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8화 (38/575)

[38] 디 임팩트 2권 13화

“왜 대답을 안 해요? 싫어요?”

“그럴 리가요.”

“그럼 상해에서 내게 노트를 돌려주던 날, 왜 그렇게 말한 거예요?”

도현은 갑자기 손발이 어지러워져 그녀의 검을 막는 대신 뒤로 물러나는 데 급급했다.

홍영은 그런 도현을 계속 쫓아가며 공격을 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나 알고 있는 거예요?”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홍영 씨.”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잠이 오던가요?”

그녀의 검이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당신 진짜 마음이 궁금해요. 내가 한국에 오는 게 좋아요, 싫어요. 사실대로 말해 봐요.”

작정하고 찾아온 듯 그녀의 말은 검보다 매서웠다.

“시, 싫을 리가 있겠어요.”

도현은 허둥대며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네.”

도현은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그녀의 검을 피하지 않으며 대꾸했다.

퍼억!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은 도현의 모습에 홍영의 눈이 커졌다.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피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는데, 피하지 않았다.

미안함과 당황함이 서린 표정으로 그녀는 도현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도현 씨.”

“대련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아요. 그렇죠?”

“왜 안 피했어요?”

“한 대 맞아야 끝날 것 같아서요.”

도현의 따뜻함이 깃든 눈빛에 홍영은 얼굴이 붉어졌다.

“많이 아프죠.”

“하나도 안 아파요.”

“거짓말…….”

고개를 살짝 숙이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요염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며 가슴이 두근거린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중학교 때부터 품어 왔던 풋풋한 연정이 달콤한 키스로 이어지려는 순간, 근처에 놔둔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야릇한 분위기에 취해 서로 이끌리던 둘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전화가 왔어요.”

그녀의 말에 도현은 바닥에 있는 목검을 줍는 척하며 얼른 대꾸를 했다.

“네, 전화가 왔네요. 받아야죠.”

“받으려고요.”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가방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꺼내 귀에 댔다.

상해 지사장이자 회사 사장의 아들인 김탁훈이었다.

잠시 통화를 하고 돌아선 그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 봐야겠어요. 시간이 남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회사 전화예요?”

“네. 지사장님과 왔거든요. 그분이 본사로 함께 가야 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지사장이라면 홍영 씨를 한국 본사로 추천해 줬다는 그분요?”

“맞아요.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그녀는 샤워실과 붙어 있는 탈의실로 향했다.

“언제부터 한국에서 일해요?”

홍영과 함께 도장 밖으로 나온 도현은 택시가 다니는 도로로 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다음 달부터요.”

“살 집은요?”

“도현 씨 집에서 함께 살까요?”

“네?”

“농담이에요.”

몸이 경직된 도현을 보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조금 전 도장에서의 일 이후 둘은 전보다 훨씬 친밀해져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금이 좀 나와요. 거기에 돈을 조금 보태서 오피스텔을 계약하려고요.”

“네에.”

“도현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뭐를요?”

“직업 말이에요. 도장은 운영 안 한다고 했잖아요. 생각해 둔 일은 있어요?”

도현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직 생각 중이에요.”

이계에서 몬스터 사냥을 하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홍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저 앞에서 빈 택시가 다가오자 손을 흔들었다.

택시에 오른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 도현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 영화도 보고 한강에도 가요.”

“그래요.”

“갈게요.”

택시는 출발했고 뒤에 홀로 남은 도현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멀어지는 택시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전 도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태선군도 아버지의 복수도 의식적으로 밀어냈다. 그저 둘 사이에 오갔던 기분 좋은 감정의 교류를 잠시라도 더 음미하고 싶을 뿐이었다.

도현은 모처럼 검을 내려놓고 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검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나아가 가벼운 상대는 검 없이 제압하는 것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려서 많은 격투술과 체술 서적을 읽고 수련까지 겸했던 그는 사실 권법의 대가들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실력을 갖춘 지 오래다.

하지만 등선궁에서 태선군이 보여 준 신묘한 몸동작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손동작은 감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당시 그가 호검술을 극성으로 펼치며 최선을 다한 검을 그는 너무도 쉽게 피하며 들어와 가볍게 그의 가슴에 일격을 날렸다.

멀쩡히 두 눈을 뜨고도 그의 일격을 피하지 못한 이유는 빨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없이 느리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그의 가슴에 툭 하고 충격을 준 것이었는데, 그의 몸은 어느새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계에서 실전을 겪고 스스로 내공 사용법을 터득하는 과정 중에 전체적인 무학의 경지가 오른 도현은, 사실은 그것 또한 아니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피할 방위를 사전에 차단하면서 다가왔던 거야, 그의 손은.’

도현은 태선군이 펼쳤던 손동작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마치 자신이 태선군이라도 된 것처럼 연습을 했다.

그의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원리를 파악해서 다음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주먹이 허공에 수없이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공이 손에 주입되자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한밤의 도장 안을 가득 메워 갔다.

퍼버버벅! 퍽퍽퍽!

‘아니야, 그의 손동작은 이렇게 요란하지 않았어. 부드럽게 다가와 단 한 번의 주먹으로 마무리한 거지.’

도현은 힘이 들어간 몸을 부드럽게 풀어 주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비가 날듯 부드럽게 움직이면서도 상대방이 어디로 움직이든 그 앞에 버젓이 기다리고 있는 능청스러운 주먹.

새벽이 다가도록 그는 나름대로의 원리를 세우고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검술도 아닌 태선군의 손동작에 몰입해 도장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명상 도중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에 머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바로 그거야!”

도현은 옆에 놔둔 검을 뽑아 목각 인형을 겨눴다.

