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디 임팩트 1권 22화
도현은 한 달 전 조 박사가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초고대 문명의 진보된 과학기술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에너지원이 필요했고, 그 중심에 자신의 팔에 새겨진 타투와 같은 문양이 그려진 스톤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차원 이동 장치의 핵심 부품 같은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연료 없는 차와 같았다.
용주도 도현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삼촌을 위로하기보다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차원 이동 장치는요?”
“뭘 어떻게 돼! 끝난 거지!”
이렇게 된 게 모두 조카 때문인 것처럼 조 박사는 눈물을 거두며 버럭 호통을 쳤다.
“두 조각이 났어도 돌은 돌 아닙니까? 그냥 다시 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니까 하는 소리다.”
조 박사의 낙심한 표정에 용주는 뒤로 휘청거렸다.
‘내 돈.’
삼촌 덕을 조금이라도 보려던 계획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조 박사도 그렇고 용주도 그렇고 10년은 늙어 버린 얼굴이 되었다.
멍하니 말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들을 보던 도현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두 조각이 난 돌을 들었다.
볼링공처럼 광택이 나고 매끄럽던 돌의 표면은 현무암처럼 구멍이 송송 나 있었고, 문양이 새겨져 있던 부분도 여기저기 훼손되어 있었다.
“어쩌실 거예요, 삼촌?”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죽은 생선의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용주가 힘없이 물었다.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차원 이동 장치는 완전 물 건너간 거죠?”
“저 돌을 다시 구하지 않는 한은.”
조 박사는 도현의 손에 들린 돌을 보며 착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구하면 되잖아요.”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삼촌에게 저 돌을 판 아프리카의 그 부족장을 다시 찾아가서요.”
“그도 고대 암벽화가 파괴된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돌이야. 더는 없어.”
“그래요…… 그래도 찾아보면 어딘가에 더 있지 않을까요?”
“용주야.”
“네, 삼촌.”
“너도 차원 이동을 경험하고 싶은 거지?”
‘돈이 되니까 그렇죠!’
용주는 속으로 외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세상일이 참 뜻대로 안 되는군. 힘들게 연구를 했는데.”
괴로움을 속으로 삭인 조 박사는 돌을 살피고 있는 도현에게 뒤늦게 물었다.
“그래, 중국은 잘 다녀왔나?”
“네, 박사님.”
“성과는?”
조 박사는 조카와 도현이 백남식 관장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삼촌, 허탕만 치고 왔어요.”
도현 대신 용주가 끼어들었다.
“그랬군.”
조 박사는 백 관장의 일과 관련해 더 질문을 하기 뭐했는지 타투에 관해 물었다.
“그 타투는 여전히 변함없는가?”
도현은 돌을 내려놓고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실은 그 문제 때문에 오늘 왔습니다.”
“아니, 타투 색이 다시 검어졌군.”
색이 변한 것에 놀라워하던 조 박사는 이어지는 도현의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만으로 차원 게이트가 생성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박사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와 도현을 배웅하던 조 박사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차원 이동 장치는 망가지고 남은 건 자네밖에 없군. 오직 자네만이 내가 초고대 문명의 기기를 완성했다고 증명해 줄 수 있을 뿐이야.”
“삼촌, 다시 만들면 되죠. 힘내세요.”
조카의 응원에 조 박사는 힘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그 타투가 아까 말한 대로 지속적으로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비록 도현이 자네 눈에만 보이겠지만 말이야. 그래야 내 연구가 영원히 기억되지 않겠나?”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사님.”
“그러게.”
뒤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던 조 박사는 다시 걸음을 돌려 차에 탄 도현에게 말했다.
“좀 늦은 감 있지만, 부친의 일은 정말 안됐네.”
조 박사의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용주는 한탄을 했다.
“도현아, 슬프다. 원대한 내 계획이 무너졌어. 차원 이동 장치가 쓸모없어졌다니.”
어깨를 주무르며 운전을 하던 도현은 피식 웃었다.
“원대한 계획이 뭐였는데?”
“태선군 타도와 백 관장님이 세운 도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거지.”
