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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77화 (77/575)

[77] 디 임팩트 4권 2화

집 안은 조용했다.

작은 방문을 열자 잘 정리된 홍영의 물건들만 보일 뿐 기대한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병원에 보내며 익숙해져 버린 빈집이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마음이 허전했다.

빈방을 둘러보던 도현은 방문을 닫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홍영에게 선물로 주려고 이계에서 가지고 온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그는 용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자고 있을 용주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홍영의 일이 궁금해서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길게 신호가 간 뒤에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용주야.”

-어? 도현아!

“미안하다, 자는데 깨워서.”

-뭐가 미안해 자식아. 왔으면 전화하는 게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다친 데 없냐?

“괜찮아.”

-홍영 씨가 너 돌아온 걸 알면 정말 좋아하겠다. 오늘도 전화 왔었는데. 아, 너 홍영 씨에게 전화 안 했지?

“아직. 무슨 일 있었어? 집에 아무도 없네.”

-홍영 씨, 상해에 있어.

“상해에?”

-어머님이 아프다는 친척의 연락을 받고서 갔어. 그런데 너무 걱정 마. 지금은 좋아졌다고 하니까.

용주를 통해 홍영의 근황을 전해 들은 도현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아침에 보자.”

전화를 끊은 도현은 다시 홍영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신이 학창 시절 사용했던 책상 위에는 홍영이 반쯤 읽다 만 책이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와 도장을 함께 오가며 운동을 하는 시간 외에는 그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며 아버지 일로 분한 마음을 조금씩 해소하고 있었다.

그는 책갈피가 끼워진 곳에 목걸이를 놓고 책을 덮었다.

이계에 다녀온 사이, 5층 스포츠 댄스 학원은 어느새 운동하기 좋은 환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지하 호검술 도장보다 좋아 보이는 마룻바닥과 깨끗한 샤워 시설. 탁 트인 5층 창문을 통해 보이는 시원한 전망과 열린 창문 사이로 쉼 없이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

다소 답답해 보이는 지하 도장보다는 여건이 좋았다. 몇 가지 물품만 더 준비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문을 열어도 될 상황이었다.

“용주도 참.”

도현은 새로 칠이 끝난 벽 한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사진 액자 2개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사진 밑에는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호검술 계승자 1대 관장 백남식.

호검술 계승자 2대 관장 백도현.

아버지 사진이야 무관했지만, 자신의 사진도 액자 처리해 저런 설명 글과 함께 붙여 놓으니, 보기 민망했다. 분명히 용주 짓일 것이다.

뗄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아침에 출근한 용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현아, 형님 왔다.”

새벽에 통화를 했지만 얼굴을 보니 또 반가워 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용주야. 여기 잘해 놨는데.”

“괜찮나? 홍영 씨가 상해로 가기 전에 의논한 뒤에 이것저것 했는데.”

“다 좋아. 다만 내 사진 말이야. 이 사진은 좀 그렇지 않나?”

“보기 좋은데 뭘.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호검술 계승자 백도현. 캬아, 멋지지 않냐? 매일 관원들에게 이 사진을 보며 인사시키는 거야.”

“내가 교주냐?”

“예의라는 거야, 자식아.”

“내 사진은 떼자. 아버지 사진만으로도 충분해.”

도현이 사진을 떼어 내려 하자 용주가 인상을 썼다.

“자식이 공들여서 만들었더니. 그냥 둬. 홍영 씨가 그러라고 한 거야.”

“홍영 씨가?”

도현이 미심쩍은 얼굴로 용주를 쳐다봤다. 아침에 그녀와 통화를 했지만 그녀는 사진 얘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가 오갈 틈은 없었지만, 그녀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을 거라고는 생각이 안 됐다.

“정말이라니까? 전화해 봐. 무술 도장은 전통이 중요하다면서 그랬다니까.”

용주의 흔들림 없는 말에 도현은 뒤로 물러났다.

“그래?”

“이것 봐, 이 자식. 내 말은 말도 아니고, 홍영 씨가 그랬다니까 수긍하네. 이걸 확!”

