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디 임팩트 3권 23화
“흠.”
검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노인은 패잔병처럼 앉아 있는 수백 명의 사내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많은 인원으로도 그들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다 당신들 잘못이오.”
유드루족의 도적을 이끄는 붉은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불만 깊은 시선으로 베일 가문의 노인을 쳐다봤다.
“그 여자를 사로잡아야 한다는 말 때문에 활도 제때에 사용 못 하고, 적극적인 전투를 벌일 수도 없었소.”
“그래도 그렇지. 저들의 낙타라도 죽여서 발을 묶어 놨어야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던 노인은 낙타에 올랐다.
그의 뒤로 여마법사와 100여 명 가까운 대규모 병력이 깃발을 들고 당당히 낙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튼 수고했네. 베일 가문은 자네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거야. 가자!”
희생자 없이 도적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도현의 착각이었다.
옆구리에 칼을 맞고도 내색 없이 버티던 호위대원 한 명이 끝내 하늘 높이 솟은 사막의 협곡을 앞에 두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도현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호위대를 도와 모래 구덩이를 팠다.
“잘 가세요.”
릴리아에 의해 두 눈이 감긴 사내는 가슴에 팔을 모은 상태로 뜨겁게 달궈진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편히 쉬기를.”
동료의 시신을 묻은 호위대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가 묻힌 모래 위에서 묵념을 하며 그의 영면을 아쉬워했다.
숙연함 속에 작별 의식을 거행하는 그들의 모습에 도현은 그들이 얼마나 결속력이 대단한 사람들인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도대체 저들은 누굴까?’
도현은 시간이 갈수록 이들이 누군지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동료를 묻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거대한 그림자를 만드는 사막의 협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미터 높이의 협곡 주변엔 모래 대신 붉은 빛깔이 나는 자잘한 자갈과 흙이 존재했고, 사람 키 높이만 한 선인장과 이름 모를 기이한 잡초들과 잡목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휘이이잉.
자갈과 협곡 사이를 오가는 척박한 황무지의 바람은 사람을 곤두서게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몬스터가 배가 고프지 않은가 보군.”
“몬스터가 나오는 곳입니까?”
도현의 물음에 파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곡 중심부에 있네. 사실 이 주변은 상인들이나 여행객들이 잘 다니지 않아. 사막을 하루 이틀 정도 빨리 지날 수 있는 지름길이긴 하지만, 몬스터의 위협이 커서 말일세.
그들은 협곡을 관통해 통과하지는 않고 자갈만 밟으며 우회해서 그 지역을 조심스럽게 지나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추적대가 몬스터보다 더 피하고 싶은 존재인 게 분명해. 도대체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에.”
파먼의 말에 도현은 사막 여행으로 거칠어진 얼굴을 매만지며 앞서 가는 릴리아와 호위대들을 응시했다.
“혹시 저들이 누구인지 짐작이라도 가십니까?”
옆에서 묻는 도현에게 파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모른 척했지만, 짐작은 가네. 저 호위대들은 안개 도시에서 나온 전사들이네.”
“안개 도시에서요?”
“그곳에는 500명의 전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대한 검을 도끼처럼 크게 휘두르며 적들을 상대한다고 했네. 안개 도시 성주의 친위대들이지. 나도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이 아닐까 싶어.”
“그렇군요.”
도현은 하나같이 건장한 호위대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도 솜씨가 탁월해.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금도 밀리지 않고 도적들과 싸웠으니 말일세.”
파먼은 낮에 유드루족 도적을 물리친 게 아주 통쾌한지 소리 죽여 웃었다.
“얼마나 더 가야 사막이 끝납니까?”
“사막의 지름길로 왔으니, 이틀 정도만 더 가면 될 걸세.”
“하지만 그 전에 추적대와 만나면 오늘처럼 큰 싸움이 다시 벌어지겠군요.”
도현은 깊은 눈빛으로 뒤를 돌아다봤다.