둘 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 가볍게 물었던 도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세상이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그만큼 수월해 질 일이 많은 게 이 세상이잖아. 네 실력을 증진시키는 빠른 방법을 돈의 힘으로 찾아볼 수도 있고, 도장의 건물을 통으로 살 수도 있고. 거기다가 나도 있는 돈 펑펑 쓰며 한번 살아 보고.”
삼촌의 연구가 물거품이 된 것이 못내 아쉬운지 용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용주야, 한동안 집에서 푹 쉬어야 될 거야.”
“걱정 마. 곰이 겨울잠 자듯 집구석에 꼼짝하지 않고 밥만 축낼 테니까. 야, 들어가서 밥 좀 먹고 갈래? 엄마가 너 보면 좋아하실 텐데.”
차에서 내리던 용주가 차 문을 닫지 않고 도현을 쳐다봤다.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음에.”
“도현아, 내가 말했었지. 복수는 복수고 사는 건 사는 거라고. 힘들더라도 사는 것처럼 살다가 복수하자. 그래야 돌아가신 백 관장님도 편안하실 거 아니냐.”
너무 자신을 학대하듯 몰아세우며 살지 말라는 친구의 염려 섞인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주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친구였다.
“들어가.”
철컥.
오랜만에 돌아온 검술 도장은 변함이 없었다. 약간의 먼지만 쌓여 있을 뿐.
지친 몸을 이끌고 도장에 발을 디딘 도현은 도복으로 갈아입고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왔냐, 아들아.’
‘아버지.’
‘힘들어 보이는구나.’
‘조금요.’
도현은 엄하지만 내면이 따뜻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태선군을 두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분하고 분합니다.’
‘자책하지 마라.’
‘아버지.’
‘모든 건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사진 앞에 무릎을 꿇은 도현은 이것이 환청임을 알면서도 아버지와 대화를 어떡하든 더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환청은 사라졌고 도현은 밤이 깊도록 아버지 사진이 걸린 벽 앞을 장승처럼 지켰다.
도장에서 몸을 추스르며 도현은 단전의 기운을 검에 싣는 연습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태선군을 상대로 불의에 일격을 날렸을 때를 자꾸 떠올리며 그 아릿한 감각을 몸으로 다시 구현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숨을 헐떡이며 검을 내려놓고 큰 대자로 누웠다.
단전의 내공을 사용한다면 그것을 시작으로 검의 경지가 한 단계 더 오를 것 같았는데, 도무지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가르침을 구할 상대가 없다는 게 뼈아팠다.
‘없다면 스스로 개척한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도복 소매를 걷어 올려 타투를 노려봤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열흘.
그사이에 두 번에 걸쳐 차원 게이트를 열고 닫으며 테스트를 했다.
그 결과 그의 가설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타투가 완벽한 금빛으로 변한 뒤에 게이트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위험하지만 모험을 해 볼 수밖에.”
갈색 가죽 갑옷과 정강이까지 오는 긴 장화, 폭이 넓은 허리띠에 작은 단검을 끼우고 허리띠 사이로 올라온 고리에 길이 1m짜리 양날 검을 건 도현은 마지막으로 원형 투구를 머리에 착용했다.
석궁은 조 박사가 망가트려서 사용할 수가 없게 돼서 용주가 그냥 놓고 왔다.
“그렇게 보니까 완전히 전사 이미진데?”
도장 한가운데서 무장을 한 도현을 보며 용주가 감탄을 하다가 어두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
“위험하겠지. 하지만 내겐 그만큼 좋은 수련 장소도 없을 것 같아.”
“죽을 수도 있어. 영영 못 돌아올 수도 있다고 자식아.”
“여기서 하루를 수련할 시간이면 그쪽에서는 4일 이상을 수련할 수가 있어.”
이계와 현실의 시간은 같지가 않았다.
도현은 한나절쯤 보내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그를 기다리던 조 박사와 용주는 불과 2시간이 조금 넘었을 뿐이라고 했다.
조 박사는 그게 차원 간에 벌어지는 알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일 거라고 말을 했었다.
