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디 임팩트 2권 21화
도현이 다시 물어도 회장 손녀와 그녀의 사부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회장이라면 어떤 회장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태화실업 윤일주 회장님이십니다. 제가 비서실장이지요.”
이한규는 편안하게 대답했다.
이미 여러 번 검도 고수들을 초빙해 의뢰를 하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는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만으로 움직이기에는 실력 좋은 검도 고수들은 자존심이 세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재계에서는 큰 기침 한번 할 수 있는 태화실업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한참 나이 어린 도현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고 있었다.
‘태화실업이라면.’
도현은 태화실업이라는 말에 속으로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화실업은 재계에 드러나지 않은 강자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 골프와 리조트, 호텔 사업 등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이 검에 빠져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간간이 뉴스에도 나오는 태화실업 자체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태화컨트리클럽에서 왔다는 사내들의 말도 이해가 되었다.
“그냥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충분한 사례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가씨와 아가씨의 사부를 검으로 겨뤄 이기면 십억을 지급하고, 지시더라도 저희를 도와주신 의미로 오천만 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백 관장님, 도와주시겠습니까?”
이기면 십억을 준다는 말에 도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십억을 준다고요?”
“네. 두 분 다 이길 경우에 그렇습니다.”
“진검으로 말입니까?”
“하하하, 설마 그렇게는 못 하지요. 목검입니다. 물론 그것도 위험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아가씨를 상대로 하면서 크게 다친 도전자분들은 없었습니다.”
이 실장이 회장의 손녀를 높이 평가하자 도현은 그녀가 어떤 수준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들어 보니 이미 상당수 사람이 그녀에게 도전을 했다 패한 것 같았다.
“회장님의 손녀를 이긴 분이 있습니까?”
도현의 질문에 이 실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 관장님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큽니다.”
도현의 반듯한 모습을 응시하던 이한규는 젊은 관장이 과연 아가씨와 그녀의 사부를 모두 이길 수 있을까 상상을 해 보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부는 고사하고 아가씨 손에 이미 솜씨 좋은 실력파 검도 고수들이 차례차례 격파가 된 상황이다.
오늘 도현이 직원들을 상대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준 것 같기는 하지만, 아가씨의 그 놀랍고 신통방통한 신기에 가까운 검술 실력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그로서는 도현에게 큰 점수를 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만약의 가능성이라는 게 있으니, 한 가닥 기대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납득이 안 되는군요. 회장님의 손녀와 사부를 이기라니.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회장님 집안일이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회장님이 아가씨를 사랑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아가씨가 먼저 이런 제안을 회장님께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불법적인 일이었다면, 저희가 이렇게 드러내 놓고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길게 말을 하던 이 실장이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음.”
도현은 입을 꾹 다물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검을 배운 건 그 자체로 뜻이 있는 것이지 돈을 받고 누구를 대신해서 싸우기 위해 배운 건 아니었다.
이 실장이 구구절절 속사정을 피하며 길게 설명은 했지만, 핵심은 결국 돈을 받고 회장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법적으로 어떻다는 문제를 떠나 무도인으로서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한 마음으로 자존심을 내려놓기로 결정을 내렸다.
검 한 자루로 세상을 풍미하며 자유롭게 살던 낭만적인 시대에 태어났다면 거리낌 없이 그는 ‘닥치고 꺼져라. 돈이 아닌 내 마음이 동하면 그때 움직이겠다.’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세상이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자신이 성장한다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돈이 필요하면, 벌어야만 한다.
“하겠습니다.”
“별일이 다 있네. 손녀를 꺾어 달라니.”
용주는 관장실에 있는 오래된 컴퓨터를 두드리며 인터넷 검색을 했다.
태화실업 윤일주 회장과 비서실장 이한규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모니터에 떴다.
태화실업 비서실을 사칭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한규 본인이 맞았다.
십억을 준다는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하긴 오천만 원을 이렇게 딱 놓고 간 걸 보면 애초에 장난은 아니었지.”
관장실 테이블 위엔 이한규를 따라온 박성태가 놓고 간 돈 가방이 놓여 있었다.
지더라도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준다는 오천만 원이었는데, 도현이 회장의 손녀와 싸우기도 전에 미리 돈을 지급한 것이다.
그것도 하겠다는 말이 나온 직후 바로.
“하는 짓 봐서는 나중에 딴소리할 것 같지는 않고. 그런데 얼마나 강한 사람들이기에 십억이나 준다는 거지?”
“글쎄, 만나 보면 알겠지.”
모레 그를 태우고 손녀가 있는 곳으로 갈 사람이 오기로 했다.
“타시죠.”
그를 태우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박성태였다.
“따라가면 안 됩니까?”
용주의 말에 박성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불편해하시기도 하고요.”
“대통령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거참. 알았습니다. 도현아, 가서 확 눌러 버려. 회장 손녀든 뭐든. 부담 갖지 말고.”
“갔다 올게.”
손에 익은 목검 한 자루를 들고 차에 오른 도현은 박성태가 모는 승용차가 서울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탈 때까지 단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고, 조용한 모습으로 눈만 감고 있었다.
‘잠자나?’
박성태는 백미러로 도현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충남 금산으로 향했다.
분홍색 헬멧을 쓴 다혜는 스쿠터를 운전해서 한산한 금산 시내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의 스쿠터 뒤에는 시내 마트에서 산 1+1 플러스 행사 기획 상품으로 나온 과자들과 생활용품 몇 가지, 그리고 서점에서 산 책 몇 권이 박스에 담겨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여 있었다.
“날씨 좋다.”
