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디 임팩트 1권 24화
도현은 노인과 사내를 번갈아 보다가 잠시 후 말했다.
“중간에 헤어져도 됩니까?”
“그건 마음대로 하게. 우리 같은 도둑들에게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나? 대신,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내 지시를 따르게.”
“그렇게 하죠.”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도현은 수백 명을 죽인 배경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자 이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이계에서 와서 첫 인연이 도둑들이라니.’
도현은 속으로 나직이 웃으며 벌써 앞서가는 노인과 사내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이름이 뭔가?”
“도현이라고 합니다.”
“독특한 이름이군. 난 어베인이네. 이름을 불러도 좋고, 대장이라고 불러도 좋아.”
“내 이름은 짐브리오다.”
거구에 근육질인 그는 말을 하며 들고 있던 은이 든 상자를 도현에게 건넸다.
“서열상 나는 두 번째니까, 앞으로 짐 같은 건 네가 들어. 중간에 상자 들고 튀면 죽을 줄 알고.”
도현은 별말 없이 상자를 받았다.
짐브리오는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도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도둑이 부끄러운 직업은 아니야. 세상엔 우리보다 더한 놈들이 얼마든지 많잖아. 그러니 어깨 펴고, 다음부턴 당당히 도둑이라고 말을 하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자연스레 하는 짐브리오였다.
‘이들과 함께 다니기로 한 결정, 과연 잘한 것일까?’
도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숲을 통과해 북서쪽으로 한동안 길을 걷던 그들은 폭이 넓은 강에 도착했다.
강가에는 카누처럼 생긴 좁고 기다란 배 한 척이 달빛 아래 둥둥 떠 있었다.
‘만날 사람이 배 안에 있나?’
도현은 이번엔 어떤 사람이 나타날지 우려 반 기대 반이었다.
강으로 오는 도중 짐브리오는 그에게 까다로운 자를 만나게 될 테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넌지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배 안에 누워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천으로 만든 모자를 뒤집어쓴 그 사람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배 안의 노를 천천히 저어 강변에 배를 댔다.
배가 강 위에서 떠내려 가지 않고 둥둥 떠 있던 이유는 알고 보니 강가에 말뚝을 박고 줄을 연결해 뱃머리에 연결시켰기 때문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훌쩍 뛰어내려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수도사처럼 전신을 가리는 갈색 옷을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그 사람은 가까이 다가와서 모자를 벗었다.
뜻밖에도 짐브리오가 까다로운 자라고 경고까지 했던 인물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긴 금발에 푸른 눈의 그녀는 도현을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어베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누구예요?”
“새로운 동료. 현장에서 만났어.”
“그래요.”
그녀는 몸을 반쯤 틀어서 도현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자, 인사 나누게.”
어베인은 도현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는 어베인과 짐브리오가 현장에서 실무적인 일을 할 동안 배후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배신은 죽음이에요.”
로나는 짐짓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표정이 풍부한 여자인 것 같았다.
“조용히 떠나면 떠났지 배신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 마음에 드네요.”
살짝 미소를 보인 그녀는 어베인과 짐브리오를 둘러봤다.
“그런데 왜 빈손이에요? 보물은요?”
짐브리오는 도현이 들고 있는 상자를 받아서 그녀 발밑에 내려놨다.
“열어 봐.”
그녀는 상자 뚜껑을 뒤로 넘겼고, 달빛 아래 콩알만 한 은 조각들이 드러났다.
은 조각이 작은 상자 안에 가득했지만, 상자 안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져 갔다.
‘표정이 별론데.’
도현은 일그러지는 그녀의 표정 속에 그녀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느꼈다.
“이게 다예요?”
상자를 닫고 일어선 그녀는 짐브리오에게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그래. 아무리 찾아봐도 이것뿐이었어.”
“확실해요? 지난번처럼 비밀 공간을 찾지 못한 건 아니고요?”
“철퇴로 일일이 의심스러운 곳은 두드려 봤어. 확실해.”
“그럴 리가. 고대 사원을 발굴했는데, 겨우 나온 게 이것뿐이라고요?”
은이 든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어베인이 조용히 한마디 하며 지나쳤다.
“앞으로 정보에 신경 좀 써야겠어.”
대장이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이야기를 하고 배로 향하자 그녀는 화난 얼굴로 상자를 발로 걷어찼다.
“뭘 봐요!”
도현은 그녀가 째려보자 시선을 피하며 상자를 번쩍 들어서 어베인 뒤를 따라갔다.
짐브리오가 저 여자를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성격이 이상한 여자군.’
끼이익. 끼이익.
도현이 노를 저을 때마다 으스스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자마자 또 도둑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배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도현이 혼자뿐이었고, 남은 세 사람은 좁은 배 안에서 지도를 펴 놓고 다음 목적지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러 지명이 등장하고 로나와 짐브리오가 험악하게 말싸움도 하고, 중간에 가만히 있던 어베인이 그때마다 조용한 말로 둘을 떼어 놓고 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동료라더니 노 저으라고 데려왔나 보군.’
그들의 계획에 자신이 끼어들 상황은 아니지만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적어도 명확히 알아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그는 배를 좌우로 힘껏 흔들었다.
좁은 배는 바로 요동치며 뒤집어질 것 같았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모두의 시선이 도현에게 향했다.
“대충 정해졌으면 저도 좀 알아야겠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배에서 내려 모닥불을 피운 그들은 로나가 준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곧장 잠에 들었다.
하지만 도현은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안 자요?”
현장에서 일을 하고 온 어베인과 짐브리오가 잠을 푹 잘 수 있게 홀로 불침번을 서던 로나가 도현 옆에 앉으며 물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정말 기억이 안 나요?”
