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디 임팩트 1권 19화
“너 정신 차리기 전에 내가 쇠사슬을 막 흔들어 봤는데, 돌가루 같은 게 떨어졌어. 흔들다 보면 쇠사슬이 쑥 빠질지 몰라.”
“좋아. 해 보자.”
도현은 위에서 내려온 쇠사슬을 거머쥐고 밑으로 힘껏 당겼다.
온몸의 체중에 어려서부터 검을 수련하며 남달리 키워 온 팔 힘이 더해지자 동굴 천장에서 내려온 쇠사슬이 팽팽해졌다.
몇 차례 반복을 더 하자 돌가루들이 도현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더!’
팔의 힘뿐만 아니라 전신에 숨어 있는 모든 근력을 이용했다.
피이잉!
맑은 금속성과 함께 쇠사슬이 긴장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기대감을 갖게 했지만 아쉽게도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를 내던 도현은 잠시 쉬었다가 이를 악물며 다시 쇠사슬을 거칠게 흔들기 시작했다.
태선군이 왜 자신들을 살려 뒀는지 의문이지만, 그게 오래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 탈출해야 돼.’
그와 용주는 쇠사슬과 악전고투를 계속 벌여 갔다.
온몸에 기력이 다 빠져 숨 쉬는 것도 힘들 무렵,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횃불을 든 청선이 등장했다.
“소용없네. 그리 간단히 빠질 쇠사슬이 아니야.”
둘이 뭘 하고 있는지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청선은 차분히 말하며 발이 허공에 떠 있는 도현과 용주의 사이에 섰다.
“이곳이 어딥니까?”
“아까 자네가 물었던 제단 뒤 동굴이네. 제법 깊은 동굴이지.”
“우릴 왜 살려 둔 겁니까?”
“자네가 휘두른 칼에 사부님이 부상을 입었어. 쉽게 죽일 심산이 아니신 게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자네들은 죽어 갈 걸세.”
횃불에 비친 청선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우리를 걱정해 주는 겁니까?”
“그렇다네.”
“왜죠? 당신은 그의 제자인데.”
도현은 태선군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려고 했던 청선의 행동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지금은 믿고 있었다.
“마음이 그리 시키니까.”
담담히 대꾸를 한 청선은 벽 틈 사이에 들고 있던 횃불을 고정시키고는 들고 왔던 검을 뽑았다.
“자네, 좋은 칼을 가지고 왔어. 내 사매가 가지고 있는 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도현이 휴대했던 검을 감탄 어린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칼집을 바닥에 툭 던지고는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부드럽게 감쌌다.
“검술은 누구에게 배웠나?”
“아버지께.”
“3년 전 자네 부친은 검술 조예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지만, 형식의 자유로움까지는 이르지 못했더군. 그래도 꽤 선전하셨네. 내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여러 합을 버티셨거든. 자네는 부친을 존경해도 되네. 아마 그분이 나처럼 정식 무공을 익히고 수백 년간 대대로 내려오는 검술의 깨침이 담긴 공부를 사부님께 사사했다면,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청선이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자 도현은 마음이 울컥했다.
“당신이 그리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아버지 머리에 검상을 안 남겨도 됐잖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목숨을 건 대결이었네. 그의 눈빛이 그랬어. 나는 그의 뜻대로 대해 줬을 뿐이야. 마음이 가는 대로 검이 흐르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는 마지막에 검을 비틀었지만 내공을 쓰지 않았던 그 상황에서 검은 내 의지를 비웃고 그의 머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네.”
청선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정당한 비무를 벌였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그것이 홍문기와 자네 부친을 살린 셈이지. 나는 자네 부친을 높이 평가해 비급과 관련해 함구할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 그대로 물러났었네.”
도현은 마지막까지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당신 사부는 잔인하게 두 분을 죽였군요.”
“그 원망 모두 다 내게 하고 가게.”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몸에서 살기가 물씬 풍겼다.
“지금 우리를 죽이려는 겁니까?”