“거기다 그곳은 검의 시대였어. 잔인한 말 같지만, 실전은 검을 익히는 데 많은 깨달음을 줘. 그런 실전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이대로 묵혀 둘 수가 없어.”
“그래, 도현아. 나도 네 말뜻 다 알아. 아는데.”
용주는 말을 하다가 답답했는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쥐어뜯었다.
“자식아, 게이트가 문제잖아, 게이트가! 만약에 그쪽 게이트가 여기서처럼 안 열리면?”
“열릴 거라고 믿어.”
투구 사이로 보이는 도현의 두 눈빛이 강하게 반짝였다.
이미 마음을 정한 도현이어서 용주는 결국 설득을 포기했다. 태선군의 벽을 넘어서기 위한 그만의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도장하고 집 좀 부탁한다.”
“알았어. 너도 그곳에서 죽치고 있지 말고 게이트가 열리면 일단 바로 넘어와. 그래야 나도 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안심이 되니까. 알았냐?”
“고맙다.”
도현은 관장실에 걸려 있는 자신의 수련용 진검까지 챙겼다. 이계에서 가지고 나왔던 방어구와 양날 검에다가 검 한 자루를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등에는 만일을 대비해 식량으로 사용할 음식과 물통이 들어 있는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용주는 어디서 총이라도 구해서 가지고 가야 하는 건 아니냐고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곳은 검의 시대. 나 역시 이 검으로 승부하며 실력을 키우겠어.’
도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천천히 타투에 손을 댔다.
게이트가 환상처럼 그의 눈앞에 생성됐다.
몇 번 봐서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그림.
“용주야, 다녀올게.”
“조심해라! 혹시 돈 좀 될 거 있으면 챙겨 오고!”
“그래.”
무장을 하고 등에 검은 가방을 멘 도현은 깊게 심호흡을 한 다음, 게이트에 힘차게 뛰어들었다.
툭툭.
도현이 사라져 버린 도장 바닥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뭔가가 연속해서 떨어졌다.
그건 이계에서 사용할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는 가방과 수련용 진검이었다.
도둑
용주에게 걱정 말라는 강한 눈빛을 보내고 게이트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도현도 이계에 가서 잘못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완벽히 떨쳐 내기란 어려웠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게이트를 넘어온 그는 이계에 처음 진입했을 때처럼 시간이 멈추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두 번째 겪는 일이지만 정말 신기한 광경이다.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은 상태에서 그는 눈에 보이는 주변 광경을 빠르게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예상했던 대로 그는 분지 안에 위치한 지하 유적 발굴 현장에 떨어졌다.
게이트를 이용한 마지막 장소로.
하지만 이상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이곳에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분지 안에 드문드문 쓰러져 있는 병사들의 시체.
어둠을 밝히고 있는 화롯불들.
‘그때도 저 위치쯤에 병사들이 죽어 있었던 것 같은데.’
도현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멈췄던 시간이 드디어 흘렀고, 공중에 약간 떠 있던 그의 몸이 밑으로 뚝 떨어지며 바닥에 깔린 흙먼지들을 옆으로 길게 밀어냈다.
몸의 중심을 잡으며 그는 급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날개 달린 괴물의 석상이 여전히 지하 유적 입구의 옆에 서 있었고, 입구의 계단 주변으로는 굳지 않은 피를 흥건히 쏟은 병사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때와 똑같아!”
도현은 그 자리에서 빙 돌며 분지 안의 전체 모습을 다시 한 번 꼼꼼히 확인했다.
역시 다시 봐도 그가 집으로 가는 게이트를 타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어렸을 때 본 만화가 생각났다.
폴이라는 주인공이 마왕이 사는 세계로 넘어갈 때 현실의 모든 사물들이 시간과 함께 멈추는 이야기다.
“그래, 마치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이트를 탄 순간, 이곳의 시간이 그렇게 멈춘 것 같아.”
예상치 못한 이계의 그림이었지만 도현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손과 등을 확인했다.
음식이 든 가방과 수련용 검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게이트를 넘어올 수 없는 것들이었나?”
쓴웃음을 흘린 그는 왼팔의 타투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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