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디 임팩트 2권 24화
“태화실업 회장 만나면 돈 좀 더 달라고 해.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말이야.”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이 실장은 윤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도현에게 전했었다.
다혜의 사부와 대결을 두고 수련에 몰두해야 한다며 도현은 거부했지만, 이 실장은 잠깐이면 되니 시간을 꼭 내 달라고 했다.
“회사 하나 달라고 해?”
도현의 농담에 용주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좋지.”
넉살 좋게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도복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다.
“야! 벌써 새벽이다. 좀 쉬어!”
“그럴 시간 없어.”
낮에 다혜와 싸울 때 느꼈던 부족한 점을 메우고 새로 깨친 검의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그는 곧장 수련에 들어갔다.
태화실업 윤일주 회장의 자택은 서울 성북동이지만, 요즘은 용인 태화컨트리클럽 주변에 새로 지은 별장에서 머무는 날이 길어졌다.
이 실장이 보낸 차를 타고 풍경이 수려하기로 소문난 태화컨트리클럽을 지나 얼마간 더 가자 작은 숲 안에 지어진 윤 회장의 별장이 보였다.
아담한 정원을 갖춘 숲 속의 별장은 나무 사이로 지나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고요했다.
차에서 내린 도현은 산사의 고즈넉함을 풍기는 별장과 주변 경관에 잠시 취해 있다가 별장 앞에서 기다리는 이 실장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들어가 보세요. 안에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현은 이 실장이 가리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처럼 꾸며진 아늑한 방 안엔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도현이 문을 닫고 가까이 오자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현을 쳐다봤다.
“어서 오시게. 백도현 관장이시지?”
“네, 맞습니다.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도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깡마른 인상의 주름이 가득한 윤 회장은 도현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한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지.”
도현은 다탁으로 쓰이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윤 회장과 마주 앉았다.
허리를 펴고 반듯하게 앉은 자세로 눈동자를 산만하게 움직이지 않고 담담히 바라보는 도현의 진중한 모습을 눈여겨보던 윤 회장은 가정부가 차를 놓고 나가자 손짓을 했다.
“드시게. 괜찮은 차야.”
“네.”
도현은 묵묵히 차만 마셨고, 윤 회장 역시 별말 없이 차를 음미했다.
부른 사람이 말이 없으니 도현은 말이 없다지만, 그를 부른 당사자인 윤 회장이 말이 없는 건 이상했다.
하지만 도현은 언젠간 말을 하겠지 싶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찻잔을 반 정도 비워 갈 때쯤, 윤 회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혜의 사부를 이길 자신이 있는가?”
“겪지 못해, 예단할 수 없습니다.”
“다혜와 검을 겨뤄 봤으면 그로 미루어 느끼는 바가 있었을 텐데.”
“알 수 없습니다.”
“다혜를 이긴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내가 백 관장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커.”
윤 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대결을 언급하지 않았고, 도현도 함부로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침묵 속에서 찻잔을 비워 갔다.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라겠네. 수고하시게.”
“안녕히 계십시오.”
윤 회장과 차 한잔 마시고 나온 도현은 거실에서 기다리는 이 실장과 함께 현관을 나와 정원을 걸었다.
“이번 대결은 정말 회장님께는 중요한 경기입니다. 아가씨를 이기신 것처럼 이번에도 반드시 이겨 주십시오.”
“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받으세요.”
도현은 옆에서 걷던 이 실장이 흰 봉투를 내밀자 걸음을 멈추고 봉투를 내려다봤다.
“뭡니까?”
“아가씨를 이긴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회장님께서 특별히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 두십시오.”
도현은 다혜의 사부와 대결을 앞두고 격려 차원에서 주는 의미로 알고 봉투를 받았다.
별장 앞에 대기 중인 차에 도현이 오르려 할 때 이 실장이 말했다.
“이십억입니다.”
“네?”
