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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54화 (54/575)

[54] 디 임팩트 3권 4화

친구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신발도 벗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지만, 잠시 후 용주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언제 왔냐?”

“조금 전에. 보기 좋다, 땀 흘리는 모습이.”

“자식, 쑥스럽게. 아무렴 너만 하겠냐.”

검을 거두고 다가온 용주는 눈으로 흘러들어 가는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 내며 도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밤이 되도록 별다른 연락이 없어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피곤해 보이는 얼굴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이겼나?’

다혜 사부와의 대결 결과가 궁금했지만 그는 쉽게 묻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촌스러운 옷은 또 뭐냐? 아침에 그 옷 아니었잖아?”

“다혜 씨가 사 줬어.”

도현은 신발을 벗으며 대꾸했다.

“누가 사 줘?”

“회장 손녀.”

용주는 도현이 입고 있는 유행이 지난 체크무늬 남방과 일자 청바지를 다시 살폈다.

다혜 사부와 싸우러 간 도현이 그녀에게 옷을 얻어 입고 왔다는 게 어딘지 이상했다.

“용주야.”

“어?”

“오늘 졌다.”

도현의 담담한 말에 용주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가 빠르게 풀렸다.

“그래서 옷 사 주디? 이거 입고 집에 가라고?”

용주의 농담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남방을 벗었다.

그제야 오른팔에 감은 붕대와 허리에 감은 붕대가 용주의 눈 아래 드러났다. 멀쩡한 줄 알았는데, 옷 안에 상처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표정이 굳어진 용주를 보며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큰 상처는 아니야. 옆구리는 검이 스친 거고, 팔은 부서진 검 조각에 이곳저곳이 베이고 좀 찍혔다.”

“목검이 아니라 진검으로 한 거냐?”

“그게 맞는 상황이었어.”

도현은 옷을 다시 입으며 분한 얼굴로 서 있는 친구를 쳐다봤다.

“저녁 안 먹었지?”

“내가 가서 이 검으로 그 사부란 자를 단칼에 그냥!”

“가자, 밥 먹으러. 술도 한잔 하고.”

검을 빼 들고 소리치던 용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몸으로 술 마시자고?”

“상금은 아쉽게 됐지만, 정말 마음껏 검을 휘둘렀어. 오늘은 술을 마실 만한 날이야. 이 상처 때문에 오늘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전날 술을 마시고도 습관처럼 새벽에 눈을 뜬 도현은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움직이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검을 들고 격한 수련을 하기에는 옆구리와 오른팔의 상처가 부담이 되었다.

도깨비탈을 쓴 다혜 사부와 싸울 때는 옆구리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게 순리였다.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는 게 필요했다.

방을 나와 도장으로 향하던 그의 귀에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용주의 잠꼬대 소리가 들렸다. 그는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건물주 박 사장을 욕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박 사장! 삼십이억이라고? 크하하하! 이 사기꾼 노인네야, 어디서 피 같은 돈을 짜 먹으려고. 절대 못 줘! 삼십이억!”

도현은 잠시 친구의 잠꼬대를 듣다가 집을 나섰다.

그에게는 이계에서 번 돈과 이번에 이 실장에게 받은 돈을 합쳐 이십칠억이 넘는 돈이 있다.

큰돈이었고, 그 정도 돈이면 지방이나 시골에 땅을 사서 호검술 도장을 새로 큰 규모로 지을 수 있다.

시세보다 과한 요구를 하는 건물주가 그라고 얄밉지 않고 서운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 건물주가 갈고닦은 현실의 검이었고, 아쉬운 입장은 자신이었다.

새벽 거리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가까워지는 도장 건물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도배

다혜의 사부와 대결을 벌인 지 여러 날이 흘렀고, 옆구리와 팔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용주의 검술을 다듬어 주고 남는 시간은 조용히 명상을 하며 보내던 도현은 모처럼 검을 들고 땀을 흘릴 준비를 마쳤다.

그가 막 움직이려고 할 때, 조용한 도장 안에 진동음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검을 내리고 돌아선 그는 관장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백 관장님.

