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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52화 (52/575)

[52] 디 임팩트 3권 2화

다혜의 사부는 검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바위 사이에 드러난 땅바닥에 검을 깊숙이 박아 넣고는 도현을 돌아봤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 한국에서 내공을 가진 고수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배웠나?”

다혜 사부는 바위 위에 엉덩이를 걸치며 물었다.

“돌아가신 부친께 배웠습니다.”

“내공도?”

“그런 셈이죠. 다혜 씨 사부님께서는 무예를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도현이 계곡물을 건너오며 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떨어진 피가 계곡물을 붉게 만들었다.

그 피를 보며 다혜 사부가 자부심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난, 내 스스로 무예를 찾아 익혔다.”

“스스로요?”

도현이 놀란 눈빛을 지었다.

“그렇다.”

짤막한 대답 속에는 힘든 고통을 이겨 낸 자만이 갖는 특유의 긍지가 느껴졌다.

“부친을 통해 배웠다니, 넌 그 수고로움을 알 길이 없을 거다.”

도현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본인만이 알겠지. 그만 내려가 봐.”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재도전? 다음에 만나면 나를 꺾을 수 있을 것 같나?”

“적어도 오늘 같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을 노려보던 다혜의 사부는 바위 위에서 일어나 바닥에 꽂아 둔 검을 뽑았다.

“다혜가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이상한 약속을 자기 할아버지와 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오늘 너와 검을 나누었을 뿐이다. 이 이상은 기대하지 마.”

“제가 아니더라도 태화실업 회장은 분명히 또 다른 사람을 찾아내 보낼 겁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다혜 사부는 그 말을 남겨 놓고 천천히 산속으로 사라져 갔고, 뒤에 남은 도현은 크게 외쳤다.

“다시 뵙겠습니다!”

다혜 사부가 사라진 숲을 한동안 바라보던 도현은 그와 싸웠던 골짜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심 중국의 검선문과 같은 것이 한국에도 있어서 그런 곳에서 무예를 익힌 건 아닐까 추측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길을 찾아서 내공도 익히고 뛰어난 검술도 익힌 것이다.

‘목소리로 보아 노인은 아니었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도현은 끝내 신분을 감추고 도깨비탈을 쓴 채 사라진 다혜 사부의 얼굴을 궁금해하다가 목검을 챙겨 산 아래로 향했다.

옆구리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피가 적지 않게 흘러나와서 도현의 바지 곳곳엔 피가 묻어 있었고, 부서진 칼 조각들이 오른팔에 만든 상처도 가볍지만은 않아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도현의 상처를 살피던 다혜는 분홍색 헬멧을 머리에 썼다.

“뒤에 탈 수 있겠어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에 탔다.

“써요.”

그녀가 내미는 노란색 헬멧을 받은 도현은 천천히 머리에 썼다.

올 때도 느꼈지만 이 헬멧은 너무 작아서 머리에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옆구리와 팔의 통증보다도 은근한 그 느낌이 더 싫었다.

“이건 누가 사용하던 겁니까?”

“우리 엄마요. 그래서 좀 작을지도 몰라요.”

“좀이 아니라 상당히 작습니다.”

“대충 참아요. 그래도 돌아가신 우리 엄마 유품 중 아끼는 걸 쓰라고 한 거니까요. 출발해요.”

그녀는 부릉거리는 스쿠터를 몰고서 비포장 길을 빠져나와 아스팔트가 깔린 국도에 접어들었다.

말없이 운전만 하던 그녀가 옆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반쯤 돌려 말했다.

“왜 진검으로 싸웠어요? 사부님 제안을 따를 필요는 없었잖아요.”

“전력으로 싸워 보고 싶었어요.”

“그만큼 위험하잖아요. 목숨까지 걸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겉옷으로 옆구리 상처를 휘감아 지혈을 시킨 도현을 보며 코를 찡그렸다.

“아무튼 미안해요. 사부님이 설마 진검으로 그러실 줄은 저도 몰랐어요.”

“다혜 씨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죠. 이건 내가 받아들인 정정당당한 승부였으니까요.”

