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43화 (43/575)

[43] 디 임팩트 2권 18화

사악.

붉은 사과가 허공에서 두 조각이 되어 검의 고수 주변으로 떨어졌다.

현장에서 붐 마이크를 통해 직접 녹음된 생생한 사과 잘리는 소리는 환상적으로 잘리는 사과의 모습과 어우러져 청각적으로도 강한 쾌감을 선사했다.

“우와!”

TV를 보고 있던 식당 안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탄성을 뱉어 냈다.

사악. 사악.

검의 고수는 계속해서 좌우에서 혹은 뒤에서 던지는 사과들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아름답기까지 한 유려한 검 동작으로 모두 잘라 냈고, 급기야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사과가 동시에 날아오는 장면에서는 눈이 따라가기 어려운 쾌검을 선보이며 그 사과들을 모조리 막아 내 버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은 그 기가 막힌 장면에 모두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여러 각도에 다시 같은 장면들이 반복됐고, 마지막에는 느린 화면으로 검의 고수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쫓아갔다.

숲 공터에 태산처럼 자리 잡고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된 검을 펼친 검의 고수의 모습은 느린 화면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해, 보는 사람들을 화면 속으로 끌어 들이는 마력을 발휘했다.

조용해진 식당의 전경에 용주는 뿌듯한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죽인다!”

“편집을 잘한 거야.”

도현은 가볍게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검술을 확인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카메라에 담아 동영상으로 보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뭔가 좀 색달랐다.

“얼굴도 나왔으면 더 멋졌을 텐데.”

용주가 어딘지 아쉬운 표정을 지을 때, 방송을 본 식당 안의 사람들이 방송의 진위 여부를 두고 장터처럼 떠들어 댔다.

뭐라고 하는지 가만히 귀담아듣던 용주가 얼굴이 붉어졌다.

“눈이 호강하는 장면을 보여 줬더니 뭔 헛소리들이야? 조작은 무슨 조작.”

다 좋았지만 모자이크가 된 얼굴이 화근이었다.

천으로 두 눈을 가렸다고는 하지만 그 장면을 증명할 화면은 검의 고수의 뒷머리에 감긴 천이 유일했다.

그것도 방송 특성상 오래 보여 줄 장면도 아니었고, 사람들 중 일부는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보인 검의 고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방송국이 사기로 방송을 내보냈겠냐? 큰일 나려고.”

“넌 진짜로 보는 거야? 저거 눈 안 가리고 한 게 분명해. 아니면 모자이크 처리는 왜 해?”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눈을 안 가렸다고 해도 저렇게 하는 건 또 쉽겠어? 아무튼 난 진짜 저런 검의 고수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도현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드는 걸 묵묵히 들으며 술잔을 비우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다른 데서 술 한잔 더 하게.”

“그럴까?”

용주도 도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피디는 자신이 연출한 검의 고수의 시청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오자 기분이 좋아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동시간대 방송되는 지상파 시청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턱밑까지 따라붙은 건 큰 성과였다.

방송 직후 백 관장이 출연한 눈 가리고 사과 자르기는 화제의 동영상이 됐고 도대체 출연자가 누구냐는 문의가 방송국에 쇄도하고 있었다.

“백 관장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는데.”

혼잣말을 하는 이 피디에게 동료 피디가 다가왔다.

“이 피디.”

“네, 선배님.”

“어제 사과 자른 사람. 그 사람 연락처 좀 줘.”

“네? 그건 왜요?”

이 피디는 도현의 신분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다녔다. 방송 촬영 중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도 도현의 얼굴만 알 뿐 어디서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아는 사람은 그와 김유진 작가, 그리고 연출팀 몇몇이 전부였다.

“새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좀 쓰게.”

“게스트로요?”

“모자이크되기 전 동영상 봤어. 훤칠하니 마스크가 괜찮아. 거기에다 놀라운 검술 솜씨도 지녔고. 아마 나오면 인기 좀 끌 것 같아. 아, 그런데 말이야. 진짜로 리얼이었어?”

“그럼요. 100프로 리얼입니다. 요만큼도 사전에 짜고 한 게 아니라고요.”

“정말이지?”

확인하듯 묻는 선배 피디에게 이 피디가 손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니면 절 죽이세요. 시청률 때문에 방송을 조작할 정도로 양심이 없는 놈은 아니니까요.”

“알았어. 연락처는?”

이 피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 선배님, 알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본인이 방송에 얼굴 비추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오죽했으면 저도 모자이크 처리해서 내보냈겠습니까?”

“음, 그래?”

잠시 고민하던 최 피디는 피식 웃으며 괜찮다는 투로 말했다.

“예쁜 여자 연예인들과 함께하는데, 젊은 남자라면 마음이 혹하겠지. 걱정 말고 연락처 줘 봐.”

“힘드실 텐데요.”

이 피디가 우려를 했지만 최 피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타투가 사라지고 이계가 닫혔지만 도현은 흔들림 없이 도장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호검술 전반 12식 중 마지막 초식을 펼쳐 검기발현을 이룬 그의 검 끝에는 흐릿하면서도 공기가 일렁이는 묘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단전의 기를 검을 통해 뿜어낸 검기였다.

새끼손가락 길이의 검기는 도현이 검을 움직일 때마다 공기를 가르며 섬뜩하게 빛이 났다.

검기를 유지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단전의 내공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느리지만 힘이 느껴지는 검세를 이어 가던 그는 단전이 텅 비어 오는 느낌이 오자 서서히 검을 거두었다.

