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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5화 (45/575)

[45] 디 임팩트 2권 20화

최인 피디가 다녀간 이후, 이호선 피디가 사과를 하려고 왔고, 그 뒤에는 김유진 작가가 보약이라며 한약재를 가지고 왔었다. 그뿐 아니라 방송국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확인한 몇몇 영화 제작사에서 액션 영화에 출연할 의향은 없냐고 여러 차례 찾아와 그를 귀찮게 하기도 했다.

방송이 나간 지 며칠 만에 그의 조용한 삶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괜한 짓을 했어.’

아버지의 지인인 부산의 김 관장이 자신을 생각해 추천을 했더라도 냉정히 거부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도현은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은 중년인이 하는 말을 계속 들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하시던 식사를 마저 하신 후에 제 이야기를 들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조금 있다 다시 오겠습니다.”

도현은 뒤를 돌아다봤다. 용주가 마지막 남은 탕수육을 입에 넣으며 다 먹었다는 시늉을 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식사를 다 했으니까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관장실로 박성태를 데리고 온 도현은 그로부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듣고 난감해졌다.

“지금 대련을 신청한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도현이 재차 확인했다.

“그렇습니다. 한 수 가르침 받으려고 왔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용인에 있는 태화컨트리클럽입니다. 직원들끼리 작게 검도회 모임을 결성했는데, 제가 이끌고 있지요.”

박성태는 뒤늦게 자신의 명함을 꺼내 도현에게 건넸다.

“직원들이 운동을 다 좋아합니다. 배운 검도도 제각각이고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잠시 명함을 내려다보던 도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대련이 드잡이 싸움질은 아닙니다. 장난식으로 와서 검을 맞대는 것도 아니고요. 돌아가십시오.”

도현이 정중하지만 질책 섞인 어조로 말했다.

“장난이 아닙니다. 어렵게 시간 내서 직원들과 함께 용인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박성태는 진지한 눈빛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이대로 테스트도 못 하고 돌아가면 지시를 내린 이 실장에게 얼마나 심하게 질책을 당할지 모른다.

“백 관장님, 혹시 다치실까 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목검보다 약한 죽도를 준비해 왔고, 워낙 운동으로 다져진 친구들이라 죽도 정도는 맞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백 관장, 상대해 드려. 죽도 정도는 괜찮으시다잖아.”

옆에서 팔짱을 끼고 듣고 있던 용주가 슬며시 끼어들며 말했다.

‘겁대가리 없는 것들이 한번 도현이한테 제대로 맞아 봐야, 죽도가 살인 무기구나 느끼지. 도장 격파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디서 떼거리로 찾아와서 대련을 하재?’

용주가 옆에서 슬쩍 부추겼지만 도현은 쉽게 대련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성태가 계속 정중하게 부탁을 해 오자 결국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입니다. 더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직원들을 데리고 오지요.”

“뭐야, 이 사람들. 골프 클럽 직원들 맞아?”

하나둘씩 도장 안으로 들어오는 건장한 체격에 사내들은 키가 180 이상인 건 기본이고 정장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푼 와이셔츠 차림이 되자 탄탄한 몸매까지 드러났다.

온갖 무술로 다져진 유단자의 냄새가 풍겼다.

“당신들, 정말 골프 클럽 직원들 맞아요?”

용주가 뭔가 수상한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박성태는 여섯 명의 직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클럽 경비 직원들이라 어려서 다들 운동 한두 가지 정도는 마스터했습니다.”

도현은 죽도에 몸을 기댄 상태로 지그시 사내들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용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용주가 준비한 종이를 들고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다쳐도 백도현 관장에게 일절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입니다. 자, 다들, 지장 찍으시고.”

사내들은 붉은 인주를 들이미는 용주를 노려보다가 박성태의 턱짓에 하나둘씩 지장을 찍어 갔다.

박성태 포함 일곱 명의 사내들은 일렬로 서서 도장 중앙에 서 있는 도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 관장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도현은 초반부터 거칠게 달려드는 사내의 모습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마치 전장의 적을 대하듯 인정사정없이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배움을 청하는 자세와는 어딘지 동떨어진 행동이었다.

도현은 맞받아치지 않고 일단 사내의 검을 피하기만 했다.

검 수련은 제법 해 왔는지 죽도에 실린 힘과 스피드는 조금 인정해 줄 만했다. 그리고 때때로 날카로운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죽도를 휘두를 때의 하체의 안정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검으로만 따지면 한쪽에서 보고 있는 친구 용주의 상대도 되지 않을 사람이었다.

지적해 주고 싶은 사항이 많았지만 상대가 배움의 자세를 보이지 않자 도현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도현이 피하기만 하자 우습게 보였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죽도를 날리던 사내는, 별안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환영을 보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웅!

죽도를 들고 뒤로 넘어진 사내는 왜 자신이 넘어져 있는 지 잠시 동안 깨닫지 못하다가 갑자기 엄습한 이마의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도장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아아!”

“이봐, 괜찮아!”

뒤에서 느긋한 자세로 지켜보던 동료들이 황급히 뛰어왔다.

“아파. 죽도록 아파! 크으으으.”

도현의 죽도에 이마를 얻어맞은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의 이마 전체가 시간이 갈수록 심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어서 주위에 있던 동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충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 다음 분 나오세요.”

도현이 말했지만 선뜻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도현이 언제 죽도를 휘둘렀는지 이 중에서 똑똑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의 검이 빨랐다.

“뭐 해! 안 나가고!”

