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디 임팩트 2권 19화
금화를 돈으로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경마장과 하우스에서 이래저래 안면을 튼 종로의 귀금속 사장들에게 반 정도 넘기고 나머지 반은 발품을 팔아서 규모가 있는 금은방에 넘기면 됐다.
3일에 걸쳐서 용주가 그렇게 다 팔고 모은 돈은 이십억 오천.
요즘 금 시세가 자꾸 떨어져서 지난번보다 조금 손해를 보고 팔아야만 했다.
“젠장, 차 한 대 값이 그냥 훅 날아갔다.”
돈의 소중함을 익히 알고 있던 용주는 나름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지 도현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통장을 보여 줬다.
통장의 잔고는 지난번 돈과 합해서 약 이십육억 정도였다
“고생했다.”
용주 성격에 금화 하나라도 제값을 받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건물주는?”
“모레 귀국할 거야. 귀국하면 도장에 들른다고 했어.”
건물주는 중국에서 여행 중이었다.
“건물 산다는 얘기는 했어?”
“할 시간도 없었어. 바쁜지 내 이야기는 다 들으려고 하지 않더라고.”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세입자가 건물을 산다고 하면.”
“그러시겠지. 그런데 좀 걱정이다. 이십삼억이면 될 줄 알았는데, 그세 주변 시세가 올라 이십사억이 됐잖아.”
건물주는 뉴질랜드로 투자 이민을 가기 위해 건물을 처분한다고는 했지만 주변 개발로 인해 시세가 덩달아 들썩거리자 쉽게 팔지 않고 관망 중이었다.
인근 부동산 업자의 얘기에 의하면 이미 이십삼억에 산다는 매수자는 최근에 여러 명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안 팔고 있는 것이다.
“야, 나도 오면서 저기 길 건너 태평양부동산에 들렀었는데, 아무리 올라도 이십오억이 상한선이란다. 아무 걱정 할 것 없어. 이 돈이면 충분할 거야.”
하지만 이틀 뒤 뒷짐을 지고 전자 담배를 빠끔빠끔 피우며 나타난 건물주는 이십사억에 이 건물을 사겠다는 도현과 용주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 얘기했다.
“삼십이억.”
“네? 삼십이억요?”
“그래. 백 관장 자네가 어디서 그 큰돈을 구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미안하게 됐네. 주변 시세가 계속 올라서 그 돈으로는 팔 마음이 없어. 난 삼십이억은 받아야겠네.”
“하지만 삼십이억은…….”
도현은 인근 부동산 업자의 예측을 엄청나게 뛰어넘는 건물주의 요구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리한 요구라고 말을 하고는 싶었지만 건물주가 그렇게 판다는데 마땅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용주 역시 입을 벌린 채 무려 팔억이나 차이 나는 금액을 부르고 있는 건물주 박 사장을 도둑놈 보듯 노려보기만 했다.
“부동산이라는 게 그래. 하루가 다르게 변하거든. 나도 처음엔 이십삼억에 팔려고 했는데,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러나? 오르면 오르는 대로 받고 싶고, 더 오를 거 같으면 기다렸다 많이 받고 싶은 게지.”
“투자 이민 가신다면서요? 그래서 돈이 필요해 건물을 파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용주가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투자 이민이야 조금 늦춰도 상관없지. 수억을 손해 보고 급하게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왜 끼어드는가?”
건물주 박 사장은 용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까지 자신의 상가 건물에 복권 판매점을 직접 운영했었고, 용주가 고등학생 때부터 호검술 도장을 제집처럼 들락날락거리는 걸 그때부터 쭉 봐 왔었다. 오가다 자신에게 인사도 하고 그랬기 때문에 잊으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제게 돈을 빌려 준 친구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도현이 조용히 대꾸하자 건물주 박 사장은 헛기침을 하며 도현에게 다시 시선을 줬다.
“어찌할 텐가? 삼십이억이 있나 없나?”
