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디 임팩트 4권 6화
느긋한 자세로 택시 창밖을 응시하던 용주가 바로 앉았다.
-네. 백 관장님이 나서시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고 하니까요. 차선책으로 백 관장님과 같은 검술을 배우는 분으로 조 사범님을 소개하고 일본의 검객과 시합을 하는 거죠. 어떠십니까?
“글쎄요. 생각을 좀 해 봐야겠는데요. 도현이가 제 친구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호검술 도장의 총책임자가 아닙니까? 제 독단으로 방송에 나가기도 그렇고요.”
-그럼 깊이 생각해 보세요. 저를 좀 살려 준다고 생각하시고요.
“모르겠습니다. 전, 남의 입장보다 제 입장이 중요하고 제 입장보다는 도장의 입장이 중요하니까요. 이만 끊습니다.”
긴말 않고 전화를 뚝 끊은 용주는 창문을 열어 찬 바람을 흡입했다.
이태원에 있는 KM종합격투체육관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 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그는 담배를 피우며 어두운 길거리에서 잠시 배회하다가 담배를 끄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복싱, 주짓수, 무에타이 등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종합 격투기 체육관에는 학생이나 회사원 등 일반 수강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개중 몇몇만이 전문 격투 선수였다.
“없어요?”
“어깨 부상당한 뒤로, 여기 안 나온 지 꽤 됐습니다.”
“연락처도 모르시고요?”
“전화번호를 바꿔서요. 연락도 안 됩니다.”
체육관 관계자의 말에 용주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곳에서 장철호도 구슬 같은 땀을 흘렸을 것이다.
“혹시 장 선수가 어디 있는지 알 만한 사람 없을까요?”
“글쎄요.”
“부탁입니다.”
체육관 관계자는 머뭇거리다가 용주에게 물었다.
“장철호는 왜 만나려고 하는 겁니까?”
“밥이나 한 끼 하려고요.”
“네에?”
용주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린 체육관 관계자는 몸을 반쯤 틀어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젊은 사내를 불렀다.
“너 얼마 전에 장철호 봤다고 했지?”
“네, 근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괜찮아. 이분에게 그곳이 어딘지 말해 줘.”
고시원 주방 냉장고는 공동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간혹 가다 다른 사람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장철호가 저녁을 먹기 위해 고시원 주방문을 열었을 때 젊은 여자 둘이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누가 자꾸 장조림을 빼 먹는지 몰라.”
“양심도 없지. 매너도 없고.”
장철호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그녀들을 무시하며 그릇에 밥을 잔뜩 담았다.
고시원 생활을 하며 반찬 도둑으로 오해를 받은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산적처럼 우락부락한 그의 인상 때문에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고시원 사람들도 없었고, 삭막한 고시원 분위기 속에서 그는 반찬이나 몰래 축내는 마왕으로 인식돼 버렸다.
그렇다고 그의 앞에서 대놓고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한두 마디 말로써 자신들이 다 알고 있으니, 그만 훔쳐 먹으라는 여자들의 경고가 전부였다.
김치 하나에 막 밥을 먹으려는 그때, 주방 문이 열리며 고시원 총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저씨, 밖에 사람 찾아왔어요.”
“날 찾는 사람이 왔다고요?”
장철호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누가요?”
“모르겠는데요.”
연락도 다 끊고 고시원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누군가 찾아왔다는 게 이상했다.
‘인력 식구들은 아닐 텐데.’
고시원 출입구로 걸어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낮에 시멘트 포대를 지고 가다 옆 사람하고 오른쪽 어깨를 세차게 부딪쳤었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통증은 다른 날보다 훨씬 심했다.
눈을 감고 고통에 신음하던 그는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용주가 복도 끝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아픔보다 어떤 자괴감과 창피함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아픔을 참으며 그는 천천히 용주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눈앞에 장철호가 서자 용주는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반쯤 틀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용주야, 여긴 어떻게…….”