밤잠까지 줄이며 빠르게 이동하던 그들의 뒤에 사자 깃발을 휘날리는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추적자들의 존재만 알고 있었지 어떤 자들인 줄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파먼과 우르틴은 모래바람에 펄럭이는 커다란 사자 깃발의 등장에 안색이 변했다.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달리는 낙타 위에서 도현이 파먼에게 물었다.
“왕과 비견되는 권력을 휘두르는 대영주 베일 가문의 상징이네. 빌어먹을. 설마 했는데, 저런 자들이 쫓아올 줄이야.”
수백의 도적 떼 앞에서도 태연했던 파먼이 지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서 가는 릴리아 일행을 노려봤다.
“곤란하게 됐어. 어쩐지 유명한 용병대 사람들을 한 명도 고용하지 않았다 했지. 그들은 우리처럼 간단히 의뢰를 받지 않거든. 대규모로 움직이니까 전후 사정을 알고 움직이지.”
“어쩔 수 없지요. 용병이 의뢰를 접수했으면 죽든 살든 끝까지 가야지요.”
우르틴이 옆에서 용감하게 말하는 소리에 파먼은 손으로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긁적였다.
“우르틴, 나야 살 만큼 살았으니까 상관없지만, 자네는 똥 밟았네. 물론, 도현 자네도 그렇고.”
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들으며 뒤를 돌아다봤다. 대충 보아도 자신들보다 열 배는 많은 숫자였다. 거기에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도 베일 가문에서 정예 병사들을 동원한 듯 보였다.
‘차라리 홀로 사막을 건너는 게 나을 뻔했나?’
도현은 뒤늦게 호위 임무를 맡아 일행이 된 것을 후회도 해 봤지만, 그도 사내였다. 옆에서 죽음을 초월한 듯한 자세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우르틴과 파먼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꼴을 보이긴 싫었다.
‘일단 끝까지 가 보자. 아직 실망하긴 일러.’
그에게는 아직 발휘하지 않고 있는 내공의 힘이 존재했다. 지난번 폭주 후 기가 흐르는 곳곳에 문제가 생겨 내공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얼마든지 싸울 수 있어!’
도현은 강한 눈빛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네도 마음을 정했군. 용병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면서,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야. 용병이란 모름지기 그래야지, 하하하.”
도현은 파먼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눈은 뒤로 가 있었다.
‘낙타가 수상해.’
추적자들이 시야에 들어올 때부터 호위대장의 지시하에 도망가는 데 박차를 가했지만, 믿을 수 없게도 베일 가문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만 있었다.
얼룩 반점 낙타의 체력과 빠르기를 훨씬 앞지르는 낙타를 소유하지 않고는 이렇게 거리를 빠르게 좁히며 깃발의 모양이 선명히 들어올 만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도현이 어제 도적들을 따돌리며 파먼에게 듣기론 자신들이 타고 있는 얼룩 반점 낙타를 뛰어넘는 그런 낙타는 흔하지도 않았고 경주용으로 쓰이는 극히 일부라고 했다. 그래서 저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타고 온다는 게 좀 의외였다.
도현은 베일 가문의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듯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곧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어떤 여자가 검붉은 지팡이 같은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닐까? 그자처럼 지팡이를 들고 있는걸 보면.’
그가 막 자신의 생각을 좌우에 있는 파먼과 우르틴에게 이야기하려 할 때, 둥글게 릴리아를 감싸고 있던 호위대의 진이 변화를 일으켰다.
‘왜?’
모래언덕 사이를 지나던 그들이 매가 날개를 펼치듯 옆으로 늘어서며 나란히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에 모래 먼지들이 강한 바람을 타고 구름처럼 넓게 퍼져 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도현이 가까이 다가온 호위대장에게 급히 소리쳐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뒤를 따라는 자들 중에 마법사가 있소. 그자를 막으면 마법의 힘으로 달리는 낙타들은 모두 죽을 것이오.”
호위대장의 말에 도현이 놀란 어조로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까?”
“그렇소. 파먼! 우르틴! 이리 오시오!”
호위대장의 손짓에 그들이 낙타를 바짝 조이며 호위대장 곁으로 모여들었다.
