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디 임팩트 3권 5화
부우우웅.
도현은 멀어지는 김탁훈의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로등 밑에 서 있는 홍영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홍영 씨. 내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됐을 일인데.”
홍영의 무술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도현으로서는 괜히 자신이 나서서 뭔가 일을 더 어렵게 한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에요, 도현 씨. 잘했어요.”
홍영은 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김탁훈을 혼내 줄 때 가슴이 설레고 상황에 맞지 않게 기분도 좋았다.
특히 여자 친구라며 목소리를 높일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뿌듯하기도 했다.
가로등 불빛 밑에서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를 보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도현은 이것저것 물어보려던 차 안의 일을 한마디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바보처럼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기만 했다.
말없이 시선만 교환하는 일은 정말 민망한 일인데 둘은 긴 시간을 그렇게 했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홍영이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도현은 손에 든 보자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용주 어머님이 반찬을 좀 싸 주셨어요. 홍영 씨 좋아하는 한국식 나물 무침도 있고요.”
“어머, 정말요? 맛있겠다.”
그녀는 기뻐하며 보자기에 싸인 반찬을 받았다.
“올라가요. 같이 밥 먹어요.”
“그래도 돼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주저하는 그의 팔을 홍영이 껴안았다.
“괜찮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올라가요.”
홍영과 처음으로 팔짱을 낀 도현은 그녀 손에 이끌려 가다시피 해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향이 아직 살아 있는 나물 무침을 반찬으로 배불리 식사를 마친 둘은 머그컵에 커피를 담아 오피스텔 창가에 나란히 섰다.
불 꺼진 맞은편 빌딩들이 보였고,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보였다.
“이 모습도 며칠 후면 못 보겠네요.”
그녀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피스텔은 김탁훈의 회사에서 지원해 준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그녀로서는 자연히 나와야만 한다.
차 안에서 김탁훈과 오고 간 대화를 뒤늦게 그녀로부터 들은 도현은 아까 그를 그대로 보내 준 게 아쉬웠다.
한 대 시원하게 더 때려 줄 걸 그랬다.
그리고 홍영에게 미안했다.
그녀가 김탁훈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것을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머그컵을 든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내일 회사에 갈 필요가 있겠어요?”
그녀가 불편한 상황에 직면할까 봐 도현은 걱정돼 물었다. 아무래도 회사 사장 아들이라는 김탁훈이 신경 쓰였다.
“도망치듯 나오는 건 싫어요. 당당하게 사표 쓰고 물건 정리해서 나올 거예요. 죄지은 게 없잖아요.”
생긋 웃은 그녀는 걱정 말라는 시선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 씨, 얼굴 펴세요. 나, 그렇게 허약한 사람 아니잖아요.”
“미안해요, 홍영 씨.”
“뭐가 미안해요. 사람 잘못 보고 한국에 온 제 잘못이죠. 다만 아쉬운 건 저기 도현 씨가 집들이로 사 온 화분을 오래 키우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녀의 시선이 실내 공기를 맑게 해 주는 식물에게 갔다. 바쁜 회사 일정 속에서도 정성 들여 돌보고 있던 녀석이었다.
“나 가면, 도현 씨가 잘 맡아 주세요. 제 생각하면서요.”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위를 달리는 차를 내려다봤다.
두 개의 차선 위를 나란히 달리는 차량들은 같은 방향이었지만, 서로 바라보는 지점이 달랐다. 그리고 교차로가 나오면 서로 극과 극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
지금 자신의 심정이 꼭 그랬다.
교차로 앞에서 신호를 타며 홍영과 나란히 선 느낌이었다.
태선군을 향해 칼을 갈며 가는 자신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홍영이 얼마나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대로 가는 게 현명한 걸까?’
도현은 머그컵을 기울여 커피를 한 모금 한 후, 창에 비치는 홍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마침 그녀도 창에 비친 도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지, 둘의 시선이 창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딪쳤다.
잠시 그녀의 웃고 있는 시선을 바라보던 도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저 부드러운 미소 뒤에는 여자 호걸로 불러도 될 만큼 강인한 모습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다. 힘든 이야기일지라도 견뎌 낼 수 있는 여자였다.
그녀를 위해 숨기고는 있었지만 어쩌면 숨기는 게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불행한 일이라도 홍 사부의 자식인 그녀는 사실을 온전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지금이 그녀가 진실을 알아야 할 시점인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홍영 씨.”
막상 마음을 정하긴 했지만 태선군의 일을 그녀에게 말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요?”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옆에 테이블에 올려놓고 홍영과 마주 봤다.
심상치 않은 도현의 표정에 홍영이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왜 그래요?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요?”
“홍영 씨를 힘들게 할 말을 하려고 해요.”
“걱정 말고 해 봐요. 뭔데 그래요?”
홍영도 들고 있던 머그컵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도현이 실없는 농담 같은 걸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어서, 약간 긴장이 됐다.
도현은 한동안 그녀의 눈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홍영 씨, 사실은 홍 사부님과 우리 아버지 두 분 다……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어요. 미안해요, 홍영 씨. 그동안 속여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아버지가 살해당하셨다고요? 도현 씨 아버지도?”
약간 몸을 떨며 묻고 있는 그녀에게 도현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선문의 비급과 관련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제가 직접 확인했어요.”
그의 말에 홍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아버지가 살해당하셨다고요?”
도현은 그녀의 붉어진 눈동자를 보며 그동안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태선군의 일도, 이계의 일도, 그녀에게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속마음도.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홍영은 중간에 단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녀가 입을 뗀 순간은 그의 긴 설명이 모두 끝나고 둘이 떨어져 창밖 어둠 속을 한참이나 쳐다본 뒤였다.
