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디 임팩트 2권 4화
“그런데 저희에게는 한 가지 미션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미션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검의 고수를 찾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아 물론, 검도인들을 희화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검의 고수도 실재한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니까요.”
“잠시만요.”
프로그램 성격에 대해 길게 얘기를 듣던 도현이 손을 들어 그의 이야기를 막았다.
“혹시 출연 요청을 하시려고 온 겁니까?”
“네? 아, 네 그렇습니다. 저희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시겠습니까?”
도현은 무예 특집 프로그램이라는 아까의 말에 호검술의 유래에 대해 취재를 왔나 싶었다. 한데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어렵겠습니다.”
“소정의 출연료도 드리고, 방송 뒤 홈페이지에는 관장님의 도장 위치와 전화번호가 나갈 겁니다. 도장 운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도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한 번쯤 고려해 봤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부러 찾아오신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이 피디는 난감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김 작가를 쳐다봤다. 부산에서 제법 실력 있다고 알려진 종합 무술인인 충덕관의 관장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눈앞의 백도현이었다.
그냥 이대로 물러가자니 그의 검술 실력이 더욱 궁금해졌다.
“백 관장님 잠시 이것 좀 봐 주시겠습니까?”
그는 김 작가가 건네는 노트북을 도현이 잘 볼 수 있도록 위치를 조정했다.
“일본에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상입니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노트북에서 나오는 동영상에 흥미가 생겨 그대로 지켜보았다.
눈을 검은 천으로 단단히 가린 중년의 검사가 숲 공터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고요한 정적 뒤에 그는 뒤에서 날아오는 주먹만 한 사과를 향해 번개와 같은 빠르기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두 조각이 난 사과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번엔 그의 왼쪽 측면에서 다시 사과가 날아왔고, 이번에도 역시 검사는 가볍게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며 사과를 반으로 잘라 버렸다.
두 눈이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날아오는 사과를 정확히 잘라 내는 그의 검술 솜씨는 보기에도 경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던지는 사과를 그는 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모조리 좌우로 튕겨 내 버린 것이다.
어떤 사과도 철벽처럼 막아 내는 그의 검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상당한 수련을 쌓은 자군. 눈을 가리고도 날아오는 사과를 정확히 잘라 냈다는 건 귀가 예민할 뿐만 아니라 기감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데.’
날아오는 사과의 빠르기가 느린 편에 속하기는 해도 정확히 위치를 잡아내고 잘라 낸다는 건 어지간한 검도 고수도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자신의 몸에 다가오는 어떤 사물의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기 때문이다.
검을 오래 수련하다 보면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덤벼드는 모든 외부적인 요소에 온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일어나 반응을 일으키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살기를 느꼈다는 말로 통할 때도 있고, 더 나아가 자연이 뿜어내는 기와 교류를 하는 기감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도 한다. 수많은 시간 동안 수련한 끝에 외부의 기를 느끼는 것이다.
경지가 높으면 기감의 범위는 더욱 늘어나고, 그 정확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외부의 기를 느끼는 단계에서 벗어나 체내로 그 기운을 담아내면 그것이 곧 내공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이미 외부의 기를 느끼는 기감의 단계는 오래전 깨쳤고 내공을 형상화한 경지에 올랐다.
비록 아직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했지만.
동영상 속 검사의 솜씨가 상당했지만 아주 놀랍지 않은 이유도 이미 그 경지를 오래전에 넘어온 그였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피디의 물음에 도현은 담담히 답했다.
“훌륭하군요.”
“백 관장님도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도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고 하면 귀찮아질 것 같고, 못한다고 하면 호검술의 명예가 떨어질 것 같았다.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충덕관 관장님께서는 이 동영상을 보시고 백 관장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이미 프로그램 촬영은 다 끝났는데,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고요.”
이 피디는 말을 하면서 같이 온 작가에게 눈짓을 했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백 관장님.”
갑자기 김 작가가 고양이 목소리를 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도 이런 걸 할 수 있는 검의 고수가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요?”
“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검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찾아가세요. 저는 방송에 출연할 뜻이 없습니다.”
여자 작가가 아무리 불쌍한 척해도 도현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 관장님! 백 관장님!”
커피숍을 나가는 도현의 등 뒤에서 애타게 도현을 찾던 이 피디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이도 어린 자식이 개폼은 다 잡고 가네. 에이, 빌어먹을.”
도현이 입도 안 된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김 작가. 가자.”
“어딜요?”
“어디긴 호검술 도장이지. 다리라도 붙잡고 애원해 봐야지.”
“피디님은 백 관장이 두 눈 가리고 사과를 샤샥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몰라. 모르니까 더 궁금하잖아!”
‘끈질긴 사람들이네.’
도장 출입구 앞에서 몇 시간째 서 있는 케이블 방송국 백두TV의 이호선 PD와 김유진 작가 때문에 도현은 머리가 아팠다.
몇 번을 거절해도 그들은 제발 한 번만 출연해 달라며 도장 입구에서 시위 아닌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마음을 비우고 대청소를 했는데, 그 기분을 제대로 만끽할 수도 없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도장 한가운데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그는 도장 문이 열리는 기척에 두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관장님, 관장님! 잠시 얘기 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시간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김유진이 고개를 들이밀고 저러는 것이다.
쿵!
도현이 번쩍 눈을 뜨며 손바닥으로 도장 바닥을 내려치자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김유진이 얼른 문을 닫고 계단 위로 도망갔다.
