆에 서 길을 안내하던 홍영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고서점 주인이라면 그 비급의 출처가 어딘지 알고 있을 거예요.”

비급을 자꾸 의심하는 도현을 위해 그녀는 다윤로로 바로 달려왔다.

장삿속에 밝은 고서점 주인이지만 사정을 얘기하고 부탁을 해 볼 생각이었다.

“잠깐만요!”

막 문을 닫으려는 고서점 직원을 향해 길을 건너며 그녀가 소리쳤다.

“영업 끝났는데요.”

미간을 찌푸리던 직원의 뒤통수를 고서점 주인이 차지게 때렸다.

“끝나긴. 어서 오세요. 어떤 책을 찾으십니까?”

안경 쓴 중년인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좀 뵙고 싶어요.”

“사장요? 제가 사장인데요. 무슨 일로?”

“그럴 리가요. 이 가게는 황 사장님이 운영하는 걸로 아는 데요.”

“아, 오랜만에 오셨군요, 황 어르신을 찾는 거 보니. 그분 가게 넘기고 그만둔 지 오래됐습니다. 벌써 2년 가까이 됐죠.”

황 사장은 70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홍영이 기억하는 그는 혈색이 좋고 정정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죄송한지만 그분을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흠, 뭣 때문에 그래요?”

손님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가게 주인은 뒤에 서 있는 점원에게 문 닫으라는 손짓을 하며 물었다.

“그분께 꼭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부탁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