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디 임팩트 3권 18화
리드만은 비로 인해 질척질척해진 땅을 손바닥만 한 작은 호미로 파기 시작했다. 농부의 일을 도와주고 얻은 것인데, 산에서 약초나 식용할 수 있는 뿌리들을 캐먹는 데 아주 유용한 기구였다.
남부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북부 대륙으로 와 돈 한 푼 없이 여행을 하는 데 있어서 이 호미는 검보다 쓸모가 있어서, 리드만의 재산 목록 1호였다.
시신의 몸에서 뽑은 검을 묵묵히 살펴보던 딘은 주변을 쓸어 보며 말했다.
“그렇게 땅을 파서 언제 시신을 묻고 잠잘 장소를 찾겠나?”
“곧 다 됩니다, 영주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리드만은 비를 맞으며 호미질을 계속했다.
“뒤로 물러나.”
보다 못한 딘이 나서서 시신의 몸에서 뽑은 검을 들고 리드만이 파고 있던 중심부에 섰다.
그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고, 사방으로 흙과 자갈 들이 날아갔다. 잠시 후, 커다란 구덩이 하나가 생겼다.
털썩.
시체를 밀어 넣은 리드만은 빗물로 채워지는 구덩이에 빠르게 흙을 밀어 넣었다. 위에 돌 몇 개를 올려 마무리를 한 그는 신의 별자리를 무덤 앞에서 그리며 죽은 자의 영면을 기원했다.
“가시지요, 영주님.”
리드만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 이동을 했고, 그 뒤를 딘은 조용히 따라갔다.
비는 더욱 심해졌고, 쉴 만한 장소를 찾는 리드만의 눈길은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제단처럼 평평한 바위 하나를 발견해 냈다. 널찍하니 그 위에서 자면 바닥을 흐르는 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무들도 밀집돼 있어서 넓은 가죽을 펼쳐서 고정시키면 비를 막아 줄 지붕도 금세 완성될 것이다.
“영주님, 여기로 하지요.”
“그러지. 그런데 여기도 시체가 있군.”
“예? 시체요?”
딘은 리드만이 못 보고 지나친 나무 뒤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비를 맞으면서도 꼼짝도 안 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죽은 사람 같았다.
“설마, 또 장례식을 치러 준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딘이 피곤했는지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장례식은 하루에 한 번이면 족하지요. 시체를 치우고 오겠습니다.”
리드만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치며 엎어져 있는 사내 곁으로 걸어갔다. 옆구리에 꽂힌 화살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허리를 숙여 몸을 바로 눕혔다.
죽은 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드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영주님, 아직 생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해 볼까요?”
“누군지 알고?”
“신의 계시가 아니겠습니까? 조금 전 장례식을 치렀으니 이번에는 생명을 구하라는.”
“살릴 수 있겠어?”
“신이 결정하시겠지요.”
“그놈의 신은. 알아서 하게.”
영주는 관심 없다는 듯 손짓을 했다.
리드만은 도현의 가죽 갑옷을 벗겼다. 화살은 중간에 부러진 상태로 도현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리드만이 신의 별자리를 허공에 빠르게 그리자 허공에 하얀 빛들이 생성되었고 그 빛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드만은 빛나는, 서기가 뿜어 나오는 손을 화살이 꽂힌 도현의 옆구리에 가져다 댔다.
화살이 검은 피를 동반하며 서서히 밖으로 밀려 나왔다.
툭.
예리한 강철 화살촉이 땅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상처 부위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후우.”
리드만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고, 그는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상처의 회복에 집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잘 아물던 상처가 급속도로 벌어지며 붉은 피를 토해 냈다.
깜짝 놀란 그는 벌떡 일어나며 바위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영주를 쳐다봤다.
“영주님!”
“왜 그러나?”
“이 사람, 영주님과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뭐라고?”
영주가 굳은 얼굴로 바위 위에서 일어나 도현에게 다가갔다. 원래 있던 화살 구멍이 더 벌어져 있었다. 치료가 정상적으로 됐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가능성은 하나.
딘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도현의 몸에 손을 올려놨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현은 밤새 고열에 시달리다 늦은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몇 가닥 햇빛이 스며들어 와 눈이 부셨다. 잠시 멍하니 햇빛에 대항하던 그는 눈부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죽진 않았군.’
도현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자신이 벌였던 일들을 떠올리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불에 타 죽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그 뒤의 일은 끔찍했다.
‘통제할 수가 없었어.’
머릿속을 잠식하던 생각은 온통 뭔가에 대한 증오와 파괴뿐이었다. 도망가는 자들을 보며 희열을 느꼈고, 쫓아가서 다 죽였다.
죽을 놈들인 건 맞았지만, 그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내린 행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 점이 그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다.
가진 능력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한 것도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다.
눈을 감은 채 찰나간 많은 생각을 하던 그는 손을 움직여 화살에 맞은 옆구리 부근을 더듬어 보았다.
가죽 갑옷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화살 대신 부드러운 천이 만져졌다.
도현은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세웠다.
옆구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몸서리쳐지는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고 자신의 옆구리 상처를 내려다봤다.
누군가 치료라도 해 준 듯 화살은 없었고, 천이 휘감고 있었다.
“누가?”
그때 말이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이 말에 짐을 싣고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보니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놓쳤다.
그는 느슨하게 풀어졌던 긴장감을 다시 조이며 옆구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일어났다.
평평한 바위 위를 내려오던 그는 한쪽에 놓여 있는 자신의 가죽 갑옷을 발견하고는 그들에게 걸어가며 갑옷을 걸쳤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 통증이 심했지만, 그는 참으며 말에 짐을 다 싣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 앞에 섰다.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빛이 강한 사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흰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노인이었다.