이한규 실장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도현은 금산에서 돌아오는 날 밤에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다혜의 사부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전했었다.

전화기 사이로 침묵이 흐를 만큼 그는 도현이 패했다는 사실을 아쉬워했고, 재도전하려고 한다는 그의 말에는 약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한번 졌으니 짧은 시간 안에는 그 승패를 뒤집기 어려우리라는 예상을 했을 것이다.

일주일 만에 다시 그와 통화하게 된 도현은 무슨 일로 이 실장이 전화를 했는지 궁금했다.

-백 관장님,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무슨 일 때문이신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쁘시지 않으면 모레 오후에 차를 보내겠습니다.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뗐다.

“용인의 그 별장으로 가는 겁니까?”

-네.

“그러면 차를 굳이 보내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가죠.”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시죠.

도현이 내일 윤 회장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집에서 밑반찬을 잔뜩 싸 가지고 온 용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손녀 이겼다고 준 일억을 도로 달라는 치사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달라면 줘야지.”

“미친 자식, 주긴 왜 줘, 인마! 칼까지 맞으면서 싸웠는데.”

용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치자 도현이 웃으며 보자기가 두 개인 이유를 물었다.

“한 개는 우리가 먹을 거고, 이 작은 보자기 안에 든 반찬은 홍영 씨 거. 타지에 와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냐. 이거 가지고 가서 홍영 씨 얼굴이나 슬쩍 봐. 잘 지내고 있는지.”

도현은 가만히 황금색 보자기에 감싸인 밑반찬 통을 내려다봤다.

그녀와 연락한 지는 며칠 됐다.

“반찬 주러 집으로 찾아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뭐 어때서? 가기 싫어? 싫으면 내가 가고.”

“누가 안 간데?”

“흐흐흐, 자식 내가 두렵냐?”

“맞을래?”

“폭력적인 새끼, 툭하면 친구나 때리려 하고.”

용주는 도현의 사정권에서 멀찍이 떨어지며 너스레를 떨다가 다시 다가왔다.

“고맙다, 용주야.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되는데.”

도현은 잠을 잘 때면 한 번씩 홍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버지와 홍 사부를 죽인 태선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선 다른 데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의외로 컸다. 아마도 그녀가 서울 하늘 아래 같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힘들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태선군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는 게 가식적이었고, 후에 그녀가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에 대한 것도 두려웠다.

‘차라리 있는 대로 사실을 얘기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의 삶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지겠지?’

도현은 도장 벽에 걸린 아버지 액자 사진을 올려다봤다.

‘아버지, 어쩌면 좋을까요?’

무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용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자식이 또 분위기 잡네. 내가 얘기했지. 복수는 복수고, 사랑은 사랑이라고. 아무리 관장님 사진 올려다봐야 관장님이 하실 말씀은 딱 한 가지다.”

도현이 사진에서 시선을 떼며 용주를 바라봤다.

“무슨 말씀?”

“마음 가는 대로 해라.”

차에서 내린 도현은 보자기에 싸인 반찬을 들고 홍영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냐. 이건 아닌 것 같다.”

밤 열 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찾아가는 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서로 얼굴이 붉어질 일이었다.

그것도 사전에 연락도 없이.

연락을 안 한 건 아니다. 오후부터 홍영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그녀의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다.

회사 일 때문인지, 아니면 전화기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늦은 시간이 되어 찾아온 건 밤이 되도록 연락이 닿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고, 내일이면 맛이 떨어질 몇 가지 나물 무침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용주 어머님이 신경 써서 해 주신 반찬이라 이왕이면 제대로 맛이 날 때 홍영에게 먹이고 싶었다.

그는 오피스텔 입구 근처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고, 역시나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어떡하지, 찾아가 볼까?”

그가 고민을 하는 사이 오피스텔 입구에 차 한 대가 섰다.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도로변에 선 그 차 안에는, 그토록 연락이 안 되던 홍영이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서둘러 차에서 내리려던 홍영의 팔을 김탁훈이 강하게 붙잡았다.

“너무 비싸게 굴 것 없잖아!”