“지나다 들렀어요. 저녁은요?”
“이제 먹으려고.”
“나가요. 밥이나 함께하게.”
“용주야.”
“밑에서 기다릴게요. 얼른 나와요. 배고프니까.”
고시원 건물 밖으로 먼저 나온 용주는 속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댔다. 눈빛이 살아 있는 철호 형이었는데, 지금은 이빨, 발톱 다 빠진 생기 없는 호랑이와 같았다.
“젠장.”
담배를 비벼 끈 그는 뒤에서 다가오는 장철호를 돌아봤다. 얼굴이 어둡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내일 죽기라도 합니까? 표정이 왜 그래요?”
“뭐 먹을래.”
“형이 사려고요?”
장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고기요. 한우로.”
옷 안에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장철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가자.”
“오늘 많이 먹을 겁니다. 돈 좀 나올 거예요.”
“마음껏 먹어.”
근처에 있는 한우 전문점으로 간 용주는 말없이 고기를 먹다가 조용히 물었다.
“운동은 완전히 접은 거예요?”
“응.”
“요즘 뭐 하고 지내요?”
“일하고 있다.”
“무슨 일요?”
“막노동.”
“이야, 어느 마음씨 좋은 사람이 몸도 정상이 아닌 사람을 불러 준데? 주택 경기가 안 좋아서 일거리도 적을 텐데.”
“그러게.”
장철호는 용주가 따라 준 소주잔을 왼손으로 비우며 담담히 말했다. 식당에 들어와서 오른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에 용주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깨가 완전히 나간 겁니까?”
“응.”
“수술해도요?”
“전에 한번 크게 다친 곳이라서.”
“깝깝하다. 깝깝해.”
연거푸 술잔을 비운 용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갈게요. 열심히 사십시오.”
“용주야.”
장철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용주를 올려다봤다.
“미안하다.”
눈가리개를 한 용주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옆으로 검을 휘둘렀다. 홍영이 던진 사과는 그의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날카롭게 얼굴을 때렸다.
퍼억.
움찔한 용주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홍영 씨 다시요.”
휘익.
사과가 등 뒤에서 날아왔고, 그 어느 때보다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용주는 허리를 비틀며 멋들어진 자세로 수평으로 검을 그었다.
사악.
‘벴다!’
열 번 만에 사과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는 계속 실패했다.
비껴 맞고,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때로는 너무 빨리 검을 휘둘러서 검이 지나간 공간으로 사과가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다.
수십 개의 사과 중 그가 완벽히 반으로 자른 건 단 하나. 그 외는 모두 실패로 봐야 했다.
눈가리개를 푼 용주는 굴러다니는 사과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쉽지 않네.”
“왜 갑자기 이런 걸 하는 거예요?”
홍영이 사과를 먹으며 다가왔다. 용주가 사과 상자를 들고 나타나 부탁을 해서 사과를 던져 주긴 했지만,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갑자기 한번 해 보고 싶어서요.”
용주는 사과를 상자에 주워 담으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젠장, 사과가 날아올 때마다 느낌이 오긴 했는데, 정확도가 떨어져.’
기감을 느끼는 단계에 접어들긴 했지만 아직 용주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래도 계속 연습하면 어찌 될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사과를 줍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앞에 도현이 서 있자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뭐야, 자식아. 귀신도 아니고, 언제 들어왔어.”
“지금 막. 근데 왜 놀라?”
“어? 아니야 아무것도. 삼촌은 잘 만나고 왔냐?”
“응, 마법사 얘기에 아주 놀라시더라고.”
가평의 조 박사를 만나고 온 도현은 도장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훑어보다가 그중 하나를 집어 입에 베어 물었다.
“홍영 씨, 용주하고 뭐 하고 있었어요?”
“눈 가리고 사과 베기요.”
홍영은 웃으며 답했다.
“네? 그걸 왜?”
도현이 사과를 먹으며 용주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용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해 본 거야. 나도 할 수 있나 싶어서. 사과 맛있지?”
