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디 임팩트 2권 5화
이 피디의 외침에 현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전에 사과가 어디서 날아올지 언급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도현은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숲을 배경으로 한, 수려한 외모의 젊은 검객이 검을 늘어트리며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멋스러운 그림이 되었다.
그 그림 속으로 사과 하나가 불쑥 날아왔다.
도현의 검이 반원을 그리며 왼쪽으로 부드럽게 흘러갔다.
사악.
사과가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선명한 소리가 붐 마이크를 거쳐 음향팀에 전달됐고 ‘설마 가능할까?’라며 회의적인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던 현장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좋았어!’
‘만세!’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도현이 왼쪽 측면에서 날아오는 사과를 단번에 잘라 내자 입을 가리며 서로 기뻐했다.
그 기쁨은 도현이 날아오는 사과를 계속 잘라 내자 더 커졌고, 급기야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던져 내는 사과들을 도현이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다 막아 내자 절정에 이르렀다.
어느덧 도현의 주변에는 잘린 사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도현은 사과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자 눈을 가린 천을 풀었다.
전면에 그를 괴롭혔던 이 피디와 김 작가를 비롯해 다른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까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됐습니까?”
도현이 다가와서 묻는 말에 이 피디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조명에 카메라까지 더 많이 붙였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어떤 속임수도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도현이 감각만으로 날아오는 사과를 다 막아 낸 것이다.
“대단합니다, 백 관장님!”
“최고였어요!”
자신을 출연시키기 위해 밤을 새운 이 피디와 김 작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계속 칭찬을 늘어놓자 도현은 더 듣기가 민망했다.
“약속대로 방송에는 제 얼굴이 안 나갔으면 합니다.”
도현이 뒤돌아서자 이 피디가 서둘러 따라왔다.
“저어, 백 관장님, 제가 볼 때에는 관장님 외모를 가리고 방송에 나가면 뭔가 좀 아쉬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방송만 잘 타면 일반인도 스타가 되는 게 어렵지 않은 세상이거든요. 관장님은 나이도 젊으시고 외모와 키도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할 스타일입니다. 더구나 이런 뛰어난 검술 솜씨라면 더더욱요.”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하지만 정말 백 관장님은 방송인으로 진출하셔도…….”
도현을 설득하던 이 피디는 도현이 검을 뽑는 시늉을 하자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부산의 김 관장님이 아니었다면 촬영에 임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도현의 무거운 눈빛에 이 피디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렵게 얻은 영상이라도 방송에 내보내려면 그의 심기를 더 이상 자극하면 곤란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백 관장님.”
“방송은 언제 나온대?”
“다음 달 둘째 주 금요일에.”
“젠장, 내가 따라갔어야 하는데.”
입맛을 다신 용주는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계에는 언제 갈 거야?”
“내일.”
“그 도둑들하고 합류하겠네?”
“이번 일까지는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도움받은 것도 있고.”
“조심해. 너무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고.”
“알았어. 그리고 여기.”
도현은 도장과 통장을 꺼내서 용주의 손에 들려 줬다.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고 남은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이었다.
“괜찮다는데도.”
용주가 인상을 쓰며 통장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도현은 끝내 통장을 넘겨주었다.
도둑들
허공에 발이 뜬 상태로 멈춰 있던 도현의 몸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가볍게 착지하며 주위를 쓸어 본 도현은 손에 흙을 묻혀 얼굴에 발랐다.
‘비슷해졌겠지?’
얼굴이 너무 깨끗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도현은 잠시 수풀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베인과 짐브리오, 로나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아 있었다.
처음엔 낯설었던 세상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자네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군.”
어베인의 말에 도현은 움찔했다.
이계에 오기 이틀 전부터는 샴푸나 비누를 이용하지 않고 물로만 몸을 씻었고, 스킨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다른 점을 발견한 걸까.
“그래요? 전 모르겠는데요.”
도현이 침착하게 말을 받으며 자리에 앉자 짐브리오가 웃으며 크게 말했다.
“똥 싼 놈이 자기 몸에 묻은 냄새를 알까. 안 그렇습니까, 대장? 크하하하!”
“흐음.”
어베인은 도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내가 맡은 냄새가 구린내였나 보군.”
도현은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고기 굽고 있는데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고요. 지저분하게.”
로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낮에 마련한 몬스터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놨다.
식욕을 자극하는 고기 특유의 익는 냄새 대신 역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갔다.
‘지독한 냄새야. 저걸 정말 먹겠다는 건가?’
도현은 짐브리오를 쳐다봤다.
그는 빌모르를 떠날 때 가득 준비해 온 육포를 가방에서 꺼내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직 안 구워졌나?”
“고기가 좀 질겨 보여요. 맛있게 익혀서 줄게요.”
로나와 짐브리오가 끝까지 몬스터 고기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에 도현은 어이가 없었다.
사실 누가 봐도 먹을 게 아니라는 건 다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악착같이 먹어 보라고 권하는 로나나 먹을 수 있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짐브리오나 대책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현은 가방에서 육포를 꺼내 입에 물고는 과연 이들의 싸움 끝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기로 했다.
“자, 다 됐다. 먹어 봐요.”
로나가 넓은 나뭇잎 위에 몬스터 고기를 담아 짐브리오에게 내밀었다.
“오래도 걸리는군.”
씹고 있던 육포를 퉤하고 뱉어 낸 짐브리오가 태연한 얼굴로 고기에 손을 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어베인이 고기를 낚아채서는 등 뒤로 보이는 협곡에 던져 버렸다.
“둘 다 장난은 그쯤했으면 됐어. 모닥불 끄고 출발하자고.”
“아니, 대장!”