“이십육억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게 제 한계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자네에게 웬만하면 팔고 싶지만, 말했다시피 지금 분위기가 쉽게 팔면 손해 볼 분위기라서. 미안하네.”
건물주 박 사장이 관장실을 나가려 하자 용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삽심이억은 어떻게 나온 계산법입니까?”
“난 그렇게 나오던데?”
전자 담배를 피우며 느긋하게 말하는 건물주의 모습에 용주는 약이 올라 얼굴만 점점 붉어졌다.
곧 70대에 접어드는 박 사장의 나이만 아니었으면 멱살을 잡고 적당히 좀 하라고 소리를 칠 뻔했다.
“사장님.”
의자에 앉아 있던 도현이 천천히 일어나며 건물주에게 말했다.
“제가 부동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사장님이 정한 삼십이억이 적정한 것인지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도현이 말을 마치고 허리를 정중히 숙였다.
아예 돈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십육억을 모은 상황에서 이렇게 물러나는 건 너무 아쉽고 미련이 남았다.
도현의 깍듯한 자세에 건물주 박 사장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 역시 삼십이억이 당장의 시세와 비교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꿈틀대는 주변 지가가 심상치 않았다.
“흐음, 이십육억이라…….”
전자 담배를 입에 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도현을 흘낏 쳐다봤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도현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부친을 이어 관장이 되어 있었다.
겪어 온 시간이 있기 때문에 박 사장은 도현이 또래의 젊은 사내들과는 어딘지 다르고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느끼곤 했었다.
“자넨 틀림없이 뭘 하든 성공할 거야.”
덕담을 한마디 건넨 그는 이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기엔 내가 아직 욕심이 많아. 미안하네.”
“사장님.”
“솔직히 말하면 오늘 아침에 이십육억을 말하는 부동산이 있었어.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자네에게 이십육억에 팔 수 있겠나? 하지만 약속하지. 삼십이억을 가지고 오면, 그땐 천하없어도 자네에게 팔겠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건물주가 도장을 나가자 용주가 주먹으로 벽을 세차게 쳤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주먹으로 연속해서 벽을 치는 친구의 손을 뒤에서 도현이 급히 붙잡았다.
“그만해. 손 다쳐.”
“너무하잖아! 아무리 시세가 오른다고 해도 삼십이억이 말이나 되냐고! 확 뉴질랜드에 가서 똥 먹고 죽어 버려라.”
건물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무너진 뒤에 남은 허탈감과 분노는 용주의 입을 통해 마구 분출됐고, 도현 역시 입으로 표현은 안 하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삼십이억이라는 기습 공격에 심장이 구멍 난 느낌이었다.
‘이십육억도 이계가 아니었으면 구하지 못할 큰돈이었는데. 삼십이억이라…….’
도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의 검은 경지가 오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 역시 현실이라는 도산검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을 무기처럼 잘 사용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이계에 가서 돈을 벌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지만 그는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도현은 속상해하는 친구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리다가 벽에 걸린 수련용 진검을 들고 관장실을 나섰다.
챙!
검을 뽑아 든 그는 사정없이 주변에 검을 날렸다.
역시 돈이란 괴물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어 그를 옥죄었다.
이십육억을 벌어서 마음을 놓았더니, 돈은 그를 비웃으며 더 큰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돈에 갇혀 살아야 하나.
아버지의 도장을 보존하는 게 품을 수 없는 커다란 욕심이었을까?
태선군과 도장 건물. 그리고 절전된 호검술 후반부.
이 세 가지는 그가 아버지와 관련해 풀어야 할 숙제처럼 남아 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희망을 가졌던 건물 매입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속에서 알 수 없는 오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얏!”
검광이 번쩍이는 순간 목각 인형의 나뭇조각들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검을 늘어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등 뒤로 다가온 용주에게 차분히 말했다.
“용주야, 나 포기 못 하겠다. 이 돈이라는 놈이 도대체 얼마나 끈질기게 괴롭히는지 한번 가 봐야겠어. 그래서 반드시 이 건물 내가 차지한다.”