“이겼을 때 드리는 보상금 말입니다. 두 배로 올렸으니, 꼭 이겨 주십시오.”
이 실장의 강한 눈빛에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꼼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이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이십억이라. 싸움 한번에 이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 건가?’
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윤 회장 측은 그들대로 사정이 있으니 이십억이라는 돈을 내건 걸 것이고, 다혜는 사부를 절대 못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도현은 돈을 떠나서 승부에서는 절대 지고 싶어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 또한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정도일까?’
얼굴 본 적 없는 다혜의 사부를 머릿속에서 그리며 그는 차가 숲에서 벗어날 때쯤, 조금 전 받은 봉투를 꺼내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억 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용주는 삼촌이 맡겨 놓았던 개를 보기 위해 며칠 만에 다시 삼촌 집 인근에 사는 동네 주민을 찾아갔다.
얼마 전에 찾아갔을 때는 개가 매가리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자신을 우습게 아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 그는 흰돌이 상태가 어떤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가평 시골을 다시 찾은 것이다.
“오늘도 이상하면 동물 병원이라도 데리고 가 봐야지.”
담배를 끈 그는 텃밭을 지나 경운기가 보이는 집으로 향했다.
널찍한 마당에 있는 개 몇 마리가 그를 보고 짖어 댔다.
“어? 흰돌이가 안 보이네?”
용주는 마당을 빙 둘러보며 흰돌이를 불렀다.
“흰돌아, 흰돌아!”
“총각 왔어?”
집 안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흰돌이가 안 보이네요?”
“흰돌이 갔어.”
“가요? 어디로요? 혹시 죽었다는 말씀이세요?”
며칠 전 찾아왔을 때 보았던 힘없는 흰돌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용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왜 죽어, 죽긴. 주인 찾아왔다고 좋아 날뛰던데.”
“주인요?”
“총각 삼촌 말이야.”
할머니의 대답에 용주는 그제야 얼굴을 펴며 긴장을 놓았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이거 드세요.”
용주는 손에든 봉지를 마루 위에 서 있는 할머니에게 드렸다.
“사탕이네?”
비닐봉지 안에 든 여러 종류의 사탕을 보며 할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사탕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올 때 좀 사 왔습니다. 많이 드시면 건강에 해로우니까, 조금씩 드세요.”
“고마워, 총각.”
도현의 차를 몰고 온 용주는 자갈이 깔린 마당에 차를 세우고는 개집으로 걸어갔다.
흰돌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반가운 척 좀 해라. 걱정돼서 찾아왔더니 말이야. 몸은 괜찮아?”
덩치 큰 개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던 그는 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오셨으면 전화라도 해 주셔야지. 삼촌이나 흰돌이 너나 참 너무하다. 정말.”
용주는 입이 나온 상태로 문을 열어 주는 삼촌을 응시했다. 아프리카에서 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볼살이 쏙 들어가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검붉게 탄 상태였다.
“언제 귀국하셨어요?”
“이틀 됐다.”
“그럼 연락이도 좀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들어와.”
삼촌이 돌아서자 용주는 투덜대며 안으로 들어서다 슬며시 물었다.
“가신 일은요?”
“내가 아프리카에 왜 갔는지 알고나 묻는 거냐?”
조 박사는 소파에 몸을 묻으며 지친 기색으로 용주를 쳐다봤다.
“그거야 당연히 차원 이동 장치 때문이 아니에요? 문양이 그려진 스톤 찾으시려고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연구를 겸해서 간 거야.”
용주는 삼촌의 표정을 보고는 아프리카에서 별 수확이 없었다는 걸 눈치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용주가 말했다.
“나이를 먹어선지 움직이는 게 예전만 못해. 하아.”
아직 아프리카를 다녀온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조 박사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넌 어쩌다 칼에 찔렸어?”
뒤늦게 조 박사는 조카가 칼에 찔렸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게 됐어요.”