“팔 하나가 잘려도 그런 말 할 거예요?”

“네.”

“피이, 허세는.”

다혜는 고개를 돌려 다시 스쿠터 운전하는 데 집중했고, 도현은 시골길에 핀 코스모스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자라면 팔을 하나 내놓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실력을 가다듬고 더 높은 곳으로 가는 여정 중 일부일 뿐이었다.

다만, 상대를 이기지 못해 태화실업 이 실장이 약속한 이십억이라는 거액을 받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남았다.

도현은 건물을 매입하기 위한 자금 중 부족한 부분을 상금으로 보충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오늘 상대와 맞서 싸워 보니 단기간에 그를 이긴다는 보장은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아름답게 흔들리는 정경을 보며 자신의 부상도 잊고 오늘 벌인 대결을 곱씹고 있던 도현은 문득 스쿠터가 자신의 차가 세워진 마을 입구를 그대로 지나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혜 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병원에요. 그 몸으로 바로 운전을 할 순 없을 거 아니에요. 상처도 꿰매고 치료도 좀 해야죠.”

도현은 부상당한 옆구리와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고통을 참고 운전해서 가까운 병원으로 못 갈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오토바이를 몰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그녀의 호의를 굳이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 말대로 운전을 하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가는 게 회복에는 더 좋았기 때문이다.

부우웅.

두 사람을 태운 스쿠터는 안간힘을 내며 병원으로 가고 있었지만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고, 한참을 달린 끝에야 금산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쿠르릉, 크릉 크릉.

금산 시내를 벗어나는 삼거리에서 신호에 잡힌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오토바이에는 젊은 사내 둘이 타고 있었다.

“아, 젠장! 여기서 신호 탈 때마다 그년 생각난다니까.”

“죽일 년이지.”

뒤에 동승한 사내가 욕을 하며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얼마 전까지 부기가 가라앉지 않아 세수할 때마다 손바닥에 그 느낌이 가득 전해 왔고, 그럴 때마다 만나면 꼭 복수하리라고 다짐을 했다.

“뭐 하는 계집애기에 그렇게 손이 매울까?”

“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앞에서 오토바이 핸들을 잡고 있던 사내가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망치로 때린 거라니까. 그러지 않고는 우리 머리에 그런 충격을 줄 수가 없어. 그것도 여자가.”

“그럴까? 난 망치는 못 봤는데.”

뒤에 탄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그년 미모에 혹해서 주의가 분산돼서 그랬을 거야. 아주 잡히기만 해 봐라. 그냥 확 머리를 다 밀어 버릴 테니까. 겁도 없이 연장질을 해?”

둘이 다혜를 한창 욕하고 있을 때 그들 옆에 스쿠터 한 대가 섰다.

어둑어둑해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스쿠터에 탄 분홍색 헬멧의 여자가 누군지 금세 알아챘다.

“야! 너!”

“이 죽일 년!”

다혜가 알고 있는 병원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고 나온 도현은 나란히 선 오토바이 운전자와 그 뒤에 탄 사내가 다혜를 보며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다혜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나저나 옷은 잘 맞아요?”

도현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동안 그녀는 피가 묻고 찢어진 옷 대신 도현이 새로 갈아입을 옷들을 사 가지고 왔었다.

“내가 태어나서 남자 옷을 다 사 주고. 백 관장님, 명심하세요. 다음에는 사부님께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 전 병원을 나서며 도현은 적당한 시기에 재도전한다는 말을 꺼냈고, 그 말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게 아주 개무시하네. 야! 내 말 안 들려?”

욕을 하고 있는 자신들을 본척만척하며 뒤에 탄 사내와 뭔가 얘기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발끈한 그들이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신호가 바뀌었고, 그녀는 쌩하고 출발해 버렸다.

“흐흐, 스쿠터로 달려 봤자지.”

그들은 비릿하게 웃으며 오토바이를 몰아 멀찍이서 뒤따라갔다. 그러다 차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국도에 다다르자 속도를 올려 다혜의 스쿠터를 따라잡았다.

“야, 이 꼴통 년아! 스쿠터 세워 봐! 세워 보라고!”