“용케 일찍 깨어났군.”
사내의 말을 들은 도현은 이들이 자신을 치료해 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치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현의 정중한 인사에 딘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젯밤에 난 자네 말고도 한 사람을 더 발견했지. 이 검에 박혀 나무에 매달려 있더군.”
도현은 자신의 검을 들고 있는 딘의 모습에 살짝 당황을 했다.
“자네 짓인가?”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이 검의 주인은 자네가 맞군. 아니라고 했으면 그냥 가지고 갈까 했는데 말이야. 받게.”
딘은 검을 도현에게 돌려주었다.
“왜 그랬는지 묻지 않습니까?”
“관심 없네. 리드만, 가세.”
딘은 말을 몰아 앞서 갔고, 뒤에 남은 리드만은 도현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혼돈의 마나를 어떻게 흡수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폭주하지 않도록 감정 조절을 잘하시오. 후회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도현은 리드만의 말에 안색이 살짝 변했다. 어제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리드만! 뭐 하나, 어서 오지 않고? 배고프단 말일세.”
“곧 갑니다, 영주님!”
말에 올라탄 리드만은 도현을 내려다봤다.
“상처에 좋은 약초를 붙이긴 했지만, 회복되는 데 여러 날 필요할 거요. 무리한 행동은 자중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잠시만요. 조금 전 제게 했던 말은 무슨 뜻입니까? 혼돈의 마나와 폭주라니요?”
“속일 필요 없습니다. 이미 어젯밤에 치료할 때 당신 몸을 다 살펴봤으니까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리드만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신의 별자리를 그은 뒤, 서둘러 영주의 뒤를 쫓았다.
“혼돈의 마나라니. 설마 몬스터의 기운을 말하는 건가?”
홀로 남은 도현은 심상치 않은 리드만의 말에 신경이 쓰였다. 특히 폭주하지 않도록 감정을 잘 조절하라는 말은 어제 일과 관련이 깊어 보여서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저들은 알고 있다.’
도현은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풀어진 허리띠가 보였다. 거기에는 칼집이 매달려 있었다.
스르릉.
딘으로부터 받은 검을 넣은 그는 옆구리 통증을 참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라는 리드만의 조언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파바바바박!
신법을 발휘하자 그의 몸에 점점 가속도가 붙었고, 저 멀리 앞서 가는 두 필의 말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곧 신법을 발휘하기 위해 끌어 올린 내공을 풀어 버렸다. 기가 흐르는 몸 곳곳이 너무 아팠다.
‘어떻게 된 일이지? 어제 변화와 관련이 있나?’
그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다가 숲을 거의 벗어나 마차가 다니는 길로 접어들고 있는 딘과 리드만을 응시했다.
무리하게 내공을 계속 사용하다가는 차후에 내공을 사용하는 데 지장이 올 수도 있었다.
별수 없이 육체적 능력만으로 저들을 따라잡아야 했다.
‘할 수 없지.’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한 옆구리만 아픈 게 아니라 온몸이 쑤시고 결렸다.
‘내 의문점을 확실히 풀어야 해. 혼돈의 마나가 뭔지, 폭주란 말의 의미가 정확히 뭔지.’
도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전력 질주를 했다. 부러진 나무를 뛰어넘고, 낮은 바위를 디딤돌 삼아 훌쩍 멀리 뛰기도 했다.
옆구리 통증에 코끝에 땀이 맺혔고, 정상이 아닌 몸은 힘들다고 비명을 질러 댔다.
‘조금만 더!’
전날 내린 비로 수풀이 더욱 무성해진 느낌의 작은 숲을 거침없이 뚫고 나온 그는 저만치 앞서 가는 딘과 리드만에게 힘껏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 말의 속도를 올리려던 그들은 도현의 등장에 멈칫했다.
“영주님, 그 사람인데요?”
“기껏 치료해 줬더니 살기 싫은가 보군.”
딘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도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도현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얌전히 쉬었다가 숲을 떠날 일이지, 무슨 일로 쫓아온 건가?”
딘이 말 위에서 물었다. 먼지와 흙이 잔뜩 묻은 옷을 입고 있는 그였지만, 말에는 은근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숨을 돌리던 도현은 말 위의 딘과 리드만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혼돈의 마나라는 게 뭡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서 묻나?”
“정말 모르겠습니다.”
도현의 눈을 들여다보던 딘이 말에서 내려 도현 앞에 섰다.
“혼돈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고? 장난치나?”
“오해십니다. 제가 장난치기 위해 숲에서 뛰어왔겠습니까?”
도현의 대답에 리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 장난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까 저도 이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하기에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악착같이 쫓아와 묻는 걸 보면 정말 모르는 게 아닐까요?”
딘은 뭔가 깊이 생각을 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말에 다시 탔다.
“가세, 배가 너무 고파. 얼른 마을을 찾아야겠어.”
말을 몰고 가는 영주의 행동에 리드만이 급히 물었다.
“영주님, 이 사람은요?”
“데리고 오게. 모른다면 알려 줘야지.”
“둘이 같이 타기에는 제 말이 너무 작지 않습니까? 영주님 말이라면.”
“맞고 싶나?”
“아닙니다, 영주님. 자네 여기 타게.”
도현을 태운 리드만이 서둘러 영주의 말을 쫓았다.
정오 무렵 제법 커다란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곧장 여관의 식당으로 향했다.
“영주님, 아껴서 쓸까요?”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먹는 게 중요하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리드만은 어제 마법사의 품에서 챙긴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여관 주인에게 식탁 가득 음식을 차리게 했다.
“영주님, 드시지요.”
리드만은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영주가 먼저 음식에 손을 대기를 기다렸다.
술을 음미하던 딘은 감탄을 터트렸다.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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