용주는 빚 때문에 우연찮게 벌어진 일이라고 차마 말은 못 하고 자세한 설명 없이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가 삼촌에게 그동안 얻어 쓴 돈이 사실 적지 않아서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혹시 도현이 아버지 일과 얽혀서 그런 건 아니고?”
“에이, 아니에요, 삼촌.”
고개를 끄덕이던 조 박사는 도현의 팔에 새겨진 타투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그것만으로 차원 게이트를 열고 닫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고, 그의 연구의 살아 있는 증거물이기도 했다.
“도현이는 별일 없지?”
“아니요. 삼촌이 아프리카에 가 계시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심상치 않은 조카의 말에 조 박사는 소파에 깊이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무슨 일들?”
“타투가 사라졌어요.”
“뭐라고?”
도장에 도현과 용주, 조 박사가 한데 모였다.
낮에 용주로부터 타투가 사라졌고, 도현이 이계를 왔다 갔다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조 박사는 몸이 힘들었지만 직접 도현을 찾아왔다.
“굉장해. 몬스터가 살고 그들을 잡아서 돈을 벌어 왔단 말이지?”
눈을 반짝이며 도현의 이계 여행기를 듣던 조 박사는 아이처럼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그곳에서 나온 금화고?”
“네, 박사님.”
도현은 기념으로 남겨 둔 금화를 박사에게 줬다.
금화를 살펴보는 그에게 도현은 타투를 통해 몬스터의 기운이 흡수됐던 사실도 숨기지 않고 말해 줬다.
차원을 오가는 문을 만들어 주는 타투가 그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타투가 사라지는 데 영향을 미친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연구에 도움이 돼서 타투가 사라진 이유를 조 박사가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기적처럼 그가 이계로 다시 갈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초고대 문명은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네. 내가 차원 이동 장치를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엔 전기가 아닌 문양이 그려진 스톤이 에너지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 줘야 발동이 되지.”
타투가 사라진 도현의 왼팔을 자세히 살펴보던 조 박사는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타투가 사라진 이유를 현재로선 뭐라고 단정 지어 얘기해 줄 수가 없구만. 시간을 가지고 연구를 해 보세.”
“알겠습니다, 박사님. 그리고 고맙습니다.”
도현의 새삼스러운 인사에 조 박사가 헛기침을 했다.
“뭐가 고맙다는 말인가?”
“박사님이 아니었으면 이계를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게는 여러모로 큰 도움을 준 곳입니다.”
“허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도현의 진심 어린 칭찬에 조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혹사당했던 몸이 금방 회복되는 것 같았다.
“삼촌, 스톤 말이에요. 우리가 못 찾아서 그렇지, 어딘가에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드넓은 사하라 사막에서 바늘 한 개를 찾아보라면 찾을 수 있겠냐?”
“그 바늘을 찾으러 삼촌도 이번에 아프리카에 다녀오신 게 아닙니까? 차원 이동 장치를 이대로 포기하기 아쉬우니까요.”
“흠, 그야 그렇지.”
“제가 돕겠습니다. 저랑 함께 스톤을 찾으러 가요, 삼촌.”
“일없다. 너랑 돌아다니느니 혼자가 백번 낫지. 그리고 지난번 스톤은 그야말로 천운으로 내가 부족장에게 우연히 구한 거야. 또다시 그런 천운을 바라고 너를 데리고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넌 너의 인생을 살아. 삼촌 부담 주지 말고.”
조 박사는 엄한 눈빛으로 용주에게 말했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피스텔을 얻은 홍영은 땀을 흘리며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상해 집에서 필요한 물건들만 보낸다고는 했지만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어수선했던 방 안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정리가 됐고, 얼마 뒤 빈 박스를 접어 현관문 쪽에 놓는 일로 다 마무리가 됐다.
“후우, 이제 다 끝났네.”
이마에 땀을 손등으로 훔치던 그녀는 초인종 소리에 밖을 확인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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