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59화 (59/575)

[59] 디 임팩트 3권 9화

“이보게, 백 사장!”

간 줄 알았던 박 사장이 돌아오자 도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네.”

“자넨, 이 건물 정말 잘 산 거야. 절대 비싸게 산 게 아니라고, 알겠나!”

“네?”

도현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 높여 말하는 박 사장을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너! 이 못된 놈아, 잘 들어!”

용주를 돌아본 박 사장이 핏대를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 삼십삼억에도 이 건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알겠어!”

“정말요?”

“그래! 화정부동산뱅크에 연락해 봐!”

“고맙습니다. 싸게 주셨네요.”

시큰둥하게 슬쩍 고개를 숙인 용주는 다시 안면이 있는 상가 건물 세입자들에게 큰 소리로 하던 말을 계속했다.

“여기 백 관장이 새로운 건물주가 된 기념으로, 다음 달부터 석 달간 월세 십만 원씩 깎아 준답니다! 박수!”

“와아!”

다들 지하 도장의 도현을 알고 있던 터라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럼 건물 안 떠나도 되는 거요? 재계약도 안 받아 주던데, 건물 팔 거라면서.”

상가 건물의 일부는 이미 공실로 남은 상태였다.

“여기 제 친구 아시는 분들 계실 겁니다.”

도현이 용주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를 대신해 건물을 관리할 사람입니다. 재계약 문제는 이 친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면 됩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계속 건물에 남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입자들이 웃으며 다시 박수를 쳤다.

뒤쪽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전 건물주 박 사장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뒤돌아서 자신의 차로 향했다.

“조금만 있으면 가격이 더 오를 텐데. 하루만 더 버틸걸, 하루만.”

“여긴 뭐 하던 데예요?”

홍영은 도현과 용주를 따라 상가 건물을 둘러보다가 5층 넓은 장소를 보며 물었다.

“스포츠 댄스 학원요. 망했어요. 저기 길 건너에 방송에 나온 사람이 학원을 차리는 바람에요.”

용주는 먼지 쌓인 마룻바닥을 보며 대답했다.

“장소도 널찍하고 조금만 손보면 호검술 도장으로 사용해도 되겠어요.”

그녀의 말에 5층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홍영 씨, 도장이라니요?”

“지하 도장은 도현 씨 개인 수련장으로 사용하고요. 여기 5층에 관원들을 모집해 호검술 도장을 열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장소야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어요. 왜 그런지 알잖아요, 홍영 씨.”

도현은 쓸데없이 관원을 모집해 자신의 수련 시간과 집중력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버지 때부터 고수해 온 전통적인 수련 방법은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아서, 5층에 호검술 도장을 차린다 해도 사람이 없기는 전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복수를 준비하며 노력해야 하는 이 순간에 돈 쓰고, 신경 쓰며 호검술 도장을 여기 이 5층에 열 이유가 없었다.

“태선군에 대한 복수, 중요해요. 저도 간절히 바라니까요. 하지만 그 뒤는요.”

홍영은 5층 창가에 서 있는 도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현 씨가 지하 도장을 지키고자 한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이에요? 아니면 아버지의 꿈과 희망이 미완으로 남아서 그 아쉬움 때문이에요?”

“음.”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미완으로 남은 아버지의 꿈을 이뤄 드리는 것도, 태선군에 대한 복수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루 이틀 해서 태선군을 이길 수 없잖아요. 그 긴 시간 동안 도현 씨를 지탱해 줄 원동력은, 결국 아버지의 꿈을 조금씩이라도 현실에서 이루어 내고 있다는 그것 아닐까요? 호검술 도장의 관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버지의 꿈은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홍영 씨.”

도현은 그녀의 속 깊은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쿵푸 도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굉장히 허전해하셨어요. 단 한 사람일망정 자신의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쁨이거든요.”

그녀의 말에 도현과 용주는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도현 씨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나이가 먹고 시간이 흐르면 도현 씨도 아버지처럼 자신의 배운 바를 그 누군가에게는 전수하고 싶을 거예요. 그게 우리 아버지와 도현 씨 아버지의 삶이었으니까요.”

조용히 말을 마친 홍영은 닫힌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휘잉 하며 안으로 밀려 들어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뒤로 날렸다.

한동안 말없이 도현과 용주는 그녀처럼 창가에 서서 5층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용주야.”

“응?”

“호검술 도장 사범 해 볼래? 여기 5층에서 말이야.”

“백 관장님 전통 방식대로 하면서?”

“그래야지. 전통은 이어야 제맛이니까.”

“그럼 도장으로는 돈 벌기 힘들겠는데? 대신 편하기는 하겠다. 관원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도현 씨, 5층에 도장 열 거예요?”

홍영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에. 배우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문을 열어 볼게요.”

“도현아, 5층은 내게 맡겨 두고 넌 지하 도장에서 수련만 해. 너 같은 고수가 하수를 가르칠 필요는 없지. 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사실, 용주 씨가 있어서 이런 말을 했던 거예요. 검술 솜씨가 충분히 훌륭해서 도현 씨가 없더라도 도장을 책임질 만해 보였거든요.”

홍영의 말에 용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건 사실이죠, 으하하하!”

인사동 화랑가를 따라 안국동 로터리 방향으로 천천히 내려가던 도현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기를 밀어내며 흰색 바탕에 우아한 필체로 꾸며진 ‘갤러리 호수’의 간판을 발견했다.

입구에는 ‘3인 3색, 눈으로 그림을 그리다.’라는 제목으로 공동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홍보물이 부착되어 있었다.

3인의 작가 이름을 유심히 살펴보던 도현은 좁은 통로를 따라 2층에 위치한 갤러리 호수로 올라갔다.

