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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3화 (23/575)

[23] 디 임팩트 1권 23화

다행히 타투는 그대로고 색만 검은색이었다.

“이것까지 사라졌으면 정말 난감할 뻔했어.”

도현은 최대한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그는 각오를 하고 왔다.

주변을 쓱 돌아본 그는 분지를 감싸고 있는 언덕 넘어 저쪽에 수백 명이 중독되어 죽은 사실이 떠올랐다.

시간이 멈춰 있었다면 그런 짓을 벌인 늙은 병사와 거구의 사내는 아직도 저기 지하 유적 안에 있을 것이다.

“떠나자.”

그때처럼 지하 유적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는 분지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불필요하게 안에 들어가서 그들과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가 막 분지를 벗어나려고 지하 유적 앞에서 몸을 돌렸을 때, 늙은 병사와 거구의 사내가 유적 건물 안에서 등장했다.

“어딜 가는가!”

도현을 알아봤는지 늙은 병사가 큰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뻔히 자신을 두고 묻는 걸 아는데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여길 떠나려고요.”

“왔으면 안에 들어가 봐야지. 이대로 가려고?”

늙은 병사와 거구의 사내는 어느새 도현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유적지 말입니까?”

“그렇다네.”

“괜찮습니다, 전.”

“분수를 아는 자군.”

도현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낸 거구의 사내는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투덜대듯 말을 이었다.

“이따위 은이 든 상자 하나 때문에 며칠을 고생하다니. 자네가 만약 유적지 안으로 들어와서 기웃거렸다면 이 불쾌한 기분을 자네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는 것으로 해소했을 거야.”

도현의 두 눈썹이 꿈틀댔다.

“노려보면 어쩔 텐가? 대장이 자넬 살려 두었다고 해서 나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하지 말게.”

“그만하게.”

늙은 병사가 머리에 쓰고 있던 원형 투구를 벗어 옆에 툭 집어 던지며 점잖게 말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비싸고 구하기 힘든 독을 며칠에 걸쳐서 살포하고, 이놈들이 발굴을 다 할 때까지 병졸 노릇까지 하며 참아 왔는데, 이게 뭐란 말입니까. 젠장! 손햅니다, 손해!”

“어쩔 수 없는 게지.”

늙은 병사는 원형 투구에 이어 피에 절은 가죽 갑옷까지 벗어 버리고 가벼운 옷차림이 됐다.

거구의 사내 역시 상자와 들고 있는 철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죽은 병사들과 한편으로 인식될 만한 문장이 찍혀 있던 원형 투구와 가죽 갑옷을 벗어서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이 풀썩이며 올라오는 먼지를 피한 도현은 가볍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래 있으면 거구의 사내와 한바탕 싸움이 날 것 같았다.

“그만 전 가 보겠습니다.”

“그 차림으로 가려고?”

거구의 사내는 상자와 철퇴를 챙기며 말을 이었다.

“커딜 영지 문장이 찍힌 투구와 갑옷은 벗고 가야지. 가는 곳마다 탈영병으로 오해받고 싶나?”

잠시 망설이던 도현은 게이트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돼 스스로 투구와 갑옷을 버리고 검만 챙겼다.

시비조로 계속 말을 거는 거구의 사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투구와 갑옷을 버리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차림으로 다니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는데.’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 차림이 된 도현을 보며 거구의 사내와 늙은 병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대장, 그런데 이자의 옷이 그새 바뀌었는데요?”

“그렇군. 낮에는 이렇지 않았지.”

도현은 다른 말이 더 나오기 전에 이제는 정말 이 사람들과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상황을 보니 수백 명의 병사들을 독으로 죽인 이유는 지하 유적의 보물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위험한 자들이다. 비록 대장이라 불리는 늙은 병사가 자신만 독에서 해독시켜 준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계에서의 일은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주변이 시끄러워지더니 분지 안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무기들을 손에 들고 달려오는 병사들은 낮에 도현이 그토록 싸웠던 반대편 진영의 병사들이었다.

“대장, 갑시다.”

거구의 사내는 상자를 옆에 단단히 끼고는 병사들이 나타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고, 대장이라 불린 노인은 도현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우리랑 함께 가세. 저 수백 명과 싸워 버틸 자신이 없다면 말이야.”

분지 삼면을 포위하고 내려오는 병사들을 노려보던 도현은 할 수 없이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북쪽을 향해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들을 잡아라!”

지하 유적지 앞에서 도망치는 셋을 향해 병사들이 석궁을 쏘며 악착같이 쫓아왔지만, 이미 상당히 거리를 벌린 발 빠른 도현과 노인, 거구의 사내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지의 언덕을 가볍게 넘어 한동안 평야를 달리다 숲에 접어든 그들은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며 뒤를 확인하다가 횃불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수풀이 무성한 공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숨을 돌렸다.

“대충 따돌린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노인과 거구의 사내는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렸음에도 별다른 지친 기색이 없었고, 도현 역시 어려서부터 길러 온 체력이 탄탄해서 홀로 숨을 헐떡이는 창피는 피할 수 있었다.

‘역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도현은 노인과 사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 속에 어떤 여유까지 느낄 수 있었다.

저 여유는 수백의 병사들에게 쫓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전을 불사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으니 조용히 떠나자는 그런 강자의 여유.

특히 금발의 파란 눈을 소유한 노인은 달리는 가운데도 어디선가 날아온 전서구의 편지를 어둠 속에서 읽으며 답장까지 해 주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옆에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한동안 이야기를 하던 그들은 도현이 기침을 한 번 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자네, 아직 안 갔나?”

