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디 임팩트 3권 3화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도현이 스쿠터에서 내리며 말했다.
“고맙긴요. 근데 정말 사부님께 재도전할 거예요?”
“네.”
“다시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해 봐야죠.”
“쳇,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한번 진 사람이 이길 때까지 재도전한다는 건 좀 그러네요. 마치 요행을 한 번 바라고 덤비는 것 같잖아요.”
“그렇게 보입니까?”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노란 헬멧을 벗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한번 졌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물러나는 게 무인의 자세지. 내공까지 수련한 검사가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다혜 씨를 다시 이기고 도전하면 되겠어요?”
“정말 이럴 거예요?”
다혜는 도현이 건네는 헬멧을 받으며 슬쩍 째려봤다.
“혹시 돈 때문이에요? 어떡하든 우리 사부님을 이겨야 할 정도로 돈이 필요해요?”
“이십억이 적은 돈은 아니죠.”
돈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이십억요? 십억 아니었어요?”
그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일전에 그녀는 다른 도전자와 겨루면서 이한규 실장이 그들에게 약속한 조건을 슬쩍 캐물어 알아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십억이었다.
“두 배로 올랐습니다.”
“이십억이라니. 후우, 얼마 뒤면 사십억이 될 수도 있겠네요.”
다혜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용하던 노란색 헬멧을 내려다봤다.
그 헬멧 위로 태화실업 회장 윤일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나무처럼 마르고 고집스러운 얼굴의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이후 찾아와 서울로 올라오라는 제의를 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그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윤 회장의 방문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압박하는 윤 회장에게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과 사부를 검으로 겨뤄 이긴다면 그때는 서울로 올라가겠지만, 그 전까지는 그녀를 조용히 홀로 살도록 배려해 줘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자신의 실력과 사부의 존재를 믿는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이런 조건을 내걸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철없는 행동이었다.
돈의 힘이 대단하긴 한지 그녀를 뛰어넘는 검의 고수인 백 관장이 나타난 것이다.
비록 오늘 사부님에게는 패했지만,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돈의 힘을 빌린 윤 회장이 앞으로 어떤 고수들을 찾아내 그녀에게 보낼지 슬슬 걱정이 들었다.
쾌활함을 잃지 않았던 다혜가 가라앉은 얼굴로 헬멧을 내려다보고 있자, 도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다혜 씨. 할아버지와 어떤 일로 이런 대결을 벌이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습니다.”
“왜요? 정말 돈 때문이에요?”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이 왼발은 돈 때문에 찾아온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 오른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주위엔 검을 교환하고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내공을 사용하는 검의 고수를 한국에서 만난 건 다혜 씨가 처음이고, 그리고 다혜 씨 사부님이 두 번째죠. 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다혜는 뜨거운 눈빛을 뿌리는 도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가요, 백 관장님.”
부우우웅.
스쿠터를 몰고 그녀가 마을 안으로 사라지자, 홀로 남은 도현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사 준 남방과 바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하러 온 그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옷을 사 주기까지 했다.
진검을 사용한 사부 때문에 미안해서 그런 거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차갑지 않은 여자였다.
“내가 나쁜 놈인가?”
도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차에 올랐다.
도현이 사부를 이기고 하늘을 보며 미친 듯이 웃고 있을 때, 그녀는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나쁜 자식.”
베개를 베고 눈을 멀뚱멀뚱 뜨며 악몽의 후유증을 떨쳐 내던 다혜는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재빨리 이불을 걷어 내고 일어났다.
“누구냐!”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마루에 선 그녀의 손에는 날이 선 진검이 들려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밖에까지 다 들린다.”
어두운 마당에 서 있는 사람이 말했다.
“사부님.”
“게다가 잠꼬대까지 크게 하고.”
“악몽을 꿨거든요.”
그녀는 검을 거두며 답했다.
“무슨 악몽?”
“그냥 이상한 꿈이에요. 들어오세요, 사부님.”
어둠 속에 서 있던 다혜의 사부는 천천히 불이 켜진 마루에 다가갔고, 곧 그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 외모가 단정하지만 표정이 없어 보여 굉장히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언뜻 보면 40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50이 넘은 사람이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그는 신발을 벗고 다혜의 이부자리가 그대로 펼쳐져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 근처에 먹다 만 과자 봉지가 보이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다혜는 실실 웃으며 발끝으로 과자 봉지를 툭 차서 방구석으로 밀어낸 뒤 이불을 개서 농에 넣었다.
“과자 좀 줄여.”
“네.”
다혜는 부엌에서 차를 타 와 사부 앞에 내려놨다. 그리고 표정 없는 사부의 옆에 얌전히 앉으며 눈치를 봤다.
“오늘 너 때문에 내가 아까운 힘을 소비했다.”
“죄송해요, 사부님.”
풀 죽은 제자의 모습에 한석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를 입에 댔다.
“사부님, 그런데 왜 백 관장과 진검으로 승부를 겨루신 거예요? 제게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다혜의 물음에 한석호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놨다.
“판은 네가 벌여 놓고 날 탓하는 것 같구나.”
“죄송해요. 그래도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문제가 되잖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혜가 답했다.
“그자가 네게 뭐라고 하던?”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도리어 사부님께 다시 도전한다고 하던데요.”
“흥! 건방진 녀석.”
한석호는 그의 뒤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치던 도현의 당당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부님, 백 관장 솜씨는 어때 보였어요?”
