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디 임팩트 3권 6화
“오늘 회사에서는 별일 없었어요?”
도현이 운전을 하며 조용히 물었다.
“아무 일도요.”
“네에.”
고개를 끄덕이던 도현은 차창 밖에 시선을 잠시 두다가 홍영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홍영이 웃으며 물었다.
“아니, 그냥요.”
“혹시, 내가 도현 씨 집에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홍영 씨.”
도현은 급히 말을 하며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웠다.
“전 괜찮은데, 홍영 씨가 불편할까 봐 그러죠.”
“저도 괜찮아요.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음료수 마실래요?”
도현은 헛기침을 하며 미리 사 둔 음료수를 홍영에게 건넸다.
“이 방인데…….”
도현은 아침에 새로 도배를 한 방을 홍영에게 보여 줬다.
“어머, 새로 도배를 했네요?”
홍영은 화사한 빛깔의 벽지를 손으로 만져 보며 작은 방 안을 둘러봤다.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방 안엔 오래된 책상과 서랍, 농이 있었고 창문도 있었다.
“누구 방이었어요?”
그녀도 도현의 집은 처음이었다.
“제 방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한 도현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좁으면 안방 쓰세요. 아버지가 사용하셨던 방인데…….”
“아니에요.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벽지 색깔 마음에 들어요.”
“아, 그래요?”
도현은 다행이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이사를 다 하고 저녁으로 자장면과 탕수육, 팔보채를 시킨 그들은 거실에 상을 펴 놓고 빙 둘러앉았다.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상이 휘어질 듯 차려진 중국집 배달 음식에 홍영이 웃음기 밴 말을 하며 용주를 쳐다봤다.
주문을 용주가 한 것이다.
“에이, 많기는 뭐가 많아요. 홍영 씨가 왔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안 그러냐, 도현아?”
“응? 어 그렇지. 홍영 씨, 얼른 들어요.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서요.”
“네, 같이 먹어요.”
홍영은 빙그레 웃으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맛있게 먹자 도현과 용주는 시선을 교환하며 기분 좋게 웃다가 그들도 서둘러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점심을 건너뛰어서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다.
“홍영 씨, 도현이가 이계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 주던가요?”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몬스터를 잡아서 내공이 늘고, 돈을 번 얘기만 간단히 들었거든요. 아, 타투 이야기도 들었어요. 용주 씨 삼촌 얘기도요. 그러고 보니 들은 게 적진 않네요.”
홍영이 미소를 지었다.
“도둑 이야기는요?”
용주가 팔보채를 먹으며 물었다.
“도둑요?”
“아, 모르는구나. 흐흐, 도현이가요, 거기서 말이에요.”
“용주야, 그만해.”
도현이 눈짓을 줬지만 용주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 녀석 여기서는 이렇게 점잔 빼지만 거기서는 도둑이었어요, 도둑.”
“네에? 정말요?”
홍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아서 탕수육을 먹고 있는 도현을 쳐다봤다.
“사실이에요?”
도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게 좀 약간의 오해가 있어서요.”
“어떤 오해요?”
도현은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이계에서 어베인과 짐브리오를 만나게 된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도현은 이계에서 경험한 여러 일들을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재밌게 풀어냈다. 하루 종일 밝은 표정으로 어제 들었던 무거운 이야기들을 표 내지 않으려는 홍영에게 작게나마 즐거움을 줬으면 했기 때문이다.
“어제도 듣고 놀라운 곳이다 했는데, 너무 신기한 곳이네요. 마치 영화 속 세상 같아요.”
“영화는 돈 주고 봐야 하지만, 이계는 도현이에게 돈과 힘을 제공해 주는 곳이죠. 그런데 타투가 사라지는 바람에.”
용주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이계로는 정말 다시 갈 수 없는 거예요?”
홍영의 질문에 도현과 용주 그 누구도 선뜻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밤늦게까지 있다 용주가 돌아가고, 홍영과 도현은 서로 다른 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둘 다 잠은 안 오고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홍영은 어떤 식으로든 도현을 도와서 아버지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서 도현과 함께 있으며 그때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도현이 사용했던 방 안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자 아버지 복수에 대한 비장한 마음가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일 아침 식사로 뭘 해야지 도현이 좋아할까 그런 얄궂은 생각만 자꾸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홍영. 도현 씨는 태선군을 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계까지 다녀왔어. 그가 강해지는 걸 도와주려고 왔잖아.”
스스로 자신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보던 그녀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도저히 이대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도현의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려 문손잡이를 쳐다봤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대답했다.
“네!”
“홍영 씨, 잠 안 오면 나랑 같이 도장에나 갈래요?”
“아, 그럴까요?”
그녀는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도현이 후드티를 입고 서 있었다.
“아직 집이 낯설죠?”
그의 말에 홍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요. 내 집 같아요.”
“그럼 다행이고요.”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홍영과 함께 3층 빌라에서 내려와 밤거리를 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 길가에 길게 주차된 차량들 외에는 지나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도장은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홍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도장으로 향하던 도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홍영 씨.”
“네.”
“힘들면 울어도 돼요. 일부러 참지 말고요.”
홍영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약간 슬픈 음색으로 말했다.
“아버지를 향한 눈물은 이미 장례식 때 많이 흘렸어요. 지금은 눈물이 아니라 그자에 대한 증오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내가 나약해지지 않도록요.”
도현은 그녀의 말에 표정이 무거워졌다.
“태선군과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내 생각이 생각만으로 끝날 수도 있어요.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요. 만약에 홍영 씨가 원한다면 난…… 지금의 계획을 바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자의 목숨을 노리는 데 집중할게요.”
