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디 임팩트 4권 5화
기대를 한 이 피디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꺾였다.
‘한번 출연해 주면 안 되나? 아오, 이 콧대 높은 백 관장 녀석!’
속이 상한 이 피디가 속으로 도현을 욕했다.
“제가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 피디도 따라 일어났다.
“5층 도장에서 관원들을 교육시키는 게 조용주 사범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그럴 예정입니다.”
“조 사범의 검술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걱정 마십시오. 호검술 사범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도현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국장에 나타난 홍영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단연 돋보였다.
혼잡스러운 사람들 틈 사이로 마주 선 그들은 반가운 눈빛을 서로 교환하다가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항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날 밤 도현은 그녀와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차분히 이계에서의 일을 설명해 줬다.
“그래도 폭주가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위기에서 구해 줬잖아요.”
그녀는 혼돈의 마나 얘기에 사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다.
“그래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게 좋겠죠? 다크캐슬이라는 곳에 기대를 해 봐요. 그리고 혹, 그곳에서 뜻대로 안 된다고 해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요. 시간이 필요한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도현이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다 다크캐슬에서 위험에 처할까 봐 홍영은 차분히 주의를 줬다.
“알았어요.”
“약속해요. 몸에 화살 맞고 이계에서 죽지 않기로.”
홍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맥주 캔을 내려놓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도현이 경험한 가장 위험한 상황을 대표적으로 꼽으며 그녀는 다시 한 번 도현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도현은 수련으로 거칠어진 새끼손가락을 천천히 내밀어 그녀와 약속을 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술자리를 정리한 홍영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위에 누웠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화살을 맞고 두 다리가 땅에 속박당한 채 불길에 휩싸여 있던 도현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녀는 가슴이 떨렸다.
딘이라는 영주가 말한 기운 때문에 폭주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영 도현을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절박하고 애탔던 도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녀는 잠을 청해도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앞으로 더한 위험이 도현 앞에 생길 것 같은 예감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의 방으로 달려가 이계는 그만 가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의자를 빼서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 조명을 켜서 책상 앞만 환하게 만든 그녀는 어머니 일로 상해로 가기 전까지 읽었던 에세이집에 손을 댔다.
인생의 선배가 쓴 담담한 필체의 수필들은 그녀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는 주옥같은 글들이었다.
글 속에서 위안을 얻으려던 그녀는 약간 불록해진 에세이집이 이상했지만 별생각 없이 책갈피가 끼워진 부분을 펼쳤다.
작은 보석이 박힌 황금빛 목걸이가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놀란 그녀는 목걸이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누가 이런 걸 가져다 놨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울을 보며 목걸이를 한 그녀는 왠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스탠드 불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도현의 집이 이제 정말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예쁘네요.”
도현이 지나가는 투로 말하며 운동화를 신었다. 새벽 수련을 함께하기 위해 나온 홍영의 목에는 그가 이계에서 가지고 온 목걸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가 놓고 갔어요.”
“누가요?”
“글쎄요. 누굴까요?”
빙그레 웃으며 답하던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한발 먼저 집 밖으로 나가는 도현을 따라갔다.
“그런데 난 이런 스타일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요?”
도현이 당황하며 하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 시선을 뒀다. 자신이 보기에는 잘 어울리는데, 그녀는 별로였나 보다.
“도현 씨가 책 사이에 끼워 놓은 거죠?”
“목걸이가 없는 것 같아서.”
도현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난생처음 여자에게 목걸이 선물을 했는데, 괜히 했나 싶었다.
“좋아요.”
“네?”
“이 목걸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요. 조금 전은 장난이었어요.”
활짝 웃으며 말한 그녀는 도현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옷 밖으로 내놨던 목걸이를 안으로 넣었다.
“근데 이 목걸이에 박힌 보석 진짜 아니죠?”
“이계 보석 상점 주인이 가짜를 팔지 않았다면, 진짜겠죠?”
“어머, 이게 그럼 이계에서 가지고 온 목걸이였어요?”
홍영이 놀라며 목걸이를 옷 밖으로 꺼내 자세히 살폈다. 콩알보다 작은 푸른색 보석이 황금 줄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감각적이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단순함 속에서 묻어 나오는 우아함과 멋이 있어서 그녀는 오히려 그 점이 더 마음에 든 목걸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포인트로 박혀 있는 사파이어가 진짜일 거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저 도현이 그녀를 기다리며 이미테이션이지만 마음이 깃든 선물을 가게에서 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곳은 보석이 싸요?”
“아니요. 그곳도 보석은 귀해요.”
“그런데 왜 사 왔어요? 돈이 없어서 용병으로 일하며 대륙을 횡단했다면서요. 사막에서 고생도 하고.”
“다크캐슬까지 갈 경비 정도는 충분히 남겨 놨어요.”
“그래도요.”
“한 달 넘게 그곳에서 지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도현이 멈췄던 걸음을 옮기며 말했고, 그 옆을 홍영이 조용히 함께했다.
“김치도 먹고 싶고, 자장면도 먹고 싶고, 소주 맛도 그립고. 그런데 제일 힘들었던 게 뭔 줄 알아요?”
“뭔데요.”
“외로움요.”
“도현 씨.”
“아침에 눈을 뜨면 왼팔의 타투가 이상 없는지 가장 먼저 확인을 했어요. 그리고 유혹을 받아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있다. 불안전한 이계의 생활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을 당장이라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집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유혹을 참고 기다리며 긴 여행을 했어요.”
도현은 걸음을 늦추며 홍영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 마음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목걸이에요. 그냥 받아요.”