노인의 무심한 말에 도현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은근히 챙겨 주는 듯했던 노인이 그의 자존심을 건든 것이다.

“인사나 하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 인사는. 그냥 가면 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뇨?”

“도둑들 말이야.”

“네에?”

도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왜 도둑입니까?”

“자네도 지하 유적지를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제가 말입니까?”

도현이 부인하자 거구의 사내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를 손바닥으로 크게 탕탕 치며 꾸짖듯 말했다.

“이 작자가 대장의 은혜도 모르고 거짓말을 해? 그럼 왜 병사들 싸움에 스윽 끼어든 거야? 무엇 때문에?”

“그게…….”

도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도 도둑이고 이 친구도 도둑이네. 우리끼리 있는데, 신분을 속일 필요가 있는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근처 바위 위에 엉덩이를 깔았다.

“전 도둑이 아닙니다.”

“그래, 아니라고 치세. 그런데 도둑치고는 검술이 제법이었어.”

노인의 우스갯소리에 거구의 사내가 껄껄대며 소리 내어 웃었다.

도현은 도둑이 아니라고 우기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차원을 이동해서 우연히 전투 현장에 떨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이곳 사정에 대해 어두우니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물고 마음을 비우는 게 최고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이들과 마주친 장소는 공교롭게도 지하 유적지 앞이었다.

이들이 왜 유적지로 들어오지 않았냐고 자신에게 물어 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혼자 돌아다니나?”

“네.”

“이제 어디로 갈 건가?”

도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보이는 건 어둠과 나무들뿐이었다.

여기 온 목적이 현실보다 길게 이용할 수 있는 시간과 검을 마주할 수 있는 실전 상대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어. 워낙 아는 것이 없으니.’

그라고 처음부터 완벽히 계획을 세워 놓을 수는 없었다. 일단 부딪쳐서 하나씩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이계에 온 것이다.

“특별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노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도현의 위아래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낮에 싸울 때 보니 검술도 뛰어나고, 홀로 지하 유적지를 노리고 올 만큼 배짱도 있고, 다만 위장을 하는 데 있어 정교함이 많이 떨어지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야. 어떤가? 특별히 갈 데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우리와 함께 행동하는 게?”

“도둑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도둑. 그게 어떻단 말인가? 자네도 도둑이지 않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노인은 말을 했다.

“뭐 해?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여야지!”

거구의 사내는 큰 선심을 쓰고 있는 사람처럼 손까지 저으며 도현에게 재촉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제안에 도현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꺼림 없이 동료가 되자는 제안을 하다니.

‘날 뭘 믿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도현은 이 사람들의 생각도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깊이 생각했다.

용기 있게 이계로 넘어왔지만, 당장 먹을 음식도 없었고, 가까운 마을이 어딘지,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이쪽 세계에 대해 파악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고, 정보를 나눠 줄 사람도 필요했다.

자신에게 동료가 되자고 제안을 한 노인과 거구의 사내는 생각에 잠긴 그를 놔두고 자기들끼리 다시 조용히 귓속말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받아들이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투였다.

‘도둑과 함께라.’

썩 끌리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한동안 이들과 다니면서 이쪽 세계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 볼 게 있었다.

“먼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뭘 말인가?”

거구의 사내와 얘기를 나누던 노인이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도둑질을 하는 데 독으로 수백 명의 병사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었습니까?”

“왜, 심해 보였나?”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적과 싸울 때 자네는 손에 사정을 두나? 자기 목숨이 걸려 있는데?”

“지하 유적의 보물을 차지하는 게 전쟁이라는 말씀입니까?”

“유적지를 터는 게 애들 장난인 줄 아나?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도현의 시선이 먼지 낀 작은 상자를 들고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 향했다.

수백 명의 목숨과 저것이 동급이라니. 그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의로운 척하지 마 꼴사나우니까.”

듣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툭 쏘아붙이며 도현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독에 죽은 그 병사 놈들은 악랄한 커딜 영주와 이안 영주의 병사들이었어. 그놈들이 개척 마을에 들어가서 약탈하고 방화를 하고 잔인하게 죽인 사람들의 수만 해도 수천 명은 넘을 거야.”

도현으로서는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시원하게 손봤다. 그 구하기 어려운 독을 다 사용해서. 우리가 뭐 잘못했나? 말을 해 봐.”

“그만하게.”

“대장, 이자가 우리를 탓하는 걸 못 느끼셨습니까?”

당장이라도 철퇴를 휘둘러 도현의 머리를 부술 기세로 사내는 눈에서 불을 토하고 있었다.

“자기만의 신념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나도 한때 그랬으니까.”

노인은 거구의 사내를 만류하며 도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네. 하지만 도둑인 내가 봐도 두 영지의 병사들이 개척 지역에 와서 벌인 짓은 좀 심했어. 자네도 여기까지 오면서 저들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을 게 아닌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노인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실은 머릿속 기억이 모두 희미합니다. 낮에 그 전투 현장에 제가 왜 끼어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네.”

도현의 대꾸에 거구의 사내가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손가락질을 했다.

“어디서 말 같지 않은 말을. 도둑이 도둑이 아니라고 하고,  정의로운 척이나 하고 말이야. 진실 되게 살아, 이 도둑놈아!”

도현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 둘러댔지만 노인과 거구의 사내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자신을 위장하는 기술은 아주 형편없어. 난 한눈에 봐도 자네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겠는데 말이야.”

노인은 미소를 머금으며 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오래 기다려 주지는 못하겠네. 결정을 하게. 함께 갈 텐가, 아니면 여기서 헤어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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