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디 임팩트 2권 3화
“젠장, 머리 아파서 더 깊게 생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그다음은?”
도현은 의자에 앉으며 어베인과 짐브리오 이야기를 꺼냈다.
“크크, 졸지에 도둑이 돼 버렸네.”
그들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같이 일행이 되어 움직였다는 도현의 말에 용주는 수술 부위가 당겨서 아팠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아, 눈물 나. 미치겠다, 내가.”
“보통 도둑들이 아니야. 몸놀림도 굉장히 빠르고, 무예 솜씨는 어느 정도일지 추측이 안 돼. 특히 어베인은.”
도현은 나중에 헤어지기 전, 어베인과 한번 검을 겨루고 싶었다. 그가 응해 줄지 모르겠지만.
“그쪽은 어떤 세계야?”
“왕이 있고, 영주들도 있고 그래.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두 개의 대륙 중 한 곳으로, 다른 대륙을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고.”
도현은 로나로부터 짬짬이 들은 이계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로나라는 여자 예쁘냐?”
“아름다운 백인 여자라고 보면 돼. 성격이 좀 그렇긴 하지만.”
“정말 궁금하네. 어떤 세상인지.”
용주는 도현의 얘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상상을 멈추지 않았다.
“도둑들하고 같이 다녔으면 돈 될 만한 것도 많이 벌었겠네?”
은근히 기대를 하는 친구를 보며 도현은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내가 아까 전세금 빼서 돈 준다고 했겠어?”
“뭐야, 그럼 빈손으로 돌아온 거야? 아 자식, 보석이라도 좀 챙겨서 오지.”
실망하는 용주의 모습에 도현은 말없이 웃다가 호뮬리스 산과 몬스터에 관해 얘기를 해줬다.
“나 같은 놈은 가서 바로 늑대 밥이 되겠네. 세상에 그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지역이라니. 그런데는 얼씬도 하지 마라. 죽기 딱 십상이다.”
“아니, 오히려 잘됐어. 몬스터들을 상대로 실전을 얼마든지 치를 수 있으니까.”
“정신 나갔냐? 아무리 수련을 한다고 해도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하게.”
인상을 쓰며 말하던 그는 이어지는 도현의 말에 입을 쩍 벌리고 닫지 못했다.
“내공이 늘어?”
도현은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에 그려진 타투를 내려다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거대 늑대를 죽인 순간 타투를 통해 내공을 증진시키는 기운이 유입됐어.”
“잡을 때마다 내공이?”
“그래. 용주 너도 봤겠지만, 태선군은 단순한 무예의 깨달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어. 난 그게 막대한 내공의 힘이라고 봐.”
“이계에서 부족한 내공을 키운단 말이지. 검술 수련도 하면서.”
용주가 눈을 빛내며 묻자 도현이 소매를 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서 마음껏 해! 죽지만 말고.”
“난 그럴 자신이 있는데, 네가 문제다. 칼 맞고 이렇게 누워 있으니 말이야.”
도현이 다시 최 사장 이야기를 꺼내 들자 용주는 당황한 얼굴로 손짓을 했다.
“그만 넘어가자니까. 일 크게 만들지 말고.”
“…….”
도현은 깊은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다시 올게.”
“엉뚱한 짓 하지 마라! 알았지!”
‘돈이란 무엇일까?’
도복을 입고 정좌를 한 도현은 불 꺼진 도장 안에서 검과 씨름을 하는 게 아니라 뜻밖에도 돈의 가치를 두고 번민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가 문을 연 이 도장을 이 상태 그대로 유지하려면 뉴질랜드로 이민 간다는 건물주로부터 수십억을 주고 건물을 매입하는 수밖에 없다.
친구가 칼에 찔리고도 빚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도 돈이 없어서였다.
태선군을 향한 그의 검은 갈고닦으면 그만이었지만 돈이라는 건 또 다른 난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건물을 매입해 아버지의 땀이 깃든 장소를 보존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돈을 번다는 게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알고, 그 마음을 이미 반쯤 접은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 친구가 돈이라는 괴물에 치이는 꼴을 보자 돈 앞에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이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인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무사는 검으로 승부한다지만, 그건 옛말.
현실에서 그가 지키려는 많은 것들은 돈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해.’
도현은 오랜 시간 감았던 눈을 떴다.
사과 베기
도현이 병원에 다시 갔을 때는 2인실에 있던 용주가 막 6인실로 옮긴 직후였다.
“간신히 6인실 나서 옮겼다. 2인실 엄청 비싸.”
“몸은?”
“뭐 좋아지고 있지. 내가 재생력이 워낙 뛰어난 놈이잖아.”
용주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실실 웃자 옆에서 음료수를 따르던 김옥희가 핀잔을 줬다.
“조용히 못 해! 동네에서 수군거리고 난리야, 이 녀석아. 너 혹시 조폭 아니냐고.”
“동네 인심 하고는. 걱정은 못 해 줄망정.”
“네가 좀 뺀질거리고 다녔어야지! 강도라고 말해도 아무도 안 믿잖아! 도현아, 여기 음료수 마셔라.”
아들을 혼내던 그녀는 부드러운 어투로 도현에게 음료수 잔을 건넸다.
“와아, 나 주워 온 자식도 아니고. 너무 차별한다.”
“시끄러! 뭐 잘했다고 투덜대, 투덜대긴.”
그녀는 아들을 혼내다 목소리가 너무 커지자 다른 병상의 환자들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튼 너, 병원에서 퇴원하고 두고 보자.”
엄마가 나가자 용주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도현을 올려다봤다.
“아, 힘들다 정말.”
“어머니가 더 힘드시겠지.”
도현이 옆에 앉으며 하는 말에 용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 그렇게 눈물 많은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날보고 펑펑 우시는데, 후우.”
