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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18화 (18/575)

[18] 디 임팩트 1권 18화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소탈하고 꾸밈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청선이었기에 도현은 마음 한편에 호감이 생겼었다.

그래서 아버지 일에 그는 관련이 없었으면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바로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지 말게.”

도현이 검을 뽑아 들자 두 손을 허리 밑으로 늘어트리고 서 있던 청선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는 당신 때문에 죽기 전까지 정신병원에 계시다가 비참하게 돌아가셨어.”

“미안하네. 도둑맞은 물건을 되찾다 벌어진 일이야.”

“검선문의 비급! 난 그게 뭔지 관심 없어. 중요한 건 당신의 검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야.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밤 당신에게 당하는 악몽을 꾸셨고. 내가 그 악몽, 깨끗이 거둬 드리겠다고 약속했어.”

“어찌하겠다는 건가? 그 칼로 나를 베겠다는 건가?”

빈손으로 칼을 마주하면서도 청선은 당황치 않고 물었다.

“아버지 명예를 되찾겠어.”

차가운 시선으로 청선을 노려보던 도현은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 나랑 결투를 하자는 건가?”

“당장 검을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빈손으로 내 칼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도현이 말을 하며 빠르게 검을 몇 번 휘둘렀다.

쉬쉬쉭!

검신이 몇 번 번뜩이는 가 싶더니 청선이 머리에 쓰고 있던 낡은 관이 반쪽이 되고, 걸치고 있던 도포의 소맷자락이 일정한 간격으로 양쪽 다 잘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빠르고 정확하고, 과감한 한 수였다.

청선은 그 한 수에 젊은 도현이 얼마나 검을 깊이 수련해 왔는지 단박에 깨달았다.

“놀라운 솜씨군. 맨손으로 상대하려 했다가는 큰코다치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청선은 잘린 소매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하나? 내가 모시는 분이 있다고. 그분이 곧 돌아오실 걸세. 자네는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할 분이야. 자네가 이러는 걸 보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 할 걸세. 떠나게.”

도현은 꿈쩍하지 않았다.

“저 친구 허리에 있는 권총을 믿고 이러는 거라면, 잊게.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야.”

청선의 시선이 용주의 허리로 향했다.

“30초 남았습니다.”

도현이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내 말을 듣게. 거짓말이 아니야!”

“왜 당신이 우리를 걱정하는 겁니까?”

“너희를 데려온 게 나니까! 사부에게 혼나고 싶지 않다. 어서 나가!”

진중하게 대답을 해 주던 청선이 돌연 소매를 떨치며 언성을 높였다.

“도현아, 저 인간 지금 왜 저러는 거야?”

“그의 사부가 곧 온대. 총으로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라면서 도망가라는 거야.”

“총 맛을 봐야 무서움을 알려나.”

용주는 코웃음을 치며 아예 권총을 대놓고 꺼냈다. 상대방이 눈치챘으니 가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용주야, 아무래도 그걸 물어봐야겠어. 정말 그 정도 고수라면…….”

“내가 고수?”

용주가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그래.”

도현은 청선을 똑바로 봤다.

“3년 전 쿵푸 도장에 있던 홍 사부와 그리고 우리 아버지께서 최근에 돌아가셨습니다. 몸속 장기가 조각조각 난 채. 당신들 짓입니까?”

“모르는 일이야.”

“정말입니까?”

“모르는 일이라고 했네. 더 이상 날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떠나게. 정 나랑 검을 섞고 싶으면 오늘 나랑 만났던 그 샘이 있는 곳에서 내일 보세. 내일 상대해 주겠네.”

도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청선은 허리를 굽혀 소매에서 잘린 천조각을 주워 들었다.

“도현아, 뭐라는 거야? 맞대?”

“아니.”

“거짓말 아냐?”

“뭐 하는 건가? 어서 무기를 감추고 떠나라는대두!”

“늦었다, 청선아.”

태선군이 접객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싸늘하게 말했다.

“사부님!”

“내 밖에서 다 들었느니. 저들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제자의 입을 막아 놓은 태선군은 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도현과 총을 겨누고 있는 용주를 가소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겁도 없이.”