인사동에 있는 수십여 개의 갤러리와 미술관 중 작은 규모에 속하는 이곳은 주로 아마추어 사진작가나 화가 들에게 적은 임대료를 받고 공간을 빌려 주는 곳이었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안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사진을 관람하고 있었다.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도현은 흰색 벽에 걸린 크고 작은 사진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전이라고는 하지만 사진에 담긴 풍경이 저마다 생명을 갖고 감정을 표출해서, 관람하는 내내 도현은 마음이 평온해지고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특히 가장 마지막 순서로 배치된 세 번째 사진작가인 한석호의 풍경 사진들은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더욱 느껴졌다.

“어디서 찍으신 겁니까?”

“태국. 일몰 속에서 사원들이 마구 울더군. 가슴이 찌릿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지.”

“제게도 느껴집니다.”

한석호의 풍경 사진을 감상하던 도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적당히 균형 잡힌 몸매에 팔다리가 길고 눈빛이 차가운 말끔한 정장 차림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이야.’

도깨비탈 속에서 그를 응시하던 눈빛이 이랬다.

다혜의 사부와 시선을 주고받던 도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기서 사진전을 열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라는 녀석은 안 오고, 엉뚱한 사람이 왔군. 다혜가 알려 줬나?”

“네.”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내겐 말 한마디 없이 멋대로야.”

“이런 좋은 사진들을 못 보고 지나쳤으면 많이 아쉬웠을 겁니다.”

태국에서 찍은 한석호의 풍경 사진을 도현이 치켜세우자 한석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아부할 생각 말게.”

“아부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도현의 단단한 말에 한석호는 한 발짝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여긴 왜 왔지? 이미 윤 회장 일은 다 해결이 됐는데.”

“이걸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도현은 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뭔가, 이건?”

“다혜 씨가 전해 달라는 겁니다.”

“다혜가?”

한석호는 주변을 한번 쓸어 보다가 도현이 건네준 봉투를 받아서 안을 살펴봤다.

일억짜리 수표가 다섯 장이나 들어 있었다.

표정이 싸늘해진 그는 도현을 노려봤다.

“다혜가 이걸 줬다고?”

도현은 목소리를 낮춰 짤막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받지 않으시면 저보고 가지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보고. 누가 윤 회장 돈을 받고 싶어서 거기에 보낸 줄 아나. 괘씸한 녀석 같으니.”

눈썹을 꿈틀거리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찢어 버리려는 시늉을 했다.

“왜 안 말리나?”

“뜻대로 하십시오.”

“오억이 없어질 상황인데도?”

“후배인 제가 선배님의 높은 뜻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생긴 건 안 그런데 의외로 유들유들한 면도 있군.”

“친구 영향을 조금 받고 있습니다.”

“궁금하군, 그 친구가 어떤 친구인지.”

수표가 든 봉투는 이미 한석호의 품 안에 고이 들어간 상태였다.

“사진 구경 잘하고 가게.”

한석호는 더 이상 도현에게 볼일이 없다는 식으로 옆으로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에게 다가갔다.

관람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부드럽게 설명을 하는 한석호의 모습과 도깨비탈을 쓰고 냉정히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너무 달라 보여 도현은 한석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도현은 관람객과 이야기를 마치고 이동하는 한석호를 따라갔다.

“선배님.”

“내게 아직 볼일이 남아 있었나? 왜 안 가고 있어?”

한석호는 조금 전 일반인을 대할 때와는 달리 아주 차가운 얼굴로 도현을 쳐다봤다.

“도와주십시오.”

“뭘 도와 달란 말이지?”

“주변에 배움을 청할 상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련을 하고 싶습니다. 제게 배움의 시간을 허락해 주십시오.”

도현은 정중하게 부탁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윤 회장 일이 끝나지 않았다면 내가 어쩔 수 없이 너와 검을 몇 번은 더 나눠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후배는 다른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염치 불고하지만 도와주십시오.”

“내게 무예란 살을 한 점 한 점 발라내며 얻은 소중한 것이다. 그런 것을 말 몇 마디로 대련으로써 얻어 가겠다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도현은 그의 반응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가 실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검을 나누는 데 즐거움을 줄 정도는 되었지 않습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가. 나도 스스로 길을 개척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른 거야. 젊은 놈이 벌써부터 편하게만 가려고 하다니.”

한석호에게 된통 혼이 난 도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련 자체가 편하게 고수가 되는 법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오기도 생기고 화도 났다.

검과 산 지 20여 년, 편하게 지내 온 시간은 결코 단 한순간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손이 부르터라 검을 휘둘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납덩어리를 서너 개씩 차고 다니며 근력과 민첩함을 키워 왔다.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검술 능력이 일취월장하기는 했지만 그는 늘 기본을 잊지 않으려고 검을 몇 시간씩 위로, 아래로 일직선으로 사선으로 휘두르는 단조로운 동작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다.

자신과 편안함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선배님!”

도현의 큰 호통 소리에 조용했던 사진 전시장이 들썩였고, 몇몇 관람객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한석호는 살짝 당황하며 도현을 노려봤다.

“이놈이 미쳤나.”

“전 그렇게 쉽게 살아온 놈이 아닙니다!”

도현은 한석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을 했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힘은 커서 한석호는 도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알았어. 너 쉽게 산 놈 아니야. 그만 시끄럽게 하고 돌아가.”

한석호는 도현을 차갑게 한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절대 대련 같은 것은 해 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포기해야 하나.’

도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흰 벽에 걸린 사진들을 쭉 둘러보았다. 중간에 한석호와 얘기하는 바람에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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