그의 손목이 살짝 움직인 순간, 목각 인형의 좌우로 수많은 검의 잔영이 나타났다.

쉬쉬쉭! 쉬쉭!

도현이 내공을 끌어 올리자 검의 잔영은 더욱 늘어나 목각 인형의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고, 도현이 정신을 집중하며 손목의 움직임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순간 검의 잔영들이 사라지며 오직 단 하나의 검이 나타났다.

그 검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며 목각 인형의 가슴에 딱 달라붙었다.

‘출!’

도현이 호검술 12식을 펼쳐 검에 내공을 싣자 목각 인형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하아, 하아.”

도현은 단전이 텅 비는 느낌과 함께 현기증이 핑 왔다.

안색이 창백해진 그는 그대로 도장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검의 잔영들을 하나로 모으고 작은 검기를 펼치는 데 그의 모든 내공이 소진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드디어 알아냈다. 태선군의 손동작이 왜 그렇게 보였는지 알아냈어! 하하하하!”

간단한 손동작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손동작을 촌각의 시간에 만들어 상대방을 그물처럼 감싼 다음, 종국에는 하나로 만들어 상대방을 일수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도현이 마지막에 호검술 12식을 이용해 검기를 방출했듯이, 태선군은 손바닥을 통해 기를 방출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자야. 검으로 이렇게 펼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손으로 그걸 가능케 하다니.”

태선군의 내공 또한 다시 한 번 엄청나다는 게 입증되었다.

이계에서 제법 내공이 불어났다 생각했는데, 이 한 수에 모든 내공이 소모되었다.

하지만 태선군은 그렇지 않았다. 호수에 물 한 바가지 퍼낸 것처럼 그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갈 길이 아직 멀어.”

도현은 새삼 자신의 현재 위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용주는 오토바이를 탄 고등학생들이 신호등도 무시하고 자신의 앞을 쌩하고 지나가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핏덩어리 새끼들아! 죽고 싶어!”

용주는 남은 횡단보도를 건너며 씩씩댔다.

“이 몸이 지금 얼마나 귀한 몸인데,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그는 품 안의 통장이 무사한지 정장 안 가슴을 더듬었다.

며칠에 걸쳐 금화를 판 수억 원의 돈이 입금된 통장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큰돈이 든 통장은 만져 본 적도 없었다.

‘오억 육천, 흐흐흐.’

그는 어깨를 쭉 펴고 호검술 도장으로 향했다.

‘저 건물의 4분의 1이 벌써 도현이 거구나.’

용주는 점점 가까워지는 5층 건물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참, 그걸 사 가야지.’

그는 몸을 돌려 지나쳐 왔던 제과점에 들어갔다.

진열된 케이크 중 가장 보기 좋고 큰 녀석으로 하나 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장으로 이어지는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어?”

기분 좋게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중간에 야구 모자를 쓰고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작은 체구의 사람을 발견했다.

‘뭐야? 왜 여기 앉아 있어?’

용주는 옆을 지나며 슬쩍 누군지 살펴봤다.

귀엽게 생긴 젊은 여성이었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해요?”

“네? 저요?”

책을 읽고 있던 백두TV의 김유진 작가가 용주를 올려다봤다.

“왜 여기 앉아 있어요?”

“다리 아파서요.”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라요. 왜 도장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앉아 있냐고요.”

“도장에 볼일이 있으니까 앉아 있는 거죠.”

“안에 사람 있어요. 두드려 봐요.”

“저도 알아요.”

“알아요? 그런데 왜 여기 앉아 있어요. 도장에 볼일 있다면서요.”

“아저씨 누구세요? 여기 도장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요?”

계단에 앉아 있던 김유진이 일어서며 물었다.

“조금요.”

“백 관장님 잘 아세요?”

살짝 짜증이 나 있던 김유진이 표정을 풀며 부드럽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

용주는 경계를 하며 김유진의 위아래를 살폈다.

“백 관장님 잘 아시냐구요.”

“백 관장에게 직접 물어봐요.”

“네?”

황당해하는 그녀를 지나쳐 용주는 도장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바로 열렸고, 용주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요! 저도 좀 들어갈게요, 백 관장님!”

김유진이 어느새 닫힌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장 안에 들어선 용주는 신발을 벗으며 도현에게 물었다.

“밖에 누구야?”

“백두TV의 김유진 작가. 방송 출연 문제로 지난번에 피디랑 같이 온 사람이야.”

“그래?”

용주는 문이 닫힌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근데 왜? 왜 저기 앉아 있어?”

“후우, 말도 마. 아침부터 와서 사람 힘들게 하고 있다.”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 모자이크 문제 때문에 온 거야? 그때 피디하고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

“그 일로 온 게 아니야. 여기 관원으로 등록시켜 달라고 저러는 거야. 내 제자가 되고 싶다고.”

“뭐라고? 하하하!”

용주가 낄낄대고 웃자 도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피곤해. 몇 번이나 안 된다고 했는데, 저러고 있어.”

“이유가 뭐래. 왜 제자가 되고 싶대?”

용주는 관장실로 가며 물었다.

“내 검술이 마음에 든다나.”

“저 여자가 이곳이 호랑이 굴이라는 걸 모르는군. 심한 훈련을 받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용주는 관장실 책상에 케이크를 올려놓으며 뒤따라온 도현을 쳐다봤다.

“신경 쓰지 마. 조금 있다 내가 나가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우리는 축하나 하자.”

“뭘 축하해?”

도현이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았잖아? 그러니까 이 통장 한번 보고 크게 서로 웃어 보자고.”

통장을 꺼내 보이며 소리 내어 웃는 용주의 모습에 도현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즐거워해 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앞에서 웃음을 감출 필요는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