태선군과 은원을 맺은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걷는 홍영도 자신처럼 소중한 아버지를 그의 손에 비참하게 잃었다.
그 앞에서 자신의 복수 방법만 옳다는 식으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방법이고, 그녀가 원하는 게 있다면 도현은 힘들어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다.
“저기 하늘에 계신 두 분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홍영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올려다봤다.
“아마 두 분은 도현 씨가 그자를 검으로써 뛰어넘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홍영 씨.”
“난 믿어요. 도현 씨는 할 수 있어요. 포기하지 말고 지금처럼 강해지는 데 집중하세요.”
그녀의 따뜻한 눈빛에 도현은 저도 모르게 옆에서 걷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홍영도 도현의 손을 부드럽게 마주 잡았다. 손을 통해 오가는 온기에 둘은 서로 얼굴을 붉혔다.
“어머님께 말씀드릴 거예요?”
“아니요. 모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와 함께 있다는 이야기요. 괜히 오해하실 것 같아서요.”
“그것도 일단은 비밀로 해요. 뭐, 아셔도 싫어하시지는 않겠지만요.”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에 도현은 살짝 당황하며 멀리 보이는 상가 건물에 시선을 뒀다.
“건물은 어떻게 할 거예요? 도깨비탈을 쓴 그 사람을 쉽게 이길 수 없다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은행권에서 대출을 받아서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현 씨가 은행예금으로 이십칠억이 있다면 나머지 몇 억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럴까 생각 중이었어요.”
도현도 사실 용주와 대출 쪽으로 가닥을 잡고 얘기를 나누고 있기는 했다.
잠시 후 지하 도장에 도착한 도현은 홍영을 관장실로 데리고 갔다.
“보여 줄 게 있어요.”
옷장으로 사용하는 키 큰 캐비닛을 연 그는 손을 뻗어 어떤 물건들의 위를 덮고 있는 천을 걷어 냈다.
이계에서 사용하던 가죽 갑옷과 허리띠, 단검, 신발, 검 등이 보였다.
“이계에서 건너온 물건들이에요.”
홍영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가죽 갑옷을 눈높이에 올려서 살펴보기도 하고, 검을 뽑아 가볍게 휘둘러 보기도 했다.
“이걸 직접 보니까, 도현 씨가 해 주던 이계에서의 이야기가 더욱 실감이 나네요.”
“그래요?”
도현이 웃으며 그녀가 건네준 검을 받아 들었다.
몬스터 피를 잔뜩 흡입한 녀석은 여전히 검날이 살아 있었다.
‘이계에서 참 좋았는데.’
도현의 아쉬움 섞인 눈빛을 읽었는지 홍영이 옆에서 위로하듯 말했다.
“기회가 되면 스톤을 함께 찾아봐요.”
그녀도 저녁을 먹을 때 스톤이 얼마나 찾기 어려운 물건인지 들어서 대충 알고는 있었다.
도현은 그녀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칼을 칼집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
도현은 전에 한번 와 봤던 기억을 되살려 용인 태화컨트리클럽을 지나 어렵지 않게 숲 쪽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죠?”
숲 진입로를 지키는 경비원이 차 안에 도현을 보며 물었다.
골프장을 포함해 이 일대 토지를 모두 소유한 태화실업은 작은 숲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막고 있었다.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회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사전에 연락이 되어 있었던 건지 경비원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뒤로 손짓을 했다.
간이 건물로 지어진 경비실의 사람이 버튼을 누르자 숲과 연결된 유일한 도로를 막고 있던 차단 봉이 위로 올라갔다.
경비원을 지나쳐 숲 안에 들어선 도현은 차창을 모두 내려 숲 안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왜 날 보자는 걸까?”
조용한 숲의 길을 지나며 회장이 부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도현은 커브를 돌아 윤 회장의 별장이 보이기 시작하자 차 속도를 서서히 줄여 갔다.
“모임이 있나?”
고급 차 수십여 대가 별장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을 차지하며 길게 늘어서 있었고, 운전기사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사내들은 두세 명씩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를 댈 데가 없네.”
도현은 줄지어 늘어선 차들을 지나쳐 별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다음, 걸어서 별장으로 다가갔다.
그가 막 별장에 다다랐을 때 주변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차 시동 켜지는 소리와 별장에서 나온 사람들을 태우기 위한 운전사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그 원인이었다.
도현은 걸음을 늦추며 그 부산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숲이 조용함을 찾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고, 텅 빈 별장 앞을 향해 도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별장 안엔 회의실이 있었다.
좁고 긴 회의실엔 조금 전 태화실업과 관련된 고위 임원들이 머물다 갔고, 윤 회장은 그곳에서 도현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말수가 원래 적은 건지, 아니면 회장이라는 무게를 보이기 위함인지 이번에도 역시 윤 회장은 사람을 불러 놓고 별다른 말 없이 차만 마셨다. 도현도 그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자신 앞에 놓인 차만 입에 댔다.
“자넨 꿈이 뭔가?”
인사를 나눈 지 한참 만에 윤 회장이 입을 뗐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질문에 도현은 조금 웃음이 나왔다.
“왜 웃지?”
“죄송합니다. 그런 질문은 제가 어렸을 때만 받아 봐서요.”
도현은 찻잔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윤 회장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응시했다.
“제 꿈은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비웃을까 봐서?”
“그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과 관련이 되어 있어서 말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사정이 있어 보이는 도현의 말에 윤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다혜 사부에게 다시 도전한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네?”
도현이 놀란 표정으로 윤 회장을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자세한 얘기는 이 실장에게 듣게. 그동안 수고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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