“이 사악한 년!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도현은 옆에서 나란히 달리며 욕을 해 대는 사내들의 행동에 더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왜 욕을 합니까?”

“내가 너한테 했냐, 이 개자식아! 넌 머리 처박고 가만히 있어. 알았어? 멀쩡한 새끼가 지가 모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모는 스쿠터에 타고 있어? 에라이, 머저리 새끼야!”

“너희들 큰일 났다. 내 뒤에 탄 사람 엄청 무서운 사람이거든.”

다혜의 말에 오토바이에 탄 사내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한번 붙어 보자고. 그러니까 스쿠터 세워. 세우라고, 이 망할 년아!”

“싫어.”

“왜!”

“너희들 불쌍해서 그냥 가려고.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

“이, 이년이 진짜 미쳤어. 넌 죽었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들은 위협적으로 스쿠터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안 세우면 진짜 사고 낸다!”

도현은 악이 받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저들의 모습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다혜 씨,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얼마 전에 과자 사 오는데 위험하게 운전하면서 치근대잖아요. 그래서 딱밤 맞기 게임을 하자고 했죠.”

도현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가볍게 웃고 말았다.

나무에 손자국을 남길 만큼 그녀의 손힘은 셌다. 그런 그녀에게 이마를 맞았으니, 아마도 머리가 뚫리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사내들이 저렇게 약이 바짝 오른 모습이 일견 이해가 됐다.

하지만 맞을 짓을 한 건 애초에 저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그 복수를 한다고 위험한 곡예 운전을 하는 걸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다혜 씨, 세워요.”

“에이, 그냥 가요. 쟤들 불쌍하잖아요.”

“이러다 사고 납니다. 세워요.”

“야, 너희들! 우리 백 관장님 화나셨다! 각오해!”

“지랄 말고 알았으니까, 얼른 세우기나 해!”

잠시 후 다혜는 차가 잘 다니지 않는 시골길에 스쿠터를 세웠고, 젊은 사내들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껄렁껄렁한 모습으로 잔뜩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어떻게 해 줄까? 엉? 확 씹어서 바닥에 패대기쳐 줄까?”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주변에 조직에 들어간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쭈, 안 내리지? 우리가 우습냐? 우스워? 에라이!”

사내들은 오토바이에서 내리기 전에 사전에 어떻게 하기로 약속을 정했는지, 시끄럽게 말을 하다가 기습적으로 도현에게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주먹을 반도 채 뻗기 전에 도현의 목검이 그들의 이마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빠각! 빠각!

경쾌한 소리가 뒤따랐고, 사내들은 목검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상태로 이게 무슨 일인지 한참을 생각하던 그들은 갑자기 솟구치는 이마의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이런 젠장! 또 이마를 맞았어!”

“으흑흑, 지, 지난번보다 더, 더 아파. 미치도록 아파, 흐흑.”

이마를 비비고 문지르고 난리 법석을 떨며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들 앞에 도현의 신발이 보였다.

“일어서.”

“…….”

“일어서.”

“닥쳐, 이 새끼야!”

벌떡 일어선 그들은 도현에게 달려들다가 또다시 이마를 한 대씩 맞고 뒤로 넘어갔다.

정확히 조금 전 맞은 그 자리였고,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어서.”

도현의 목검이 다시 움직이려고 하자 그들은 번개처럼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몸을 숙이며 손으로 마구 이마를 비벼 댔다. 그냥 아픔을 참기에는 너무 견디기 어려웠다.

“앞으로 눈에 띄지 마.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형님!”

“누가 형님이야.”

도현이 목검을 쳐들자 움찔한 그들이 뒤로 물러났다.

“가.”

사내들은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다닥 오토바이로 뛰어갔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몰고 가기에는 이마의 고통이 쉽게 가시지 않아서 그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오토바이 옆에 주저앉아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아 내고야 말았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현은 다혜가 건네는 노란 헬멧을 다시 머리에 쓰고 그녀 뒤에 탔다.

“그러기에 왜 따라와서. 바보들.”

다혜는 울고 있는 오토바이 사내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 스쿠터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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