“왜 그래?”
도장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 맨 위에서 담배를 피우던 이 피디가 겁에 질려 올라온 김유진을 보며 물었다.
“손으로 바닥을 팍 내려치는데! 그 소리가 엄청나요.”
“그래?”
“저 사람 뭔가 한 수가 있다고요.”
“그럼 포기할 수 없지. 어떡하든 출연시키자고.”
“근데 이런다고 될까요?”
김유진은 득도한 고승처럼 앉아 있던 도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쉽게 함락될 대상이 아니었다.
“해 보는 데까지 해 봐야지.”
이호선은 시계를 봤다.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 간다.
“배고프지?”
그의 물음에 김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 저 사람 도장 닫고 집에 가면 그때 밥 먹자.”
“그래요. 곧 집에 가겠죠.”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도현은 도장 안에서 꿈쩍도 안 했다.
자정이 넘어 어느덧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가자 그들의 인내심도 서서히 말라 갔다.
“일부러 안 나오는 거야. 지면 안 돼.”
“하지만 피디님, 저 너무 배고파요. 저기 편의점 가서 빵이라도 좀 사 올게요.”
“우리가 여기 서서 먹는 꼴을 보이는 순간, 백 관장은 우리의 의지를 의심한다. 우리가 고통받는 만큼, 그도 압박을 받게 되어 있어.”
이 피디는 빈 담뱃갑을 우그러트리며 이를 악다물었다.
도장에서 편히 잠을 자고 일어난 도현은 가볍게 몸을 풀며 도장 밖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 시간이라 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쪼그려 앉은 그들은 도현이 보이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셨어요?”
김유진의 인사에 도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이 휘청거렸다.
설마 했는데,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것이다.
도현은 밤사이에 핼쑥해진 그들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세요.”
“두 분이 아무리 그러셔도 제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출연하지 않아요.”
도현이 준 커피를 마시던 이 피디와 김 작가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나가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도현의 이어지는 말에 그들은 재빨리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요?”
이 피디가 뒷말을 재촉했다.
“제 신분을 감춰 주시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굴 모습도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요. 그리고 오직 그 동영상 속의 모습만 재현하는 걸로 끝을 낼 겁니다. 인터뷰도 없고.”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는 환한 얼굴로 동시에 답했다.
“감사합니다, 백 관장님!”
그들 입장에서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었다. 화제가 될 만한 영상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 것이다.
“그럼 언제 촬영을…….”
“내일 오전이 좋겠습니다.”
웃으며 도장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도현은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송국 사람들도 정말 대단하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독하게 마음먹으면 그들이 하루가 아니라 1년을 도장 앞에서 밤을 지새운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그였지만, 생각해 보니 아버지 지인인 부산의 김 관장이 자신을 추천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부친의 장례식에 찾아와 마음 깊이 위로를 해 주던 그가 굳이 방송국 사람들에게 자신을 추천한 것은 아마도 도장을 운영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을 것이다.
그 점이 결국 도현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 요인이었다.
“TV 출연이라.”
도현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피식 웃으며 입고 있던 도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타투는 아직 검은색이었다. 이계로 넘어가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만 했다.
방송 촬영 장소는 서울 근교의 인적이 드문 한 숲이었다. 연출자인 이 피디는 배경으로는 꽉 막힌 실내보다 야외가 좋고, 분위기도 더 산다며 도현을 직접 차에 태워 이곳으로 왔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은데?’
도현은 현장에서 기다리는 스태프의 수를 보며 살짝 당황을 했다.
조용히 카메라에 담아 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조명에 여러 대의 카메라까지. 거기에다 음향팀으로 보이는 스태프들도 있었다.
“조금 신경을 썼습니다. 좋은 그림을 잡으려고요.”
이 피디는 웃는 낯으로 말하며 검을 휘둘러도 지장이 없을 정도의 공터에 도현의 위치를 잡아 줬다.
“여기서 동영상에서 본 그것을 재현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갈까요?”
도현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곳에서 마치 자신의 무예를 자랑하듯이 펼쳐야 하는 이 상황이 다소 불편했다.
병원에 있는 용주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보여 주고 신분도 밝혀서 이름을 날리자고 했지만, 마음이 가질 않았다.
“연습 없이요?”
이 피디가 걱정을 하며 물었다.
“네, 바로 가죠.”
도복 차림의 도현은 도장에서 가지 온 검을 뽑아 들며 간단히 대꾸했다.
“그럼 사과가 날아올 방향이라도 대충 알려 드릴까요?”
이 피디가 손에든 종이로 입을 가리고 작게 속삭이자 호흡을 가다듬던 도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 피디님.”
“아, 아닙니다. 그냥 해 본 소립니다. 우리 방송은 리얼이니까요. 그대로 해야죠, 하하하. 그럼 바로 촬영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서둘러 뒤로 물러난 이 피디는 스태프들에게 촬영 준비를 시킨 후 김 작가 곁으로 다가왔다.
“자식이, 실패만 해 봐라.”
“실패하면 큰일 나잖아요. 스태프들도 지원받아서 왔는데요.”
“그럼 우린 완전히 놀아난 거지. 저 백 관장의 허세에.”
“제발 성공해야 하는데.”
김유진은 조명과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는 단정한 도복 차림의 도현을 보며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일본의 그 동영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검의 고수를 찾는 미션이 성공이냐 실패이냐는 잠시 후 결정이 난다.
“자!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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