상가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비우던 용주는 뒤를 돌아다봤다. 도현이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왔다.
“웬 아이스크림?”
“홍영 씨가 사 왔어. 골라 봐.”
“뭘 골라 자식아. 다 똑같은 맛인데.”
피식 웃은 용주는 담배를 끄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쑥 넣었다.
“용주야.”
“왜.”
“무슨 일 있냐?”
“응? 아니. 일은 무슨.”
“어제 일찍 퇴근하고. 오늘은 또 얼굴이 무슨 근심 있는 것 같잖아.”
용주를 잘 알고 있는 도현은 그의 웃는 얼굴 뒤에 가려진 무거움이 느껴졌다.
“별거 아니야.”
“말해 봐. 왜 그러는 건지. 이 피디 때문에 그래?”
“자식이 뭔 소리야. 내가 이 피디 때문에 신경이나 쓸 사람으로 보이냐?”
“그러면.”
“후우, 그게.”
반쯤 먹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용주는 잠시 주저하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장철호 그 인간 때문에.”
“철호 형?”
“진짜 보기 싫어서 안 보려고 했는데, 그냥 궁금해서 한번 찾아가 봤거든. 근데 참 재미없게 살더라고. 어깨는 다쳐서 빌빌거리고.”
고시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는 그의 얘기를 담담히 한 용주는 말을 멈추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다 넣었다.
“아 ,이 시려.”
입을 벌리며 시간을 끌던 그는 도현을 힐끗 쳐다봤다.
“내가 괜히 갔나?”
“아니, 잘 다녀왔어. 나도 그 형 생각이 요즘 계속 났거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도 했고.”
도현은 차분히 말하며 멀리 시선을 두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거친 인상과 달리 부드러운 말투의 사내. 하지만 근성 하나는 남달랐던 사내.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집안에 장철호가 들어왔을 때 일어난 변화는 무궁무진했다.
아버지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하며 자라 온 도현은 말수가 정말 적은 편이었는데, 장철호와 함께 살면서 그나마 말이 조금 많아졌고 무표정했던 얼굴에도 미소가 조금씩 걸리기 시작했다.
중학생인 그를 얕잡아 보고 덤비던 장철호는 목검에 호되게 당하기도 하고, 라면을 잘 끓여서 도현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까불거리며 천방지축으로 사고를 치고 다니던 용주와 가까워질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검만 알고 자라 온 그에게 장철호는 사람과 어울리면 재밌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주었고, 도현은 큰마음 먹고 용주와 친구가 된 것이다.
“부상을 당하고 격투 세계에서 떠났다고 했어도 재활해서 또 나타나겠지 싶었는데, 가 보니까 전혀 아니었어. 그 형도 한계에 봉착했나 봐.”
용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던 거냐?”
“좋진 않지. 돌아가신 백 관장님 생각하니까 더더욱.”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뭘 어떻게 해. 이젠 끝난 사이인데.”
냉정하게 말한 용주가 담배 연기를 휘날리며 몸을 아래로 숙였다.
새로 설치한 호검술 도장 간판이 바로 밑에 보였다.
“이 피디하고 김 작가 관원으로 들어오면 마구 굴려야지, 흐흐흐.”
음침하게 웃던 그는 도현에게 말했다.
“철호 형 신경 쓰지 말고, 넌 이계에 가서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살아서 강해져 올 것인지만 연구해.”
“알았어. 저녁은 홍영 씨하고 둘이 먹어라.”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도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디 가는데?”
“알잖아. 어디 갈지.”
반장이 차를 세웠지만 장철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승합차에서 내릴 생각을 안 하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철호, 안 내려?”
같이 일하는 김 씨가 옆구리를 툭 치며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장철호는 그때서야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반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고.”
멀어지는 승합차를 잠시 바라보던 장철호는 고시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심해 보였겠지.’
용주를 만난 기쁨보다는 나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들켜 버린 것 같아서 오늘 일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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