“잘 들으시오. 나를 비롯한 호위대 전원과 당신들은 지금부터 오로지 뒤에 있는 마법사를 죽이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거요.”
“우리보고 죽으라는 얘기입니까? 저들이 마법사가 죽게 지켜보겠습니까?”
파먼이 말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우리 낙타들이 먼저 지칠 거요. 저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소. 그리고 기습적으로 저들을 공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소.”
“어떻게 말입니까?”
“저기 앞에 보이는 높은 모래언덕을 넘어서 아래쪽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저들을 공격하는 거요. 그때 저기 흰 낙타를 타고 오는 마법사의 목숨은 반드시 끊어 놔야 하오.”
“설혹 성공한다고 해도 그 뒤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용맹하기로 소문난 베일 가문의 정예병들 같은데, 저들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파먼이 용병들의 대표 격으로 물었다.
“받으시오.”
호위대장은 대답 대신 달리는 낙타 위에서 작은 보석을 도현과 파먼, 우르틴에게 하나씩 던졌다.
햇빛에 반사된 푸른 빛깔이 아름다운 사파이어 원석이었다.
“가공을 해서 팔면 금화 40개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고가의 보석이오. 기습이 끝나면 알아서 살길들을 찾으시오. 릴리아 님을 호위하는 의뢰는 여기까지요.”
파먼과 우르틴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품 안에 보석을 단단히 넣어 두었다.
어차피 더 말을 길게 끌어 봐야 호위대장의 지시는 변함이 없을 것 같았고,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싸움은 피할 수 가 없었다.
무거운 시선으로 손에 든 푸른 보석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 역시 보석을 가죽 주머니 안에 잘 보관했다.
‘살아날 거야. 죽지 않아.’
도현은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저들과 피와 뼈를 내주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폭주를 하면 낭패를 볼 수 있었다.
“준비하시오.”
“저희들을 기다리지 마시고 계속 가십시오. 반드시 그러셔야 됩니다. 하루면 사막이 끝납니다.”
호위대장의 말에 옅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릴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잊지 않을게요.”
다소 냉정히 들리는 그녀의 말이었지만, 호위대장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낙타 속도를 조금 늦췄다.
뒤에서 일렬로 따라오던 호위대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한 그는 좌우를 쓸어 보며 소리쳤다.
“반드시 마법사를 죽여서 저들의 낙타를 쓸모없게 만들어야 한다!”
“네!”
비장하게 외친 그들의 앞에 거대한 모래언덕이 나타났다.
지친 낙타를 재촉해 힘겹게 오른 그들은 반대편에 도착하자마자 일제히 낙타의 목을 베 단숨에 절명시킨 뒤, 모래 바닥에 몸을 밀착시켰다.
그들에 이어 도현과 파먼, 우르틴도 낙타를 죽이고 모래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붉은 낙타의 피가 물처럼 흘러 그들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허리의 수통은 잘 보존하게. 혹 살아나더라도 물 없이 사막을 건널 수는 없으니.”
파먼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빕니다.”
“자네도.”
도현은 파먼의 건너편에 있는 우르틴에게도 조심하라는 눈빛을 보낸 후 턱을 들어 위를 쳐다봤다.
거대한 모래언덕을 넘어 적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귀로 생생히 들려왔다.
“준비!”
호위대장의 지시에 엎드려 있던 도현이 허리를 조금 세우며 눈을 빛냈다. 그의 손에는 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100여 마리가 넘는 낙타들이 마법에 걸려 평소 내던 것보다 훨씬 빠른 엄청난 속도로 거침없이 모래언덕을 넘어왔다.
마법이 풀리는 순간 죽을 운명이었지만, 낙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모른 채 달리고 또 달렸다.
“공격!”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이 일제히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검을 휘둘렀다.
반대편에서 모래언덕을 넘어오던 선두의 낙타 10여 마리가 다리가 잘린 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고, 타고 있던 베일 가문의 병사들 일부는 목이 부러지거나 낙타에 깔려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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