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디 임팩트 1권 17화
“아, 시원하다!”
옥룡산에 입산한 지 이틀째, 맑은 물웅덩이 속에 몸을 던진 도현과 용주는 한여름 더위 속에 산을 헤매며 흘렸던 땀과 얼굴에 묻은 먼지들을 씻어 냈다.
“까닥했으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네.”
무성한 수풀에 가려진 작은 연못 크기의 이곳은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 물이 아니라 밑에서 솟아오르는 지하수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유심히 살피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할 장소였다.
산을 넘고 조사하느라 피곤했던 몸이 목욕을 하고 나오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놈의 등선궁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벗어 놓은 옷을 입으며 용주가 투덜거릴 때,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길쭉길쭉하게 자란 높은 나무들 틈 사이로 언뜻 사람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용주야, 누군가 오고 있어.”
“어? 정말?”
느긋하게 옷을 입던 용주는 서둘러 옷을 마저 입었고, 그 사이에 도현의 눈앞에 옷자락을 펄럭이는 소리를 내며 중년인이 착지했다.
놀랍게도 도포를 입은 도인 차림의 중년 사내는 땅을 밟지 않고 나무 기둥을 지그재그로 밟으며 날아왔다.
“어어!”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신법을 발휘해 달려왔던 청선은 수풀 속에 가만히 서 있는 도현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발재간이 좀 좋아. 너무 놀라지 말게. 사람이니까.”
“이 산에 계시는 도인이십니까?”
도현은 슬그머니 검이 든 원형의 통을 왼쪽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도인이라고 해 두지. 그런데 자네 별로 안 놀라는군.”
청선은 자신이 신법을 펼치는 모습을 목격했음에도 감정의 동요가 적어 보이는 도현이 의외였는지, 바로 자리를 뜨려던 생각을 접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네들 누군가?”
“등산객입니다.”
도현은 간단히 대답하며 청선의 움직임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였다.
조금 전 나무를 걷어차며 날아오다시피 했던 중년인은 결코 일반인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등선궁과 관련된 고수일지도 모른다.
“흠, 등산객이라.”
청선이 턱을 매만지며 도현과 용주의 옷차림을 살폈다.
“실례하지만 도인께서는 어디에 머무십니까?”
“나 말인가?”
“그렇습니다.”
“궁금하면 술이라도 내놓게.”
“예?”
“난 한 번도 공으로 이야기해 준 적이 없어.”
의외의 답변에 도현의 시선이 흔들렸다.
“술이 없나? 그렇다면 내 대답도 들을 수 없을 걸세. 그럼 산 구경 잘하고 내려가게나.”
약 올리듯 말하며 청선이 그들을 지나쳐 위로 올라가려 하자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급히 외쳤다.
“술을 드리죠!”
“진작 그럴 것이지.”
도현은 중국 말을 몰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는 용주에게 가만히 지켜보라는 눈짓을 보낸 뒤, 용주의 배낭에서 소주 팩 하나를 꺼냈다.
용주가 배낭을 꾸릴 때 서너 개 챙긴 것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미 물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청선에게 다가갔다.
“호오, 이건 또 무슨 술인가?”
손바닥만 한 소주 팩 한쪽을 입으로 야무지게 뜯어 한 번에 다 마셔 버린 청선은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물었다.
“소주입니다.”
“소주?”
“어디 보자. 그래, 그렇게 쓰여 있군. 한국 술이었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빈 팩을 내려다보던 청선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머무시는 도인이십니까?”
“아, 그래. 술을 마셨으니 대답을 해 줘야겠지. 나, 등선궁의 도인 이청선일세, 하하하!”
“여기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등선궁일세!”
얼큰히 술이 오른 청선은 절벽에 붙어 있는 등선궁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손짓을 했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문 앞의 낙엽과 먼지를 쓸었지. 어때, 깨끗하지?”
도관의 현판에 웅혼한 필체로 쓰인 등선궁의 이름을 확인한 도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혼자 계시는 겁니까?”
“내가 모시는 진인께서는 잠시 출타 중이시니, 혼자인 셈이지. 자 자, 들어가지. 혼자 있기 적적했는데, 잘됐어. 내가 자네들에게 도교의 가르침을 베풀지.”