“도둑놈 심보의 저 건물주가 얄밉긴 하지만, 도현이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몇 가지 방법이 있긴 있어. 우리 가진 현금이 많잖아. 이걸 이용해서 고수익을 내는 몇 곳에 단기간에 투자하는 방법이야.”
말을 하는 용주는 도현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그렇게 떳떳한 방법들은 아니라서 위험도도 있고. 아니면 은행권에서 대출을 받거나, 새로운 파트너를 구해서 자금을 조달하는 거야. 지난번에 네가 찾아가서 혼내 준 동대문 사채업자 최 사장 같은 사람이라면 현금이 많으니까, 육억 정도는 투자받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도 같고.”
용주가 사채업을 하는 최 사장 얘기를 꺼내자 도현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너 알고 있었어?”
“그래, 인마. 내가 바보냐? 내가 계속 물어보니까 그 사람이 실토하더라. 너한테 죽을 뻔했다고. 너 아주 그 사람 똘마니들까지 늘씬하게 두들겨 줬다면서? 겁에 질려서 경찰에 신고도 못 할 정도로.”
용주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날 병문안 온 최 사장이 말을 바꿔 왜 빚을 다 깎아 주고 병원비까지 지불하겠다고 했는지.
도현이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아주 자근자근 밟아 주자 최 사장이 백기를 흔든 것이었다.
“너 죽을 뻔했는데, 그걸 내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잖아.”
도현이 담담히 말하며 도장 천장을 올려다봤다.
친구가 제시한 몇 가지 방법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 좀 해 보자.”
“그래. 삼십이억에는 이 건물 누가 사 가지도 않을 테니까,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용주가 대꾸하며 손안에 들고 있던 중국 음식점 메뉴판을 봤다.
“야, 점심 먹자. 화가 나니까 배가 더 고프다. 뭐 먹을래?”
중국 음식점 배달부가 용주가 주문한 짬뽕과 탕수육을 배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물 앞으로 검은색 고급 승용차 두 대가 섰다.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검도관에서 사용하는 죽도를 저마다 하나씩 들고 차에서 내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낏거렸다.
호검술 도장으로 향하던 박성태는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뒤를 돌아다봤다.
“건달처럼 보이잖아.”
“차에 가 있을까요?”
“내가 전화하면 그때 들어와.”
윤 회장을 모시고 있는 박성태는 부하 직원들을 차로 돌려보내고 혼자서 도장으로 향했다.
“탕수육 많이 줬네. 맛도 좋고.”
용주는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젓가락을 쉴 새 없이 놀렸고, 도현은 매콤하고 자극적인 짬뽕 국물을 면과 함께 흡입했다.
그들은 도장 한가운데에 신문지를 깔고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는 서비스로 딸려 온 만두까지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내일은 가평에 한번 가 봐야겠다.”
단무지를 와싹 씹으며 용주가 말했다.
“조 박사님 집에?”
“어. 도둑이라도 안 들었는지 한번 둘러봐야지. 흰돌이도 잘 있는지도 보고.
조 박사는 아직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았고, 흰돌이로 불리는 조 박사 집 개는 인근 동네 사람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삼촌이 빨리 돌아오셔야 도현이 네 문제도 한번 상의해 볼 텐데 말이야.”
“글쎄.”
도현의 시선이 도복 밖으로 드러난 왼쪽 팔로 향했다.
타투는 완벽히 사라진 상태였다.
잠시 아쉬움 섞인 눈빛을 흘리던 그는 고개를 돌려 문 입구를 쳐다봤다.
음식 냄새를 빨리 환기시키기 위해 출입문을 활짝 열어 놨는데, 그 사이로 구둣발 소리가 들린 것이다.
‘누구지?’
잠시 후, 신발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진동하는 짬뽕 냄새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백도현 씨를 찾아왔습니다.”
도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데요. 무슨 일이시죠?”
박성태는 도복을 입고 앞에 선 도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식사 도중 죄송합니다. 얼마 전 백두TV에 나온 동영상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도현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