스물세 살 어리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녀는 어제 비가 멈추고 가을 날씨에 성큼 다가선 9월의 화창한 하늘이 보기 좋아, 아이처럼 미소를 지었다.
속도를 조금 더 높이자, 헬멧 뒤로 나온 긴 머리카락이 9월 가을바람에 시원하게 흔들렸다.
금산 시내를 거의 벗어날 때쯤, 삼거리 앞 신호등에 걸린 그녀의 왼쪽에 폭주족이 타고 다닐 법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섰다.
오토바이에 탄 젊은 사내 두 명은 자기들끼리 뭔가를 얘기하다가 스쿠터를 탄 다혜의 미모에 눈이 확 갔다.
헬멧 밑으로 드러난 시원시원한 눈 코 입이 그림처럼 잘 배치되어 예쁘기 그지없었다.
“야, 어느 다방이냐?”
“뭐?”
집에 가서 오랜만에 과자 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다혜는 난데없는 다방 타령에 어이가 없었다.
“다방 아니거든.”
“그래? 하긴 다방 애 같지는 않다. 야, 근데 스쿠터 뒤에 과자는 뭐냐?”
다혜는 스쿠터 뒤를 확인했다.
박스 틈이 약간 벌어져 과자 봉지 일부가 삐죽 나와 있었다.
“과자 처음 봐? 과자가 과자지 뭐냐니? 그리고 왜 반말이야?”
“오오, 화내는데? 무섭다 그치?”
“그만해라, 자식아. 그러다 진짜 이 언니 화나겠다. 아가씨, 날씨도 좋은데 함께 놀러 갈래요?”
오토바이 뒤에 탄 사내가 눈웃음을 치며 말하자 다혜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앞으로 갔다.
신호가 바뀐 것이다.
그녀가 대꾸 없이 출발하자 오토바이가 그녀를 급히 쫓아왔다.
“아가씨! 시간 좀 내줘!”
“지금 어려우면 전화번호라도 알려 줘! 나중에 만나자고. 우리 얼굴 괜찮잖아!”
그들은 대답 없이 스쿠터를 모는 다혜를 쫓아 계속 말을 붙였다.
다혜는 금산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국도변까지 오토바이가 한참을 쫓아오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친다. 그만해라.”
“그러니까 잠시만 얘기 좀 하자고.”
그들은 오토바이를 위협적으로 몰며 계속 소리쳤다.
다혜는 결국 스쿠터를 국도변에 세웠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사내들이 오토바이를 세우고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딱밤 맞기 하는 거야. 그래서 먼저 입으로 소리 내는 사람이 지는 걸로. 만약에 당신들이 이기면 전화번호 알려 줄게. 어때, 할 거야?”
사내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약해 보이는 여자의 손힘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이건 해보나 마나였다.
“먼저 쳐. 우린 나중에 칠게.”
“알았어.”
다혜는 스쿠터에서 내리지도 않고 옆에 선 사내의 이마에 중지를 가볍게 날렸다.
빠각!
돌로 호두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밀려오는 엄청난 고통에 사내의 얼굴이 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참아 보려 했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거대한 신음 소리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아!”
짐승의 포효 소리를 내며 사내는 국도 옆, 인삼밭으로 굴러떨어졌다.
“다음은 당신.”
“자, 잠깐만.”
“참을 자신 없어?”
그녀가 자존심을 자극하자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다가 이마를 내밀었다.
“해 봐! 대신 내 차례가 되면 넌 죽는 거야! 절대 안 봐준다. 알았어?”
“가까이 와.”
빠각!
섬뜩한 소리가 났고, 호기롭게 다혜를 노려보던 사내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갔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을 때보다 백배는 더 아픈 고통이 이마를 시작해서 온몸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발가락이 비비 꼬이기까지 했다.
이건 인간이 견딜 고통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이마를 감싸며 그 역시 인근 인삼밭으로 굴러떨어졌다.
“살살 때렸는데, 왜 저렇게 아파하지?”
다혜는 배시시 웃으며 스쿠터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시골 마을에 있었는데,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혼자서 집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워 두고 도현과 함께 작은 마을에 들어선 박성태는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도현은 산을 뒤로하고 서 있는 낡은 집을 바라봤다.
녹이 곳곳에 슨 파란 대문 뒤로는 마당이 보였고, 빨랫줄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건 몇 장이 보였다.
“여기라고요?”
“네, 아가씨는 이곳에서 사십니다.”
도현은 여느 시골집과 다름없는 모습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가 생각하는 그림은 시골에 별장의 모습을 한 수련장에서 회장의 손녀가 무예를 수련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회장과 손녀가 왜 이렇게 다른 환경에 살고 있는 거지?’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경사진 곳을 올라오는 스쿠터 한 대가 있었다.
오랜만에 금산 시내를 들러 책과 과자를 사 온 다혜였다.
“저분이 아가씨입니다.”
박성태가 점점 가까워지는 스쿠터를 보며 도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쿠터가 그들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아가씨?”
박성태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런 인사 부담되니까 하지 마세요. 아가씨란 말도요.”
다혜는 불편한 기색으로 스쿠터에서 내리다가 옆에 서 있는 도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은 이분인가요?”
“네, 아가씨.”
“상당히 젊은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
다혜가 스스럼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헬멧 사이로 엿보이는 여성스러운 미모와는 달리 그녀의 손은 단단해 보였다.
잠시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도현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전 다혜예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발랄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한 그녀는 대문을 활짝 열고 스쿠터를 밀고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현은 박성태에게 물었다.
“사부란 분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아가씨를 이기고 난 다음에 직접 물어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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