도현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사부님이 오면 자네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죽을 거라고 말했지 않나. 고통 없이 보내 주겠네.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인정이니까.”
칼을 머리 높이로 올리는 청선의 행동에 도현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뭐야! 우리 죽이려는 거야?”
용주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거칠게 반항을 했다.
“너도 똑같은 자식이야! 그 노인과 다를 바 없다고, 이 개자식아!”
용주의 욕설을 귓등으로 흘리던 청선은 별안간 도현이 발로 그의 턱을 올려 치자 상체를 활처럼 꺾어 피한 다음,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번개같이 좌우로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끝인가?’
죽음을 기다리던 도현과 용주의 머리 위에서 폭죽과 같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잘린 쇠사슬과 함께 그들은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과연 명검이군.”
청선은 쇠사슬을 끊어 낸 도현의 검을 칼집에 다시 꽂아 놀란 얼굴로 아직 엎드려 있는 도현의 앞에 던졌다.
“떠나게. 사부님 운공이 곧 끝날 걸세. 살려면 꽁지가 빠지도록 산을 뛰어 내려가야 할 거야.”
도현은 의외의 전개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서둘러 손목을 감쌌던 쇠사슬을 풀어낸 다음 검을 들고 일어났다.
살려 준다고 하니 고맙지만 이런 큰일을 벌이고 청선이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은요?”
“허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겐가?”
혀를 한번 찬 청선은 도현에게 한 발 다가섰다.
“내 말 잘 듣게. 운이 좋아 이 산을 무사히 내려가면, 어디 심산유곡이라도 찾아가 10년은 세상과 담을 쌓고 숨어 지내게. 사부에게는 쓸 만한 제자들이 여럿이야. 그 녀석들이 돈과 사람을 풀면 자네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
“대답하게!”
청선의 다그침에 도현은 손에 든 검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조심하겠습니다.”
“고집하고는. 내공을 어디서 익히게 됐는지 모르지만, 천운으로 사부의 몸에 상처를 입힌 게야. 그것으로 사부의 실력을 가늠해서는 절대 안 돼!”
근엄하게 경고를 한 그는 도현과 용주를 양쪽으로 부축하고는 신법을 발휘해 동굴을 비호처럼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이나 끼고 바람처럼 달리는 그의 무공 실력에 도현이 놀랄 사이도 없이, 어느새 그들은 태선군이 운공을 하는 처소가 보이는 좌우 갈림길에 도달했다.
“네 이놈!”
그때 뒤에서 천둥과 같은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꽉 잡게!”
생각보다 일찍 운공을 끝낸 사부의 등장에 청선은 당황하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채 두 걸음도 떼기 전에 그는 사부가 날린 검 자루에 등을 가격당하고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양쪽에 있던 도현과 용주도 같은 신세였다.
가슴에 붕대를 감은 태선군이 노한 얼굴로 넘어진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동굴 입구를 가로막으며 섰다.
“청선, 네놈이 정녕!”
“사부님.”
청선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미친 것이냐? 내 그토록 나서지 말라고 했거늘!”
“사부님, 이들을 살려 주시고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모두 다 제 잘못입니다. 도둑이 들게 도관을 비우고, 사문의 비급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제 잘못입니다.”
“이미 네 손을 떠난 일이다. 저놈들을 살려 두면 두고두고 후환으로 남게 돼.”
태선군은 싸늘히 말하며 도현을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남기다니. 뼈마디를 모조리 부숴 주마.”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은 그는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청선을 가볍게 옆으로 밀치며 뒤로 물러나는 도현과 용주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태산이 다가오는 압박감 속에 도현은 힘겹게 검을 뽑아 들었다.
“이번엔 당신 가슴이 아니라 목을 베겠어!”
“크하하하!”
도현의 말을 듣고 미친 듯이 비웃던 태선군이 손짓을 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도현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져 동굴 안쪽으로 튕겨져 들어갔다.
“도현아!”
쓰러진 도현을 향해 용주가 뛰어갔다.