용주가 주먹을 올려 보이자 도현은 피식 웃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빌딩과 차량들이 움직이는 도시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계에서의 여행과 여러 경험들로 그의 몸과 마음은 아직 그쪽에 잠겨 있었다.

“다 토해 내 봐, 이번엔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혹시 파란 눈의 여자와 아름다운 밤을?”

“마법사에게 죽을 뻔했어.”

짓궂게 웃으며 묻던 용주는 친구의 대답에 눈이 커졌다.

“뭐, 뭐라고? 마법사?”

“영화에서처럼 엄청난 마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 땅이 움직여 내 발목을 휘감았거든.”

“농담하냐? 그게 엄청난 마법이지.”

용주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시발, 마법이라니. 그곳에서 마법 배워 오면 세계 정복도 하겠다, 젠장.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래서 말이지.”

도현은 한동안 말문을 닫았다. 혼돈의 마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줘야 할지 고민이 된 것이다.

“야, 어떻게 됐냐고? 돈 줘? 이야깃값?”

친구의 재촉에 도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했어, 내가. 헐크처럼.”

도현은 차분히 폭주했던 일과 혼돈의 마나와의 관계, 그리고 딘과 리드만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에이, 시발.”

마법 이야기로 흥분되어 있던 용주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고,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세상에 공짜 없다더니, 내공 늘었다고 좋아했는데. 빌어먹을. 야, 걱정 마. 좋게 생각해. 적어도 위험에 처하면 숨겨 둔 힘이 발휘된다고. 그 뒤에 일은 생각하지 마. 네가 평상시 감정 터트릴 놈이냐? 안 그래?”

도현은 창턱에 올려놓은 손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랬으면 하는데. 또 하나 별로 안 좋은 사실을 알게 됐어.”

“뭘?”

“옆에서 담배 피우면 폭주한다는 거야.”

도현이 달려들려 하자 깜짝 놀란 용주가 얼른 담배를 껐다.

“도장에서 금연이다. 담배 피우지 마라.”

“아이, 미친놈. 놀랐잖아 자식아! 진짜인 줄 알고.”

버럭 소리를 친 용주는 손바닥에 생긴 땀을 옷에 닦았다.

“용주야, 그러지 않아야 하겠지만, 혹시 내가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피해야 돼. 폭주했을 때는 보이는 대로 모조리 파괴하고 싶은 욕구만 가득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조금 전 장난을 쳤던 도현은 진지한 태도로 말했고, 용주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네 손에 죽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으니까. 그런데 해결책은 전혀 없는 거냐?”

“아니,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도현은 다크캐슬 이야기와 그 때문에 시작된 긴 여정의 이야기를 짧게 설명했다.

“무법자 도시란 말이지. 느낌부터가 쎄 한데. 주변의 강한 몬스터들도 그렇고.”

굉장히 위험한 장소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공을 급상승시킬 수 있는 강한 몬스터들이 있고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고대인들의 비법이 존재할 만한 장소니까.”

“홍영 씨가 알면 걱정이 크겠다. 그래도 말해 줘야지?”

“숨길 문제가 아니니까. 만약을 대비해야 하기도 하고.”

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잘되겠지. 야, 그보다 마법 배워 보는 건 어떠냐? 너도 배울 수 있는 거 아니야?”

용주가 화제를 돌렸다.

“나도 궁금해서 리드만에게 슬쩍 물어봤었어.”

“왜, 안 된데?”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수련할 수 있는 체질 중에서도 또다시 마법사의 체질이 있었는데, 도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 것이다.

“그 사람 사제라면서. 뭘 알고 얘기하는 건가?”

“수련 마법사로 활약하다가 신을 섬기게 된 사람이야. 내게 거짓말할 이유도 없고.”

“그럼 나는? 내가 배우면 어떨까? 체질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용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사악한 마법사 흉내를 냈다.

“태선군을 얼음으로 만들어서 도현이 네가 검으로 산산조각 내는 거지, 흐흐흐.”

“마나는 둘째 치고, 설사 마법사의 체질이 된다 하더라도 고대의 마법어와 방대한 지식들을 두루 배워야 한대. 게다가 바람 한 점 만드는 수준으로 평생 살다 죽는 마법사가 대부분이고.”