도현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말에 홍영의 눈가가 붉어졌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눈가를 훔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고마워요.”
도현과 용주는 탈의실에 연결된 작은 창고 방을 열어서 안의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에는 수십 년간 백남식 관장이 관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한 수련 도구들이 가득했다.
다음 주부터 5층 도장 문을 열어 관원들을 받기로 했기에, 더 이상 지하 도장에 있을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위층으로 옮겨야 했다.
“이 모래주머니 차고 내가 고생한 생각을 하면.”
거의 10년 전에 사용한 모래주머니를 보고 용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스에 담긴 모래주머니는 백남식 관장이 호검술 기초 수련법의 일환으로 초보자들의 다리에 채우던 것으로, 이미 낡고 군데군데 실밥이 터져 모래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사용하기 곤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너 그때 많이 고생했지.”
도현이 웃으며 실밥이 터진 모래주머니들이 가득한 박스를 옆으로 옮겼다. 그 뒤에는 납주머니가 여러 형태로 종류별로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말도 마라. 남들은 모래주머니 하나 채우시면서 관장님이 나만 2개씩 채웠잖아. 똥이 안 나오더라.”
“네가 자질이 되니까. 그리고 철호 형은 3개씩 차고 했어. 알잖아.”
무심코 대꾸를 하던 도현과 옆에서 듣던 용주는 거의 동시에 몸이 굳어졌다.
은연중 장철호 얘기는 피했는데, 며칠 전 식당에서 우연히 이야기가 나온 후 이렇게 가끔 이야기에 그가 출몰하곤 했다.
“뭐, 그건 그거고.”
용주가 헛기침을 하며 도현이 창고 방에서 내미는 납주머니 나무 박스를 뒤쪽으로 옮겼다.
“아무튼 이런 것들이 결국엔 다 도움이 되더라고.”
검술을 익히고자 들어온 사람들이 이를 갈며 나가는 게 모래주머니 하체 수련과 보법 수련 때문이었다. 검을 잡기 전 죽어라 시키는데, 운동에 목을 매지 않는 일반인들이 참지 못하고 나가는 건 당연했다.
용주도 그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은 모든 게 다 이해가 된다. 단순히 하체의 중심을 잡아 주고 검과 함께 움직이는 보법을 미리 숙달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검을 배우는 마음가짐을 험난한 과정 속에서 미리 다듬어 주었던 것이다.
검은 누가 뭐래도 위험한 물건이다. 장난스럽게 들고 다녀서도 휘둘러서도 안 되고, 더구나 호검술은 실전 검술이라는 말을 붙일 만큼 위험한 검술이었다.
아무렇게나 배워서도 배울 수도 없는 것으로,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백남식 관장의 철학이었고, 그 철학은 호검술 도장의 정신이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5층 도장도 수십 년간 지속된 전통 수련 방식을 그대로 고수할 참이었다.
달라질 게 있다면 모래주머니 대신 이제는 납주머니로 바뀌었다는 사실뿐.
“솔직히 한 달 회비로 백만 원씩은 받아야 하는데.”
박스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용주의 말에 뒤따르던 도현이 피식 웃었다.
“배우려는 사람이 있겠어?”
“가치를 모르니까 그러지. 한석호 선배 봐라. 네게 뭐라고 했냐? 대련하는 데 천만 원 달라고 했다면서? 그 의미가 뭐겠냐? 자부심이 있다는 거 아니야. 우리도 호검술에 대한 가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동네 도장이다. 너무 앞서 가지 말자.”
“네가 방송에 나가서 그 일본 사과 베기 검객과 시합을 해서 이기면 한 큐에 끝나는 건데 말이야. 아마 백만 원이라고 해도 배울 사람은 호기심에 와서 배우려고 할걸.”
“방송에 출연하라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예를 들면.”
“너 이 피디하고 어제 술 마셨지?”
“어? 어. 그건 어떻게 알았냐?”
당황한 용주가 말을 더듬었다.
“수상해.”
“뭐, 뭐가, 인마.”
“아니야. 올라가자.”
도현이 웃으며 지나쳐 가자 용주가 뒤에서 소리쳤다.
“야! 너 그 미소 기분 나쁘다. 난 뭐 그 사람하고 술도 못 마시냐?”
“누가 뭐래? 어서 와.”
“둘이 그곳에서 뭐 해요?”
5층에서 내려오던 홍영이 물었다.
“용주가 이호선 피디하고 술을 마셨어요.”
“어머, 그래요?”
홍영이 쳐다보자 용주가 박스 옆으로 고개를 내밀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뭐 어쨌다고 그러지?”
“전화하지 말아요.”
택시를 타고 가던 용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과가 안 좋은가 보죠?
이 피디의 조심스러운 말에 용주가 코를 파며 답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아무튼 이 피디님, 더는 방송 문제로 제게 전화 안 하셨으면 합니다.”
-내일 시간 있으십니까?
“왜요? 또 술 마시자고요? 됐습니다. 도장 곧 오픈해서 준비할 게 많아요.”
-그게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뭘요? 전화상으로 말씀하십시오.”
용주가 창밖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조 사범님도 눈을 가리고 사과를 벨 수 있는지 말이죠.
“네? 으하하하! 그걸 뭘 또 확인하고 자시고 해요. 천하에 나 조용주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습니까? 나 호검술 도장 사범이에요, 조 사범. 백 관장 밑에 딱 한 명 있는.”
-그러시면 조 사범님이 이번 한일 검객 열전에 출연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뭐라고요?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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