“하늘 아래 내 목을 벨 자가 과연 있겠느냐? 크하하하!”
오만한 태도로 크게 웃는 태선군을 노려보며 도현은 용주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창자가 꼬이는 고통은 있지만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었다. 바로 죽일 생각이 아닌지, 태선군이 힘 조절을 한 것 같았다.
‘장풍이라도 쓴 건가?’
허공을 격하고 그의 복부에 큰 충격을 준 무형의 기운에 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용주의 말대로 정말 괴물 같은 자였다.
“귀신이 돼서라도 널 찾아오겠다!”
검을 빼 들고 호검술 자세를 취한 도현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용주도 따라 외쳤다.
“이거나 처먹어라!”
저속한 주먹질을 용주가 해 대자 태선군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괘씸한 놈들!”
태선군이 유령처럼 다가오기 시작했고 둘은 최후를 준비했다.
“도현아, 우리 귀신이 돼서라도 만나자. 함께 혼내 줘야지.”
“그래.”
죽음을 초월한 듯한 그들의 의연한 자세에 태선군은 어이가 없고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죽기 전에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겠다, 이놈들!”
태선군이 그 자리에서 우뚝 서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아귀를 중심으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생기더니 엄청난 흡입력으로 도현과 용주를 빨아들였다.
대항해 보려고 해도 태풍 속 가랑잎처럼 도현은 항거할 수 없는 절대 힘을 느끼며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두 손바닥으로 도현과 용주의 얼굴을 각기 움켜쥔 태선군은 음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감히 천하를 오시했던 검선문의 당대 문주인 나 태선군을 네놈들이 어찌 보고!”
“사부님! 그것만은!”
청선이 뒤에서 말을 붙였지만 태선군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무형의 기에 온몸이 휘감겨 꼼짝 못하고 있는 도현과 용주의 몸에 진기를 주입했다.
대해처럼 넓은 태선군의 내공이 둘의 체내로 들어가자 즉각 반응이 왔다.
“크아아악!”
용주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살가죽을 벗겨 염산을 붓고 펄펄 끓는 기름을 입안에 부으면 이런 고통이 올까.
맹세코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이었다.
몸을 부르르 떨던 용주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혼절 하고 말았다.
철퍼덕.
혼절한 용주를 풀어 준 태선군은 차가운 시선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어떠냐. 버틸 만하더냐?”
도현은 태선군에게 기쁨을 주기 싫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고통과 싸우는 중이었다.
이미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고, 용주처럼 비명을 마음껏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기 싫었다.
태선군의 손에 얼굴이 붙잡힌 도현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를 노려보며 고집스럽게 한 자 한 자 뱉어 냈다.
“더, 해 봐.”
도현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고통을 이겨 내는 정신력이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런다 하여 난 너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태선군은 냉소를 흘리며 다시 진기를 주입해 도현에게 더 심한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흐윽!”
끝까지 놓고 있지 않았던 검이 도현의 손에서 마침내 미끄러졌고, 사지 육신이 제멋대로 날뛰며 통제를 벗어났다.
‘반드시, 반드시 죽인다. 태선군!’
고통이 심해질수록 도현은 비명 대신 복수를 다짐했다.
“포기해라.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죽어서도 말이야.”
표정이 사라진 태선군은 진기를 도현의 머리 쪽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필히 죽게 되어 있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청선이 도현이 떨어트린 검을 주워 태선군의 전면에 섰다.
“사부님!”
그는 소리 높여 외치며 그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마치 보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듯 보였다.
“이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대제자의 돌발 행동에 태선군은 깜짝 놀라며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청선을 노려봤다.
청선의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백산에서 기원한 검선문은 의를 숭상하고 협을 행하며, 만백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기로 결의한 다섯 분의 조사들이 개파한 이래 장장 1,000년을 이어 왔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사부님은 힘없는 자를 벌레와 같이 여기고, 의와 협은 버린 채 사리사욕에 검선문의 절예들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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