“와아, 뭐 그러냐 마법이?”

용주가 잔뜩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 마법사는 사막에서 내게 쫓기다 죽을 뻔했어. 경우는 다르지만 숲에서 그 마법사도 내게 죽었고. 마법이라고 해서 절대 무적은 아닌 거지. 내려가자.”

도현이 공사가 끝난 5층 호검술 도장을 나와 아래층 계단을 밟았다.

“상해에 갈 거냐?”

뒤따라온 용주가 물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오지 말래. 모레 온다고.”

아침에 들은 홍영의 전화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옆에서 홍영의 어머니가 잔소리 비슷하게 그녀에게 말하는 소리도 들렸는데, 일상적인 편안한 분위기여서 도현은 걱정을 조금 지울 수 있었다.

홍영의 어머니는 큰 병이 걸린 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져 발목을 다친 상태에서 감기 몸살까지 겹쳤는데, 그 사실을 안 그녀 친척이 연락을 한 것이다.

집 떠나와 한국에 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 홍영으로서는 어머니도 보고 싶고 걱정이 되어 안 가 볼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지하 도장 문 앞에 선 도현은 출입문을 열려다가 뒤돌아섰다.

“용주야, 나 없는 동안 뭐 이상한 일 없었어?”

“이상한 일?”

용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없었는데. 3층 공실 하나 너 없는 동안 임대 줬고, 백두TV 이 피디가 찾아온 것 외에는.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도현은 새벽에 그에게 혼이 나고 돌아간 서지철을 떠올렸다.

‘정말 도둑이었나?’

좀도둑으로 치부하기엔 무술 솜씨가 상당해 보여서 뭔가 석연찮은 부분도 있었다. 그 눈빛도 그랬고. 하지만 자신 역시 이계에서는 뜻하지 않게 도둑으로 움직인 적이 있었다.

“왜 그러는데?”

도현이 문을 열고 지하 도장으로 들어가자 용주가 물었다.

“도둑이 들었어.”

“뭐? 도둑? 어디에, 집에?”

“아니, 도장에.”

새벽에 서지철을 혼내 주고 보내 준 상황을 들은 용주는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 도둑 정말 재수도 없구나. 하필 그 시간에 들어오냐. 그럼 이게 그 도둑이 사용하던 곤봉이야?”

“맞아.”

용주는 관장실 한쪽에 놓인 곤봉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제법 묵직한 게 제대로 맞으면 상당한 타격을 입힐 무기 같았지만, 사람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칼보다는 일반적으로 덜 위협적인 물건이었다.

“근데 정말 도둑 맞을까?”

웃음기를 거둔 용주가 곤봉을 내려놓으며 도현을 쳐다봤다.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어. 누군가를 노리고 들어왔다면 사람이 있을 때 들어왔겠지. 그리고 감기라도 걸렸는지 계속 쿨럭거렸거든. 몸이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벌일 일은 아니라는 거지. 우발적으로 도장에 들어온 느낌이 나서 말이야.”

“듣고 보니 그러네.”

용주는 피식 웃으며 곤봉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서지철은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쫘악 뺐다. 수건을 머리 위에 올리고 온탕에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있던 그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을 출렁이며 일어났다.

엉덩이의 부기가 상당히 가라앉고 통증도 많이 가셨지만, 뼛속 깊이 각인된 수치심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감히 내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 백도현!’

잠시 흥분하며 몸을 부르르 떨던 그는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렸다. 시퍼렇게 멍이 든 그의 엉덩이를 보고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사내 둘이 그를 비웃고 있었다.

“뭘 보노? 빨리 안 끄지나?”

요즘은 이상하게 조폭들과 많이 시비가 붙는 것 같았다. 서지철은 문신을 자랑이라도 하듯 어깨를 벌리고 폼 잡고 앉아 있는 두 놈을 잠시 노려보다가 천천히 온탕 밖으로 향했다.

“엉덩이가 아주 토실토실하네?”

“수박 아이가? 줄무늬가 있는데?”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녀석들의 목소리에 서지철은 다시 온탕으로 들어와 그들 앞에 섰다.

“와? 한번 해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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