도현이 준 여러 개의 소주 팩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청선이 양팔을 펼치자 낡은 도포 자락이 힘 있게 펄럭였다.
“감사합니다. 곧 들어가겠습니다.”
청선이 도관 건물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주의를 둘러보던 용주가 소리 죽여 말했다.
“도현아, 내가 준비한 소주 팩의 위력을 봤냐? 이게 술의 힘이다.”
긴장을 풀려는 듯 용주가 농담을 했다.
“잘했어.”
“근데 좀 이상하지 않냐? 내가 상상하던 등선궁의 모습이 아니야. 저 사람도 허접스러워 보이고.”
술에 취해 들어간 청선을 떠올리며 용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을 차고 다니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운 인간들이 무예 수련을 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외지인인 우리를 이렇게 막 데려오다니. 여기 맞나?”
“용주 너는 옷을 입느라 잘 못 봤겠지만 이청선이라는 저 도인, 보통 사람이 아니야. 나무 기둥을 툭툭 차면서 산 밑에서 날아왔어. 고수야.”
“그럼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것 같은데. 어쩌지? 우리 정체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 것 같고.”
도현은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이 든 통을 바닥에 내려놨다.
여기서 검을 뽑아 이청선을 제압해서 원하는 답을 얻거나, 그게 아니면 저 도인과 어울리며 좀 더 이곳의 허실을 염탐해야만 한다.
‘그래도 결국엔 싸움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아버지를 죽인 내가 고수 노인과 이곳이 관련이 없다고 해도, 아버지의 머리에 검상을 남긴 대가는 받아 내야 하니까.’
“뭣들 하는 겐가?”
도관의 본건물 대문을 활짝 연 청선이 소리쳤다.
“용주야, 들어가자.”
고민을 끝낸 도현은 바닥에 내려놨던 검이 든 통을 다시 어깨에 메고 돌아섰다.
청선의 안내로 도관 내부로 들어온 도현과 용주는 도교 신을 모셔 둔 제단 앞에서 청선의 지시에 맞춰 예를 갖췄다.
높이 4m 정도 되는 도교의 최고 삼신 원시천존, 태상도군, 태상노군의 목상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옆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청선과 함께 이동을 했다.
“제단 뒤편에 동굴 같은 게 있던데 신기합니다.”
“눈썰미가 좋군. 어두워서 잘 안 보였을 텐데.”
청선은 접객실로 쓰이는 작은 방문을 열었다. 나무 의자 몇 개가 둥근 탁자 주위에 놓여 있었고, 도교와 관련된 몇 가지 그림이 장식용으로 걸려 있었다.
“도관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던 절벽 속 동굴이네. 자, 앉게.”
청선은 도현과 용주가 의자에 앉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차를 가져오겠다며 문밖으로 나갔다.
“어째 으스스한데?”
용주는 배낭을 발밑에 내려놓으며 창호지가 발린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기울어 가는 해가 열린 창문 사이로 붉은 빛을 투사하고 있었다.
“도현아, 여기 저 사람 혼자라고 했지?”
“그의 말은 그랬어. 윗사람으로 모시는 사람이 있는데, 출타 중이라고.”
도관 안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윗사람이라면…… 저 사람보다 더 고수 필이 나는데. 적당히 상황 봐서 얼른 이곳의 정체를 확인해 보자. 상대할 사람 늘기 전에.”
적절한 상황 판단이었고, 도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뒤, 청선이 차 주전자와 찻잔을 쟁반에 담아 돌아왔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김 속에 우러나온 찻물이 누런빛을 띠었다.
“왜 안 마시나?”
아무도 차에 손을 대지 않자 청선이 물었다.
“차에 대해 잘 모릅니다. 다도에 대해 아시면 배우면서 마시겠습니다.”
도현의 차분한 대답에 청선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냥 마시면 돼. 그냥 뜨거운 물이라고 생각하고.”
청선이 과장스러운 입 모양으로 찻물을 입으로 한번 식힌 뒤에 천천히 마셨고, 그제야 도현은 용주에게 눈짓을 보내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는 뒷맛이 무척 쓰고 맛이 없어서 용주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웃으며 보던 청선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국에서 이 먼 옥룡산까지 등산을 온 이유는 뭔가?”