“많이 놀라셨을 거야. 근데, 최 사장한테는 전화 없었어?”
도현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아, 그 얘기 안 했구나.”
용주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전화가 왔어. 어제만 해도 천만 원은 받아야겠다고 했잖아. 근데 그냥 없던 걸로 하재. 거기에다 치료비까지 자기가 다 내겠다지 뭐냐.”
“그래?”
도현은 빈 음료수 잔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잘됐네.”
“거봐라. 눈 한번 딱 감고 서로 허물 한 번씩 보듬어 주면 이렇게 되잖아. 사실 나도 돈 빌린 입장에서 아주 떳떳한 건 아니었거든.”
“그래서 칼에 찔려도 된다는 거야?”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확 다 엎어 버리고 싶은데, 그럼 끝이 뻔히 보이잖아. 태선군 그 자식에게 복수하기 전까지는 내가 네 옆에서 든든히 있어 줘야 하고.”
도현은 말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다가 주인댁에 들렀어.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여윳돈이 있었는지 바로 전세를 월세로 전환해 주시겠다고 하더라.”
“뭐?”
“월세 보증금 제하고 나면 5,000 가까이 남게 될 거야. 그 돈으로 남은 다른 빚 싹 정리해.”
“야, 도현아!”
“내일 또 올게.”
도현은 억지로 일어서려는 친구를 강제로 눕히고는 다른 소리 하기 전에 얼른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용주는 악착같이 일어나서는 병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친구를 향해 소리쳤다.
“돈 필요 없어 새끼야! 내가 왜 네 돈을 받아!”
“이놈이 미쳤나. 왜 밖에서 지랄이야!”
휴게실에서 나오던 김옥희는 아들이 복도 통로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자 영문도 모른 채 아들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엄마, 그게 아니라 도현이가요.”
“가서 얌전히 안 누워!”
“아니, 그게 아니라 도현이가…… 씨이,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용주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얼른 닦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너 지금 우니?”
“아니요. 울긴 누가 울어요. 저 좀 잘게요.”
가진 재산 중 제일 큰 부분이었던 전세금을 친구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지만 도현은 아깝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형제와 같은 진한 우정과 의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도현은 차에서 내려 도장으로 걸어갔다. 지저분한 도장 출입구와 문을 본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도 많이 생기고, 도장을 조만간 비워 줘야 한다는 생각에 관리가 조금 소홀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 계단에서부터 시작한 청소는 도장 안 모든 집기와 바닥을 깨끗이 쓸고 닦는 일로 번졌다.
8월 말,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도현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갔다.
그렇게 청소를 하고 있는데,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나타나 도장 안을 기웃거렸다.
“저어 실례합니다만 여기가 호검술 도장 맞습니까?”
입구에서 등을 돌리고 청소에 열중하고 있던 도현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뒤를 돌아다봤다.
모자를 쓴 귀여운 얼굴상의 젊은 여성과 30대로 보이는 사내가 입구에 서 있었다.
“네, 맞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신지?”
“백도현 관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백도현인데요.”
도현이 다가오자 사내는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케이블 방송국 백두TV에 이호선 PD라고 합니다.”
“백두TV요?”
사내의 명함을 잠시 살피던 도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무예에 관한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데요,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제게요?”
도현은 어리둥절했다. 아버지가 문을 연 호검술 도장은 그리 유명한 곳도 아니었고, 자신을 꼭 짚어 찾아온 것도 어딘지 좀 이상했다.
“절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부산의 충덕관 관장님이 소개해 주시더군요.”
“충덕관이라면 김인호 관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충덕관의 김 관장은 아버지의 지인 중 한 분으로 그도 몇 차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조용히 치러진 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와 그를 깊이 위로해 주고 간 분이기도 했다.
도현은 청소 중이라 어수선 한 도장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안이 지금 이렇습니다. 길 건너 2층에 커피숍이 있는데, 거기서 말씀 나눌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거지?”
도현은 부산의 김 관장에게 전화로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일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떡하죠?”
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쉬는 김 작가에게 이 피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어떡해. 그냥 편집해서 방송해야지.”
“성공하는 장면이 들어가야 화제가 될 텐데요.”
“한번 보자고. 충덕관 관장님이 추천을 해 줬잖아.”
“너무 젊잖아요. 나이도 저랑 거의 차이 안 나는 것 같은데요. 검 수련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어요. 몸매도 좋고 얼굴은 잘생긴 것 같긴 하지만.”
그녀는 훤칠한 도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름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근데 저 정도 외모를 갖춘 젊은 검객이 멋있게 그 장면을 성공시킨다면 대박일 것 같지 않아요? 예고편에 팍팍 보여 주고, 여자 시청자들도 끌어 들이고.”
“그렇긴 하지.”
커피숍의 에어컨 바람에 더위를 식히며 프로그램 걱정을 하던 그들은 도현이 보이자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도현은 반듯한 자세로 앉으며 김 작가와 이 피디를 응시했다.
호검술 도장의 관장으로서 그가 지켜야 할 적절한 무게와 선이 존재했고, 그건 도장을 연 아버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예의였다.
범접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바라보는 도현의 시선에 이 피디와 김 작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 청소 도구를 들고 얘기를 나누던 그 사람인가 싶었다.
백두TV의 이 피디는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코너 중에 ‘최강의 검객을 찾아 나서다’라는 게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검의 고수를 찾아 인터뷰도 하고, 그분들의 실력도 카메라로 담고요. 그리고 그분들이 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배경도 좀 터치하고요.”
설명을 하는 피디의 얼굴은 검게 타 있었다.
아마도 검의 고수를 찾아 더운 여름날 전국을 돌아다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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