그는 제자의 질문에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답했다.
“뛰어난 자긴 했다. 두려움 없이 나와 검을 마주하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어.”
사부의 칭찬에 다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는 어때요? 저도 진검 앞에서 두려움이 없잖아요.”
“달라. 다혜 넌, 내가 널 다치게 하지 않을 줄 알고 있으니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는 아니었다. 난 그에게 인정사정없이 검을 날렸고, 그 역시 내게 냉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와 난 진짜 검을 나눈 거야.”
의외로 도현을 높이 평가하는 말에 다혜는 팔짱을 끼며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도 감히 사부님을 이길 수는 없겠죠? 앞으로도요.”
“위기의 순간에 그는 더욱 강해지는 면모를 보였다.”
한석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신의 검을 피하기 위해 폭발적인 빠름을 발휘해 계곡을 넘어가던 도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의지도 강하고, 검술의 조예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오늘 그가 나에게 쉽게 패한 건, 결정적인 한 번의 실수 때문이었어. 그게 아니었다면 그와 난 긴 승부를 이어 갔겠지.”
“에이, 설마요. 저도 백 관장하고 싸워 봤잖아요. 강한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사부님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겠어요.”
다혜가 믿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사부를 쳐다봤다.
“긴장했구나.”
한석호가 방 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다혜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아니요.”
“내가 지면 할아버지에게 가야 되니까. 그렇지?”
“안 지실 거잖아요.”
“이게 오늘 내가 백 관장과 싸우며 입은 부상이다.”
사부가 붕대를 감은 어깨를 보여 주자 그녀는 놀라 입이 벌어졌다.
“사부님도 다치셨어요?”
“그와의 검술 깊이 차이는 종이 한 장 정도다. 이 차이를 평생 가도 극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어 단번에 극복하는 부류도 있다. 그는 어떤 부류일 것 같으냐?”
“전자요.”
다혜가 냉큼 말을 받아 대답했다.
“아니, 후자다. 그러니 넌, 더는 사부 고생시키지 말고 서울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가도록 해. 도대체 이 무슨 엉뚱한 일들이야.”
옷으로 어깨를 가리며 한석호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사부님. 제가 왜 그러는지 아시면서.”
“네 할아버지는 네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 잘못이 있는 사람은 죽은 네 아버지지 않냐.”
“외삼촌, 정말 이러시기예요! 전 가기 싫다고요. 여기서 더 살래요.”
눈물을 글썽이는 다혜를 보며 한석호는 탄식을 했다.
“다혜야,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예를 수련하느라고 집만 비우지 않았다면, 네 아버지는 비행기 사고로 죽기 전에, 내 손에 먼저 박살이 났을 거다. 그리고 네 엄마와 강제로라도 살게 했겠지. 하지만 난 그때 여기에 없었다. 그 아쉬움과 아픔이 가시지 않는구나. 지금까지도.”
한석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스쿠터를 타고 즐거워하던 모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한동안 아픈 가슴을 삭이던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이만하면 됐다. 어머니를 그만 놓아주고, 할아버지를 찾아가. 죽은 사람도 그걸 원하고 있을 테니까.”
하나뿐인 조카를 평생 시골에서 홀로 살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여동생은 시골에서 조용히 살다 갔지만, 제자이자 조카인 다혜는 그의 여동생이 못다 한 삶을 화려하게 꽃피우며 아름답게 살았으면 했다.
하지만 다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너를 깊이 사랑하는 게 옆에 있는 난 보인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일은 아쉽게 끝났지만, 할아버지와 너와의 관계까지 그렇게 돼서야 되겠니? 다혜야.”
“네, 사부님.”
그녀는 외삼촌이란 말보다 훨씬 익숙한 사부란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천륜이다. 부모의 아픈 일들은 네가 이쯤에서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
“…….”
여전히 대답 없는 다혜를 보던 한석호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자라.”
한석호가 나가자 다혜는 농에 있는 이불을 다시 펴서 그 위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외삼촌이 오늘처럼 감정을 크게 드러내 놓고 그녀에게 할아버지를 언급한 건 처음이었다.
“어쩌지?”
용주는 쉬지 않고 호검술을 연마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군 제대 후 몇 년을 검을 놓다시피 하며 지내 왔지만, 최근에는 검을 잡는 시간이 점점 늘고 있는 중이었다.
“하앗!”
새로 구입한 목각 인형의 몸통과 팔다리 사이로 날카롭게 검을 찌르고 베던 그는 뒤로 텀블링을 돌며 허공에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백남식 관장이 ‘널 아들처럼 대해 주마.’라는 말과 함께 혹독하게 가르친 호검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몸에서 점점 발휘되고 있었다. 용주는 검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가는 느낌에 지칠 줄 모르고 검에 빠져 갔다.
“태선군의 팔 한 짝은 내가 가지고 간다.”
도현이 강해지고 있는데, 자신만 뒤처질 수 없었다.
그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태선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며 칼날 같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검 수련에 매진했다.
그 모습을 언제 들어왔는지 도현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몸이 가벼우면서도 하체는 바위처럼 묵직한 맛이 있어서 아버지는 생전에 용주를 여러 번 칭찬했었다.
군 제대 후 검을 놓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친구인 용주는 상당한 깊이에 도달한 검의 고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늦지 않았지.’
도현은 온몸으로 열정의 꽃을 피우며 검과 하나가 되어 있는 친구를 바라보며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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