“아는 사람에게 소개를 받았습니다. 중국에 가면 한번쯤 산을 타 보라고요.”
“와 보니 어떤가?”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이 산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 보게. 산에 대해서는 내가 아주 잘 아니까.”
“산보다 이곳이 더 궁금합니다.”
“여기?”
“네. 사실은 아까 무척 놀랐습니다. 도인께서 나무 사이를 날아오셨을 때요.”
“오호, 이 친구 아주 속이 음흉한 친구였군.”
청선이 손가락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현을 삿대질하며 경박스럽게 웃었다.
“놀랐으면서 아까는 그리 담담히 나를 대하다니.”
“침착해지려고 많이 노력했을 뿐입니다.”
“내가 속았어. 나는 또 자네가 나의 이런 능력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진정한 그릇이라 여겨 도관으로 초대했는데.”
혀를 차던 청선은 멀뚱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는 용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까부터 왜 안절부절인가? 뒤에 호랑이라도 쫓아오나?”
용주는 청선이 지그시 자신을 쳐다보자 불안한 마음에 떨고 있던 오른발을 냉큼 멈췄다.
“이곳이 궁금하단 말이지?”
거슬렸던 용주의 다리 떨기가 멈추자 청선은 차를 마시며 도현에게 다시 집중했다.
“도인 같은 분이 머무시는 걸 보면, 평범한 곳이 아닌 것 같아서요.”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등선궁은 그냥 오래된 일반 도관일세. 딱히 흥미롭거나 우화등선한 이도 없는.”
청선에게 자세한 얘기는 들을 수 없었고, 도현은 고민 끝에 검선문의 비급과 관련한 사실을 이쯤에서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눈빛이 차가워졌군.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 바꿔 놓았나.”
도현의 변화를 귀신처럼 읽어 낸 청선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자네는 또 다리를 떠는군.”
멈췄던 용주의 다리 떨림이 다시 시작되자 청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선문을 아십니까?”
청선의 안색이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3년 전 상해 쿵푸 도장에 난입해 칼을 휘두른 등선궁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청선의 사부이자 검선문 21대 문주인 태선군은 바람을 가르며 등선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옷은 찢어지고 몸 곳곳엔 핏자국이 가득했다.
‘마침내 죽이고 말았구나.’
3년간 폐관 수련을 하게 만든 옥룡산의 절대자 무허 진인을 죽이고 돌아가는 그의 마음은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언제나 늘 반 수 차이로 패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3년간의 폐관 수련이 헛되지 않았는지, 사형인 무허 진인은 그를 감당치 못하고 쓰러졌다.
‘이제 나를 막을 자는 없다.’
머리를 서늘하게 하던 사형의 존재도 지웠으니, 더는 그를 의식해 산속 도관에 억지로 머물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 자리 잡은 제자들이 마련한 호화로운 집과 산해진미를 맛보며 여생은 권력에 취해 살 생각이었다.
허리에 고풍스러운 검을 매달고 달리던 그는 낮게 웃으며 산 너머에 위치한 등선궁을 향해 더욱 빨리 움직였다.
“음.”
묵직한 침음성과 함께 청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현이 검이 든 통의 뚜껑을 열며 따라 일어섰다.
“산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이곳을 찾아 헤맸던 거군.”
“검선문의 비급을 이곳에서 도둑맞은 게 맞습니까?”
“……맞네.”
청선은 순순히 인정을 했다.
“3년 전 상해 쿵푸 도장에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검선문의 비급을 회수해 간 것도 인정하십니까?”
“허허.”
청선의 얼굴에 해가 지며 만들고 있는 붉은 노을빛이 어른 거렸다.
“자넨 누군가?”
“그날 부상을 입은 한국인의 아들입니다.”
“자네가?”
살짝 놀란 눈빛을 지은 청선은 도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래, 맞아. 눈매가 아주 닮았군.”
“아버지를 아십니까?”
“물론이네. 그의 칼을 받아 준 게 나니까.”
“뭐라고요? 그럼 아버지 머리에 검상을 남긴 게 당신이라는 겁니까?”
청선은 무거운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자네를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자네에게 술을 얻어먹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테고.”
도현은 망설였던 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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