로나와 짐브리오가 둘 다 욱하며 일어섰지만 어베인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꼭 먹이고 말겠어!”
로나가 약이 오른 표정으로 어베인의 뒤를 따라가자 짐브리오는 모닥불을 끄며 도현에게 조용히 말했다.
“독한 년. 끝까지 먹이려고 하는 것 좀 보라고.”
“진짜 먹으려고 했습니까?”
“옆에서 보기에 어떻게 보였나? 망설이는 표정이 들통 나진 않았지?”
흐흐 하며 웃는 짐브리오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도현도 가볍게 따라 웃고 말았다.
몬스터가 출몰하는 산이라고 해서 산짐승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풍부한 느낌이었다.
소리를 죽이며 은밀히 산을 수색하는 그들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는 멧돼지들이나 산양들이 적지 않았고, 산새들은 부엉이도 아닌데 밤에 잘도 돌아다니며 소리 내어 울었다.
“몬스터가 다 잡아먹진 않았나 보군요.”
도현의 낮은 목소리에 앞서 걷던 로나가 고개를 돌려 작게 속삭였다.
“몬스터는 산짐승들을 먹지 않아요.”
“그럼?”
“인간을 먹을 뿐이죠.”
로나는 으스스하게 말을 하다가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사실은 산짐승도 다 잡아먹어요. 다만 자주 먹는 편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네에.”
도현은 묻고 싶은 게 더 있었지만 앞서 가는 어베인과 짐브리오가 가파른 산길을 타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다.
달빛만으로 깊은 산중을 돌아다니는 건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어서 방심할 수 없었다.
시야가 잘 확보된 낮에 수색하는 게 안전하고 좋을 듯했지만 도현의 생각과 달리 어베인은 낮이나 밤이나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매끄러운 동작으로 일행의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도둑들에게 정해진 잠이란 없네.”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도현이 잠은 안 자고 계속 밤새워 수색을 할 거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도현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잠에 대해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새벽이 오도록 산을 수색하는 이 기세는 며칠은 더 이어질 것 같았다.
‘도둑도 피곤한 직업이군.’
쓴웃음을 짓던 도현은 어베인과 짐브리오가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몸을 숙이고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자, 로나와 함께 서둘러 그들의 뒤편으로 다가갔다.
‘저건?’
경사가 급한 깊은 골짜기에 거대한 동굴 입구가 존재했고, 그 주변으로 몇 개의 천막과 경비를 서는 사내들이 보였다.
달빛에 드러난 경비들의 수는 얼추 20여 명 가까이 됐고, 모두 철저히 무장을 한 모습이었다.
“찾았어.”
로나가 기쁜 얼굴로 작게 속삭였고, 도현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동굴 입구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베인이 추적하고 있는 거상의 유적지 발굴 현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뒤로 가지.”
어베인의 지시에 일행은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골짜기 주변에서 후퇴를 한 어베인은 물을 한 모금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어.”
“그러게 말입니다, 대장. 저 동굴 안에서 발굴이 이뤄지고 있겠지요?”
짐브리오는 음흉한 미소로 화답하며 철퇴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다 때려죽이고 물건을 훔치려는 악당의 모습이었다.
“위치를 파악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지.”
어베인은 느긋한 태도로 말을 했다.
“누가 들어가서 안에 진행 상황을 파악해야 될 것 같아요. 그래야 계획을 세워서 유적의 보물을 빼 오죠.”
말을 하는 로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그래야겠지.”
어베인은 대꾸를 하며 한쪽에 서 있는 도현을 응시했다.
“자네, 들어가서 저들의 진행 상황 좀 알아 오게나.”
“제가 말입니까?”
도현이 살짝 당황하며 말끝을 흐리자 짐브리오가 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 왜 이래? 간단하잖아?”
옆에 있던 로나도 가세했다.
“맞아요. 어렵지 않아요. 조용히 들어가서 염탐하고 나오는 거잖아요. 경비를 서는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엿듣고, 동굴 안에 몰래 들어가서는 안에 발굴이 어느 정도로 이뤄졌는지, 지형은 어떤지 파악하는 거예요. 들어 보니 정말 간단하죠?”
‘그게 간단한 건가?’
황당한 도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히 말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동굴 안에 들어가서 발굴 진행 정도를 제가 어떻게 파악하겠습니까? 전 유적에 대해 보는 눈이 없습니다.”
“도둑이 그런 공부도 안 하고 다녔나?”
짐브리오가 혀를 차며 도현의 짧은 지식을 지적했다.
“안 되겠습니다, 대장. 제가 다녀오죠.”
“그럼 그렇게 하게.”
짐브리오는 등에 진 짐과 철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곧바로 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같이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짐브리오 혼자 보내는 게 미안했는지 도현이 어베인을 쳐다봤다.
“저런 일은 인원이 늘수록 발각될 위험이 더 증가하는 법이라네. 그냥 그에게 맡기면 돼.”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서 그쪽 분위기를 지켜보겠습니다.”
“정 걱정이 되면 그렇게 하게.”
어베인은 자리에 앉으며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랑 같이 가요. 기다리기 심심한데.”
로나가 도현의 뒤를 따랐다.
짐브리오는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아 덩치에 걸맞지 않게 신속히 움직이고 있었다.
경비들의 시선을 피해 천막까지 접근한 그는 칼로 천막에 살짝 구멍을 낸 다음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대담하게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횃불을 들고 경비가 지나갈 때면 놀라운 공중 도약 능력으로 천막 주변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천막과 경비 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다가 동굴 주변에 포진해 있는 경비들의 시선을 돌 하나로 간단히 돌려놓은 다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든 장면을 맞은편 골짜기 위에서 지켜보던 도현은 감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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