박성태가 눈을 부라리자 그때서야 사내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도현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도 곧 배움의 자세를 잊고 도현을 향해 필사적으로 죽도를 휘두르다가 역시 같은 위치에 이마를 얻어맞고 도장 바닥에 쓰러졌다.

‘안 아픈데? 난 괜찮은 건가?’

멍하니 누워 있던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돌연 머리가 둘로 갈라지는 충격과 함께 이마에서 고통이 시작되자 주먹으로 도장 바닥을 내려치며 고통을 호소했다.

“너무 아프잖아! 크아아아!”

두 번째 사내까지 이 지경이 되자 남은 사내들은 그대로 몸이 얼어 더 이상 도현을 상대로 테스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 분 나오십시오.”

도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박성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백 관장님 경지가 너무 높아서 일대일로는 도무지 안 되겠습니다. 남은 사람들과 한꺼번에 상대해 보시겠습니까?”

“대련이 아니라 막싸움이 되는군요.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이번에는 박성태도 함께했다.

모두 다섯 명이 숫자를 믿고 다섯 방위에서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공격해 들어갔다.

‘한 대라도 때리자!’

모두들 그 마음이었는지 죽도 뒤로 보이는 그들의 얼굴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들이 왜 온 거지? 대련이 목적이 아니야.’

도현은 한 바퀴 원을 그려 다섯 자루의 죽도를 부드럽게 쓸어 갔다.

“어어!”

몸의 중심을 잃은 사내들이 태풍이 지나간 후의 기울어진 벼처럼 일제히 한쪽으로 몸이 쏠렸고, 그 위를 도현의 죽도가 다시 한 번 크게 원을 그리며 지나갔다.

따따따따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볼링공처럼 옆으로 픽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죽음 같은 정적이 왔다.

앞선 사례를 봤을 때 곧 닥치게 될 이마의 고통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기다려도 아픔은 없었다.

‘이번엔 다른 건가?’

사람들이 방심한 순간, 여지없이 고통이 시작됐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중년인 박성태의 비명이 가장 컸다.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이마를 문지르던 그의 눈앞에 도현의 발이 보였다.

쿵!

도현이 죽도로 도장 바닥을 치자 그 울림이 천둥처럼 들렸다.

“왜 대련 핑계를 댄 겁니까? 진짜 목적이 뭡니까?”

“자, 잠시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금은 말을…….”

스쿠터

숲에 둘러싸인 팔각정에 앉아서 화선지에 난초를 그리던 노인은 손에 든 붓을 놓고 옆에서 보고를 하는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졌다고?”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수십 년간 산속에서 검만 수련한 사람이라기에 기대를 했는데, 아쉽군. 다음 사람은 준비됐나?”

노인은 다시 붓을 잡으며 물었다.

“접촉 중입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실력이면 문제 삼지 말고 계속 보내. 그 아이에게 내가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주지시키는 게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 실장은 공손히 대답을 하고 팔각정을 내려와 주변을 지키는 경호원들을 통과해 숲 한쪽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박성태 팀장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

“뭐라든가?”

“모두들 손도 못 쓰고 당했다고 했습니다.”

“흠, 기대 이상인데. 서울로 가지.”

“예, 실장님.”

차는 숲을 빠져나와 인근에 있는 용인의 태화컨트리클럽을 돌아서 서울로 빠르게 움직였다.

밤늦은 시각, 호검술 도장의 문이 열리며 반백의 머리를 한 중후한 인상의 50대 남자가 등장했다.

태화실업 윤일주 회장의 수족 비서실장 이한규였다.

그의 뒤에는 낮에 도현의 손에 혼이 난 박성태가 이마에 혹을 하나 달고 서 있었다.

용주에게 검을 가르치며 방문객을 기다리던 도현은 들고 있던 검을 용주에게 넘기고 입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낮에 박성태는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시킨 사람이 밤에 찾아올 테니, 자세한 건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용주와 기다리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드디어 그 의문점을 풀어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한규라는 사람입니다.”

“백도현입니다.”

“먼저 낮에 일은 사과하겠습니다. 백 관장님에게 악의로 그런 건 아니니 이해해 주세요.”

부드럽게 사과를 하는 이한규를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몸을 약간 틀어 관장실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좁은 관장실을 가볍게 둘러보며 의자에 앉던 이한규는 의자가 참 불편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쿠션도 없는 작은 접이식 철제 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도 젊었을 때에는 여러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한 벌에 수백만 원짜리 고가의 맞춤 양복이 아니면 성에 차지 않을 만큼 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런 불편한 의자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도현은 낮에 사람을 시켜 자신을 시험한 사람에게 차를 대접해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아버지 뒤를 이은 관장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겠다며 나름 성의를 다한 종이컵 차를 대접했다.

물론 종이컵 안에 차를 이한규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낮에는 왜 그러셨습니까?”

“조용히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한규의 시선이 관장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용주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용주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가라고요?”

“그래 주시면 고맙겠군요.”

“웃겨서 말도 안 나오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한다고, 참나.”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몸은 이미 관장실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만 남자 이한규가 입을 뗐다.

“낮에 그런 번거로운 시험을 한 이유는 방송에서 본 백 관장님의 검술 실력이 실전에서는 어떨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대보다 훨씬 뛰어나시더군요.”

“제 실력을 사람까지 보내 확인해야 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도현의 질문에 이 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답했다.

“제가 모시는 회장님의 손녀와 그분의 사부를 검으로 꺾어 주십시오. 그 일을 부탁하기 위해 왔습니다.”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또 무슨 말인지 해괴하게 들렸다.

“누구를 꺾어 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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