“도현아, 저기 저 노인 손. 왼손 봐 봐. 손가락이 여섯 개야!”

“나도 봤어.”

소매 밖으로 들어난 태선군의 왼손은 정신병원의 장 씨가 그림에 그려 놓았던 것과 같이 여섯 개였다.

“상해의 홍 사부! 한국에 있던 우리 아버지 백남식! 두 분 모두 당신이 죽였습니까?”

“제자야 봐라.”

태선군은 도현의 분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괴로운 표정으로 서 있는 청선을 돌아봤다.

“3년 전 그때 네가 인정을 베풀지 않고 그 두 놈을 죽였다면 지금 나는 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부님.”

“나는 이들을 죽이고 내일은 3년 전 네가 마음이 약해 살려 주었던 모든 이들을 찾아내 죽일 것이다.”

“사부님! 어차피 일반인들은 비급을 보아도 배울 수가 없는 무공들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어찌 장담하느냐? 이 넓은 세상에 무공의 맥을 이으며 살고 있는 문파가 우리뿐이더냐!”

쿠우우웅!

태선군이 발을 구르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며 접객실 바닥이 흔들거렸다.

“이런 젠장.”

용주는 지진이라도 난 듯 잠시 동안 땅이 울렁거리자 중심을 잡으며 총을 꽉 움켜쥐었다.

‘강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

도현은 자신을 쏘아보는 태선군의 눈빛에 눈이 타 버릴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 네깟 놈들이 감히 날 상대해 보겠다고 찾아온 것이냐?”

“왜 죽였지? 왜 그렇게 처참하게 몸속 장기들을 으깨어 죽였느냔 말이야!”

도현은 눈의 고통을 참으며 태선군을 차갑게 노려봤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으니 죽였을 뿐이니라. 그리고 죽이는 방법은 내가 정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선군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용주의 옆에서 솟아났다.

총이 바닥에 떨어지고 용주는 허수아비처럼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도관에 깔린 청석에 머리를 부딪친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용주야!”

도현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호검술을 발휘해 태선군에게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황 사장이 간장이라고 명칭을 붙일 정도로 명검인 검과 도현의 검술이 결합하자 그 날카로움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을 유유히 유령처럼 통과하며 태선군은 도현의 빈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퍼엉!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도현은 입에서 피를 뿌리며 용주처럼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사부님!”

“너는 가만히 있어! 한 번만 더 나섰다가는 아무리 너라 해도 참지 않겠다!”

눈에서 잔혹한 기운을 풍기며 태선군은 훌쩍 창문을 넘어 청석 바닥에서 검에 의지한 채 간신히 일어나고 있던 도현에게 다가갔다.

“검을 다루는 게 제법 기특한 구석은 있지만, 그 실력으로는 청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하물며, 내 앞에서 검을 휘둘러?”

“내가 배운 게…… 검이다. 검을 휘두르는 게 어때서…….”

도현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우엑!”

핏덩이를 토해 내며 그는 옆에 기절해 있는 친구를 내려다봤다.

‘용주야.’

미안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뜻해졌다.

“검을 뽑아라.”

도현이 태선군이 찬 고풍스러운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라?”

“죽더라도 검에 죽겠다. 네 지저분한 주먹질이…… 아니라.”

“기상은 가상타만, 조금 전 말하지 않았더냐? 죽이는 방법은 내가 정한다고.”

태선군이 천천히 다가왔다.

도현은 점점 가까워지는 태선군을 가물거리는 눈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기운아, 단전 속 기운아, 내공이라면…… 한 줌만 힘을 보태 줘라. 한 번만.’

몇 발자국 앞에까지 태선군이 다가오자 도현은 얼마 전부터 단전에 자리 잡기 시작한 미약한 기운에 주문처럼 기도를 했다.

태선군이 번개같이 움직여 자신을 단번에 날려 버린 것과 아버지를 죽인 수법들은 내공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억울하고 분했다.

아버지는 40년 넘게 평생 검에 매진했고, 자신은 그 반인 20여 년을 수련했다.

저 노인에 비해 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걸 끝낼 수는 없었다.