그녀의 질문에 도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까 배 위에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그녀는 음흉한 자라고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할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힘든 과거가 있었나 봐요. 기억하기 싫은 걸 보니까.”
모닥불을 바라보며 두 무릎에 턱을 꾄 그녀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누구나 그래요. 모두에겐 힘든 과거가 있다고요. 저기 코 골며 자는 짐브리오나 아버지 같은 어베인이나 알고 보면 다 그런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라고요.”
그녀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며 도현을 빤히 들여다봤다.
“당신이 보기에 나도 그런 힘든 과거가 있는 것 같죠?”
“…….”
“괜찮아요. 내가 항상 웃고 있으니까, 못 느끼는 게 당연해요.”
그녀는 혼자서 지레짐작하고서는 도현이 소지한 검에 시선을 두었다.
“근데, 어베인 말로는 검술이 상당하다던데 한번 구경할 수 있어요?”
“지금요?”
자고 있는 어베인과 짐브리오를 바라보자 그녀가 손짓을 했다.
“저 사람들 신경 쓸 것 없어요. 알아서 귀 닫고 잘 테니까요.”
그녀는 일어서더니 풍성한 겉옷 속에 숨긴 단검 두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도현을 내려다봤다.
“어서요.”
그녀가 단검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자 도현은 별수 없이 검을 빼 들고 그녀와 마주 섰다.
“조심해요.”
경고를 한 순간 그녀의 몸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도현의 시야에 검이 크게 들어왔다.
짧은 단검의 특성상 근접전 위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놀라운 스피드로 공간을 단축하며 어느새 도현의 눈앞에 다가와 씨익 웃으며 검을 휘두른 것이다.
“보기보다 실력은 그저 그런가 봐요?”
도현의 가슴과 목 한 치 앞에 검을 멈춘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뒤로 몸을 움직인 순간, 그녀가 입고 있던 겉옷의 가슴 부위가 열십자로 갈라졌고, 뒤이어 잘린 소매 부분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호검술 중 가장 빠른 쾌검식을 펼쳐 그녀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공격해 버린 것이다.
도현이 작정했다면 그녀는 이미 도현에게 검을 들이밀기도 전에 가슴과 손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잘린 소매와 십자로 갈라진 가슴 부위를 만져 보던 그녀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 하하,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네요.”
그녀는 표정 없이 서 있는 도현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 실력이 쓸 만합니까?”
“쓸 만해요.”
“그럼 부탁 한 가지 하죠.”
“부탁요?”
그녀는 귀밑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도현을 쳐다봤다.
“정말 기억이 안 납니다. 이곳이 어떤 세상인지도. 궁금한 게 많은데, 알려 주시겠습니까?”
검을 거둔 도현이 정중히 부탁을 하자 그녀는 팔짱을 끼며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부탁 정도는.”
배를 타고 강 하류에 도착한 그들은 작은 마을에 들러 말을 사고 3일을 달린 끝에 성곽 도시 ‘빌모르’에 도착했다.
‘굉장하구나.’
도현은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성곽의 길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벽의 높이는 작은 산을 보는 것 같았고, 길이는 그의 시야가 미치는 곳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왕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대영주 힉슨의 도시예요.”
로나가 도현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몬스터가 출몰하는 변경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키운 사람이죠. 큰 도시답게 여러 사람들이 모이고, 정보가 넘쳐 나요. 특히 우리 같은 도둑들에게 아주 유용한 정보들이.”
활짝 미소를 보인 그녀는 앞서 가는 어베인과 짐브리오를 따라잡기 위해 다시 말 허리를 세게 찼고, 도현 역시 곧이어 능숙한 자세로 말을 몰아갔다.
말을 탄 경험이 없어 3일 전만 해도 짐브리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을 보이며 말과 하나 된 듯 언덕 밑으로 이어지는 널따란 길을 따라 달려갔다.
말에서 내려 적은 통행세를 내고 빌모르에 들어간 그들 앞에 성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건물들이 나타났다.
석조와 목조로 된 건물들이 혼합된 도시 건물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넓은 길에는 마차와 사람 들이 뒤엉켜 자유롭게 다니고 있었다.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어베인을 따라가던 도현은 이들의 축성 기술이나 건축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관에 짐을 푼 도현은 이계에 넘어온 지 4일 만에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 볼 수 있었다.
온화한 기후답게 침대 위에 천은 얇았고, 부드러웠다.
혼자 방을 사용하게 된 도현은 모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단전호흡을 한 후 천천히 두 눈을 떴다.
20년을 수련해 얻은 미약한 내공이지만 그에게는 주춧돌같이 소중한 존재였다.
하늘처럼 높아 보이는 태선군 무예의 한 축은 바로 이 내공의 힘일 것이다. 그것도 추측컨대 엄청난 내공.
‘검을 수련하는 것만으로 내공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같은 경지에 올라 있다면 그 승패는 어쩌면 내공이 좌지우지할지 모르고, 그 점은 도현에게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일단 하나씩. 내게 있는 작은 내공이라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먼저야. 내공의 차이는 그다음에 생각하자.’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고 부드럽게 선을 이어 갔다.
좁은 방 안이라서 큰 동작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평소보다 조용한 움직임 속에 그는 깊은 검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만큼 심력을 쏟아 낸 그는 검을 가슴 쪽으로 거두며 수련을 마무리했다.
며칠간 저들과 함께 움직이느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검 수련 때문에 답답했는데, 그 답답함이 싹 사라져 버려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검을 칼집에 넣고 의자에 앉은 그는 땀을 식히며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을 응시했다.
‘몬스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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