“이거 놓으세요!”

홍영이 노려보자 김탁훈은 피식 웃었다.

“중국에서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너도 다 그렇고 그런 마음에 날 쫓아온 거잖아. 웬 내숭이야?”

차 안에서 수작을 부리다 홍영에게 망신을 당한 김탁훈이 이해가 안 된다는 시선으로 물었다.

“전 회사에서의 일을 보고 온 거예요. 정말 실망입니다, 실장님.”

“실망?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내가 널 힘써서 상해에서 데려온 이유가 뭐겠어? 너도 대충 짐작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이제 와서 순진한 척해?”

김탁훈은 홍영의 팔을 놓으며 조수석에 앉아 있는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툭 까놓고 얘기해 보자고. 나 좋잖아. 인물도 괜찮고, 아버지 회사도 든든하고. 나만 한 애인이 어디 있겠어. 내가 집도 사 주고 잘해 줄게. 넌 그냥 내 곁에 있어만 주면 된다니까? 응?”

속삭이던 김탁훈이 손으로 홍영의 허리를 휘감으며 키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홍영이 그의 몸을 강하게 밀어냈다.

“그만하세요! 정말 화내기 전에요!”

“이게 진짜! 꽃뱀 같은 년이 꼬리를 살살 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헛소리야. 그럼 왜 왔어, 여기는! 중국에 처박혀 있지!”

본색을 드러낸 김탁훈이 화를 벌컥 내며 홍영의 뺨을 후려쳤다.

그 순간, 운전석 창문이 박살 나며 도현의 손이 불쑥 들어와 김탁훈의 머리채를 잡아 그대로 운전대 위에 처박았다.

콰앙!

김탁훈의 코에서 길게 코피가 흘러나왔다.

“너 뭐 하는 자식이야!”

도현이 김탁훈의 머리채를 뒤로 꺾었다.

“뭐 하는 자식인데 홍영 씨 얼굴에 손을 대는 거야!”

다시 도현이 김탁훈의 머리를 운전대에 세차게 부딪혔다.

쾅!

김탁훈은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입으로 신음을 흘렸다.

“도현 씨, 그만해요. 회사 사람이에요.”

놀란 홍영이 도현의 팔을 붙잡으며 급히 말렸다.

홍영이 맞는 모습을 보고 흥분했던 도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탁훈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너, 너 이 새끼.”

김탁훈은 겨우 정신을 차리며 손으로 흘러내리는 코피를 막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운전석 옆에 머리를 들이밀고 서 있는 도현이 똑똑히 보였다.

“날 때렸어?”

“너야말로 지금 차 안에서 뭐 하는 거지?”

도현의 차가운 시선에 김탁훈이 움찔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여자 친구가 이런 일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나?”

“여자 친구?”

김탁훈이 고개를 돌려 아직 차 안에 앉아 있는 홍영을 쳐다봤다. 그에게 홍영이 가치가 높았던 이유는 남자 친구 한 명 없는 순수함이었다. 그런데 멀쩡하게 생긴 남자 친구란 녀석이 등장하자, 그는 이상한 배신감과 패배감에 휩싸였다.

“널 폭행죄로 고소하겠다, 이 개자식아.”

김탁훈의 으름장에 도현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홍영이 먼저 말했다.

“그랬다가는 차 안에서 내게 하려던 행동을 경찰에 가서 해명해야 할 거예요.”

“누가 네 말을 믿어 줄까?”

“해 보면 알겠죠. 그리고 이건 돌려 드릴게요.”

홍영은 번개 같은 동작으로 김탁훈의 뺨을 때렸다.

“살살 때린 거예요. 인간이 불쌍해서요.”

“너, 넌! 해고야! 감히 날 때려!”

“당신 아버지 회사지 당신 회사는 아니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당신 같은 사람 비서로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홍영이 차에서 내리자 도현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김탁훈에게 내밀었다.

“차 수리비.”

“꺼져.”

김탁훈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도현을 올려다봤다.

“받아 둬.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했다.”

도현은 김탁훈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 내다가 조용히 말했다.

“다시 보는 일 없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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