‘아니…… 내게도 단전에 기운은 있어. 이 기운을 쓰고 죽어야 돼. 아버지가 가르쳐 준 호흡법, 그렇게 오랫동안 해 왔는데…… 아버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그는 마침내 태선군이 두 걸음 앞에 까지 다가오자, 지팡이처럼 기댔던 검을 밑에서 위로 부드럽게 올려 쳤다.

단전 속 기운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그의 팔을 타고 검 속에 주입되자 흐릿한 빛이 검 끝에 맺혔고, 가볍게 검을 피하던 태선군은 그의 예상을 깨고 손가락 한 마디 길이로 뻗어 나온 검기에 가슴을 베이고 말았다.

쓰러지던 도현은 태선군이 놀라 외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피가 바닥에 후드드득 비처럼 떨어지자 씨익 웃으며 정신을 잃어 갔다.

도관 제단 뒤편에 난 동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구조로, 수십 미터 깊이에 좌우로 갈라지는 통로까지 존재했다.

동굴 입구에서 몇 미터 들어가지 않아 왼쪽 통로로 들어가면 태선군의 처소였고, 오른쪽은 주로 수련을 하는 장소로 쓰이는 곳이었다.

수련을 하는 장소를 지나 동굴의 막다른 곳에 도달하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굵은 쇠사슬이 천장에 부착되어 있었는데, 도현과 용주는 그 쇠사슬에 양 손목이 한데 묶여 푸줏간 고기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도현이 신음을 흘리며 깨어나자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있던 용주가 쿨럭거리며 말했다.

“깨어났냐?”

“용주야.”

도현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에 잠시 놀라며 친구의 음성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주야, 괜찮아?”

“어. 머리가 좀 아프고 팔이 빠지려고 한다는 것 외에는 그럭저럭. 너는?”

도현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양손이 차가운 감촉의 쇠사슬에 묶여 있어서 몸을 만져 볼 수도 없고, 눈으로 어둠을 뚫고 몸을 내려다볼 수는 없지만, 팔다리는 멀쩡한 것 같았다.

대신 숨을 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불로 지진 듯 속이 쓰라리고 아팠다.

“괜찮은 것 같아.”

입가에 엉겨 붙어 있던 피가 그의 혀에 닿자 비릿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깨어 보니 이 모양 이 꼴이던데.”

태선군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도 미처 파악 못 하고 호되게 얻어맞고 밖으로 튕겨져 나갔던 그는 그 뒤의 일이 궁금했다.

도현은 어두워서 전혀 보이지 않는 주변을 살피며 용주가 기절한 뒤에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하하하! 그 괴물 같은 노인네 깜짝 놀랐겠네. 죽었을까?”

용주가 통쾌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젠장. 죽어 버렸어야 하는데.”

용주가 분하다는 듯이 몸을 흔들자 천장에서 내려온 쇠사슬이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을 냈다.

“왜 우릴 안 죽인 거지? 그 노인네, 우리는 안중에도 없던 것 같았는데.”

“글쎄.”

도현도 의문이었다.

“제길. 총 한번 못 쏴 보고 이 꼴이라니. 분하다.”

“용주야, 미안하다. 내가 마음만큼 실력이 따라 주지 못했어.”

“각오하고 왔어. 그런 소리 마. 그리고 너도 내공을 사용했다면서. 갈고닦으면 그 노인네 언젠가는 이길 수 있을 거야.”

도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단전의 기운을 기적처럼 사용했다.

아직도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검을 힘없이 휘둘렀고, 그 순간 단전의 기운이 빨려 나와 검에 주입된 것이다.

‘그것이 검기였나?’

미약하게 맺힌 검의 기운이 방심하던 태선군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아마 그가 의식적으로 휘둘렀다면 태선군은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게 운이 좋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기회가 과연 올까…….’

도현은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이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죽기 전까지 포기하지 말자.’

나약해진 마음 상태로 죽기를 기다리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친구나, 그리고 아버지의 끝내지 않은 복수까지…….

“용주야, 살아 보자.”

“당연하지 자식아! 그럼 이대로 죽으려고 했냐?”

도현의 말투에 생기가 감돌자 기분이 좋아진 용주가 몸을 마구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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