검기가 맺힌 상태로는 오래 검을 다룰 수가 없었다. 내공 소모도 컸고, 검기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 자체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라서 그 피로감이 굉장했다.

전신이 무거울 정도로 지친 도현은 가부좌를 틀고 단전호흡을 하며 명상에 빠져 들어갔다.

‘호검술 후반 4식은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

원래 전반 12식과 후반 4식, 도합 16식의 호검술이었지만, 그의 집안에 검보가 내려오는 도중 후반부가 절전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들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호검술이 그의 집안에 내려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평범한 농사일을 하던 분이었고, 집안에 내려오던 호검술은 심심풀이로 익혔을 뿐이었다.

그런 호검술을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익히며 무도인으로서 삶을 산 것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많은 검법서를 살피고 중국까지 발을 넓힌 이유는 사실 절전된 호검술 후반부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에서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 일은 자신이 대물림으로 받는 게 당연하지만, 언제 절전됐는지 정확한 기록도 없고 누구로부터 그 검보가 자신의 집안에 전달됐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만큼이나 도현 역시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도장과 함께 호검술 후반부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 만큼 태선군에게 복수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이 요즘 부쩍 커지고 있었다.

‘완성된 호검술의 위력은 지금과는 또 다를 게 분명해.’

아버지의 염원도 이루면서 자신 역시 강해지는 길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절전된 호검술 후반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도장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눈을 뜬 도현은 문으로 다가가 닫힌 문을 열었다.

낯선 사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백 관장님.”

“네에, 안녕하세요.”

도현은 마주 인사를 하다가 상대방이 자신을 자연스럽게 백 관장으로 부르는 점이 이상해서 가만히 상대방을 바라봤다.

다시 봐도 그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를 아십니까?”

“그럼요. 어제 TV에 나오셨잖습니까. 방송이 아주 잘 맞으시더라고요. 물론 검 솜씨도 경이로울 정도고요.”

낯선 사내는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전 백두TV의 최인 피디라고 합니다.”

“피디요?”

“네,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도현은 명함을 손에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송국 사람이 찾아온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마주한 이상, 일단 용건은 들어 봐야 했다.

“도장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네요. 몇 년이나 된 도장입니까?”

도현을 따라 관장실로 향하던 최 피디가 도장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20년 됐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은거 고수가 머물기에는 좁지 않습니까?”

“전 은거 고수도 아니고 도장도 좁지 않습니다.”

관장실에 도착한 도현은 의자를 권하고 커피를 탔다.

“이분이 부친이십니까?”

말 많은 최 피디가 도현이 커피를 타는 동안 관장실 한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며 물었다.

백남식 관장이 도현과 다정한 모습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네.”

짧게 답한 도현은 최 피디에게 커피를 건네고는 맞은편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는 도현의 시선이 은근히 무게가 있어 최 피디는 또 다른 질문을 하려다가 포기하며 찾아온 용건을 웃는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참을성 있게 최 피디의 설명을 다 들은 도현은 한마디 했다.

“안 합니다.”

“백 관장님, 기회가 있을 때 하셔야죠. 사과 베기 영상으로 지금 한창 화제가 돼서 제가 찾아왔지만, 시간 지나면 사람들 금세 다 잊어요. 다음엔 누가 찾아와서 이런 제안도 안합니다.”

“이 피디님에게도 말했었지만, 전 방송에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시지 말고 저희와 한번 방송을 해 보시죠. 제가 책임을 지고 관장님을 대중들의 스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최 피디가 다른 말로 그를 유혹했다.

“TV에서만 보던 아름다운 미녀 연예인들이 출연하는데, 그래도 관심 없으세요?”

“관심 없습니다.”

도현이 딱 잘라 말하자 최 피디의 얼굴이 구겨졌다.

“허참, 정말 꽉 막히셨네. 젊은 분이 왜 그래요? 냄새나는 도장에서 평생 검만 다루고 살 겁니까?”

“냄새나는 도장요?”

도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버지가 세운 도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도현에게는 다시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의 손이 한쪽에 놓여 있던 목검으로 향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냄새나는 집이라고 하면 듣는 집주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최 피디는 심상치 않게 변한 도현의 눈빛에 침을 삼키며 관장실을 뒷걸음으로 나왔다.

“미안합니다. 내가 워낙 말이 많다 보니 가끔 헛말이 나오기도 해요. 너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어요.”

“저도 가끔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해하세요.”

도현이 목검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오자 그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최 피디가 황급히 도장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어디 가십니까?”

“허억!”

최 피디는 문 입구에 서 있는 도현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분명 자신의 뒤에 있었는데 어느 틈엔지 자신을 추월해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마치 축지법을 쓴 것 같았다.

“왜, 왜 이러십니까, 백 관장. 그 목검으로 날?”

최 피디의 머릿속에 목검에 맞아 비참하게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이 연상됐다.

겁에 질려 있는 그의 모습에 도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 누르며 문 앞에서 비켜섰다.

“앞으로 말조심하십시오. 방송국 피디가 벼슬자리도 아니고, 남의 도장에 와서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는 겁니다.”

최 피디는 붉어진 얼굴로 신발을 신고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

“냄새나는 도장이라고? 여기가?”

도현은 씁쓸한 얼굴로 지하 도장을 둘러봤다.

그에게는 익숙하고 정이 가는 공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땀 냄새 밴, 보잘것없는 공간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