“도현 씨,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바보 같아요. 그동안 내게 이 일을 숨기려고 얼마나 힘들었어요?”
“아니에요, 홍영 씨.”
“태선군에게 같이 복수해요. 제가 옆에서 당신의 힘이 돼 줄게요.”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어요, 홍영 씨. 홍영 씨는 어머님과 함께 일상적인 생활을…….”
“함께해요. 하나보다는 둘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요.”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도현은 어떤 말도 다시 꺼낼 수가 없었다.
“회사 일을 정리하고 여기 있는 짐 상해에 보내지 않겠어요.”
“그럼 어디로?”
“도현 씨 집요.”
“네?”
그는 꿈을 꾸었다. 우화등선을 하는 꿈이었다.
가부좌를 한 상태로 하늘로 높게 뜬 그의 몸은 뭉실거리는 구름을 뚫고서 아득한 우주의 저 깊은 곳으로 한없이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눈부신 천상계의 입구에 다다랐고, 그의 몸에서는 황금빛 서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네 이놈, 태선군!”
그러나 천둥을 동반한 엄청난 호통 소리에 그는 피를 토하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지상으로 한없이 추락하던 태선군은 하늘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는 무허의 모습에 경악을 했다.
“무허! 어찌 당신이!”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던 태선군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악몽을 꿨음에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시체를 찾아 갈가리 찢어 놨어야 했는데.”
자신의 검에 치명상을 입고 절벽 밑으로 떨어진 옥룡산의 절대자이자 검선문의 장로인 사형 무허가 죽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것을 제자들이 발견한 건 보름 전이었다.
그의 종적을 추적하고는 있지만, 아직 그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침상에서 내려와 용이 수놓아진 화려한 의복을 갖춘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새벽어둠 속에서 상해의 고층빌딩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 일찍 도현의 집으로 온 용주는 도현을 도와 도배를 새로 하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벽지가 뜯기고 그 위로 화사한 색깔의 고급스러운 벽지가 붙여졌다.
도배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둘 다 손재주가 좋았고, 집 전체도 아니고 홍영이 살 작은 방 하나를 도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도배를 순식간에 해치운 그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대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내 방 청소도 안 하는데, 내가 특별히 홍영 씨 온다고 하니까 해 준다.”
홍영이 온다는 소식에 용주는 싱글벙글이었다. 태선군 일을 꼭꼭 숨기고 홍영과 관계를 이어 가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했다.
“그래, 이거야, 인마. 같은 처지에 사람이 서로 위로해 주면 없는 힘도 다시 생기는 법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홍영 씨와 이렇게 같이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소파 밑에 걸레를 집어넣어 닦던 도현이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제 그렇게 홍영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숙도 한지붕 아래서 남녀가 같이하는 판국에 뭘 그렇게 따져. 막말로 좋아하는 남녀가 동거하는 건 흔한 일인데.”
“그런 동거 아니잖아.”
“그거든 아니든 아무튼 함께 살면서 도장에서 수련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힘들 때 서로 의지가 되고 하면 좋잖아.”
“아는데, 부담이 된다.”
도현은 바닥을 닦던 걸레를 들고 일어섰다.
방 세 개 중 하나는 서재였고, 남은 방 중 작은 방은 홍영이 살 공간이었다.
그녀와 어떻게 이 집에서 함께 지내야 할지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
“코는 왜 그 모양이야?”
사장실로 불려 간 김탁훈은 아버지의 못마땅해하는 시선에 안 나오는 억지웃음을 만들었다.
“접촉 사고가 있어서 코를 좀 다쳤어요, 아버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겉에 반창고를 붙인 김탁훈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행실 똑바로 하고 다녀. 파격 승진이다 뭐다 주위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까.”
신설된 전략기획실 실장으로 아들을 앉혀 놓은 그는 아들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조심하겠습니다.”
사장실을 나온 그는 회사 직원들이 반창고를 붙인 자신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듯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나직이 욕설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전략기획실이 위치한 아래층에서 내리다 사표를 제출하고 나온 홍영과 딱 마주쳤다.
이미 오전에 한 차례 마주쳤지만 주위에 다른 직원들이 있어서 어제 일을 딱히 거론하지는 않았다.
“안 내리세요?”
홍영의 물음에 김탁훈은 팔짱을 끼며 오만하게 대답했다.
“내리든 말든. 안 탈 거야?”
홍영은 잠시 김탁훈을 째려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움직였고, 벽에 기대어 있던 김탁훈이 홍영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넌 굴러 온 복을 찬 거야, 알아?”
홍영은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어. 상해에서의 옛정을 생각해서. 나랑 사귀자.”
“다른 상대를 찾아보세요. 관심 없으니까요.”
“어제 그 자식 때문인가?”
김탁훈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감싸며 물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아니라 해도 당신 같은 사람과 만날 생각은 없으니까요.”
1층에서 내린 홍영은 김탁훈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소형 이삿짐 트럭을 받쳐 놓고 도현과 용주는 홍영을 도와 짐을 옮겼다.
짐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일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식물 화분을 트럭에 실은 도현은 홍영을 바라봤다.
“이제 가면 되죠?”
“네, 끝이에요.”
홍영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용주야, 기사분하고 와. 난 홍영 씨랑 먼저 출발할게.”
“어, 알았어.”
도현은 자신의 차에 홍영을 태우고 이삿짐 트럭보다 한발 앞서 집으로 출발했고, 그 뒤를 용주가 탄 트럭이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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