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디 임팩트 4권 8화
“하하하! 그럼요. 사범님 말씀 존중하고, 그대로 따를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김 작가도요. 안 그래, 김 작가?”
김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도현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생겨서 찾아오긴 했지만, 검을 배우고 싶은 마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도현이 앞으로 나섰다.
도현이 온 줄도 모르고 있던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반가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용주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어쭈? 이 사람들이. 조금 있다 죽었어.’
은근히 차별당하고 있다는 걸 감지한 용주가 목을 소리 나게 돌리며 도현 옆에 나란히 섰다.
도현은 배 나온 이 피디와 헐렁하게 느껴지는 도복을 걸치고 있는 김 작가를 둘러보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관장 백도현입니다.”
이미 아는 사이였지만 도현은 마치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그 가볍지 않은 행동에 이 피디와 김 작가는 절로 긴장감이 생겨 침을 꿀꺽 삼켰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앞으로 오래토록 이 자리에서 봤으면 합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한 도현은 조용히 도장 출입구로 향했다. 뭔가 거창한 말을 기대했던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도현이 정말 그대로 나가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그의 등을 좇았다.
“누구지 저 여자는?”
도현과 얘기를 하며 5층 도장을 나가는 홍영을 보고 김 작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쁘지?”
이 피디가 몽롱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알아요, 저 사람?”
“백 관장과 친구 사이라고 들었어. 단아하니 남자가 아주 좋아할 스타일이지. 저 여자가 조 사범 대신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정신 좀 차리시죠?”
“내가 정신을 차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검 배우러 왔지 여자 보러 왔어요?”
“너야말로 백 관장 보러 온 거 아닌가?”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니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두 사람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합니까!”
도현과 홍영을 보내고 온 용주는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엎드리세요.”
“또요?”
“엎드려!”
“두 사람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어요.”
도현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홍영에게 말했다. 오늘은 용주가 정신교육을 시킨다며 얼차려 비슷한 것을 주겠지만, 다음 날부터는 납주머니를 몸에 부착시키고 아버지가 만든 기초 수련법에 따라 교육이 시작된다. 보통 정신력 가지고는 버티기가 힘들 것이다.
더구나 방송국 예능 피디와 작가라는 일이 일반 직장인들처럼 고정된 출퇴근 시간이 딱딱 지켜지는 게 아니어서 매일 같이 도장을 찾아올 여건도 안 됐다.
하루 이틀 건너뛰면 몸만 굴리는 것 같은 도장과는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도현 씨를 높이 평가하잖아요. 일단 그건 굉장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어요. 기대해 보자고요. 그런데 그분은 오늘 안 오려는가 봐요?”
도현을 따라 상가 건물 밖으로 나온 홍영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오늘부터 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올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철호가 어둠을 헤치고 등장했다. 성큼성큼 걸어오던 그는 건물 앞에서 기다리는 도현에게 미소를 보였다.
“도현아.”
“저녁 식사는 하시고 온 거예요?”
“나중에 먹지 뭐. 일 끝나고 바로 왔어. 그런데 옆에 분은.”
“안녕하세요. 홍영이에요.”
홍영은 통나무처럼 튼튼해 보이는 하체와 사각턱에 주먹코를 가진 장철호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도현에게 듣던 대로 한 인상하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어딘지 순박한 모습도 엿보였다.
“아! 그럼 당신이!”
장철호는 뭔가 퍼뜩 떠올리며 홍영 옆에 서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분 맞지?”
“네, 맞아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홍영 씨. 장철호라고 합니다.”
“절 아세요?”
“그럼요. 도현이가 예전에 중국에 아름다운 소녀가 있는데 자꾸 생각난다고 제게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구요. 그 소녀가 홍영 씨죠.”
“형, 그만하시고 올라가 보세요. 용주가 5층에서 새로운 관원들 교육시키고 있어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도현이 장철호의 입을 막았다.
“어? 어, 그래.”
그가 올라가자 홍영이 빙그레 웃으며 도현의 팔짱을 꼈다.
“그런 적이 있었어요? 내가 자꾸 생각났어요?”
“조금요.”
“조금인데 남에게 물어요?”
키스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다가오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도현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쓸어 봤다.
“들어가요, 그만.”
도현이 지하 도장으로 도망치듯 피하자 홍영이 웃으며 따라갔다.
“홍영 씨, 어제 내가 말한 것처럼 철호 형에게는 태선군 얘기하면 안 돼요. 알았죠?”
한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장철호에게 아버지 일로 당장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회를 봐서 얘기를 하기는 할 것이다.
그의 몸이 정상이 되는 날.
“이계는요? 내일 도현 씨 이계로 넘어가면 당장 어디 갔냐고 물을 텐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잘 말해 놓을게요.”
“우리는 검을 배우러 왔어요. 왜 기합만 주는 거예요!”
김 작가가 오리걸음으로 도장 내부를 여러 바퀴 돌다가 더는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다.
소리를 치는 순간에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기합이 아닙니다. 수련이에요.”
“뭐라고요?”
“호검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기초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지금 그 수련을 했다가는 둘 다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벼운 워밍업으로 몸을 풀어 주는 거예요. 정신도 긴장시키고. 내일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될 테니 시키는 대로 해요.”
“말도 안 돼요! 당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우리 골탕 먹이려고요?”
“당신?”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용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교육 중에는 사제 간의 예의를 지키자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씨알도 안 먹히네. 도대체 여기 와서 뭘 바란 거야? 호검술 배우러 온 거 아닌가? 안 그래요, 이 피디님?”
김유진이 용주와 대화를 하는 틈을 타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리던 이 피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요. 조 사범님, 내가 봐도 그냥 무작정 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무작정 굴리지 않는다!”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장철호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누구세요?”
김 작가와 이 피디가 흠칫하며 물었다.
“나? 예전에 여기서 사범 했던 사람이다. 조 사범이 한 말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호검술 배우기 싫으면 관두고.”
우락부락한 장철호의 서늘한 눈빛에 이 피디와 김 작가는 기가 죽어 얌전히 다시 오리걸음으로 도장을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용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범실로 장철호를 데리고 갔다.
과거 사범으로 있던 장철호는 교육 시간에는 엄하기 그지없었다. 백남식 관장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했기 때문이다.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하세요. 제가 다 알아서 컨트롤할 수 있는데요.”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냥 말이 나왔어.”
“후우, 여기 옷요.”
미리 준비해 놓은 도복을 장철호에게 넘겨주며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잘 왔어요, 형.”
얼굴이 노출된 상태에서 다시 목표물에 접근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환상적인 변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 안에서 거울을 보던 서지철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변장에 만족해 했다.
콧수염을 붙이고 두꺼운 검정색 뿔테 안경으로 얼굴을 상당 부분 가렸다. 코 옆 사마귀 부분에는 가짜 점을 붙였다.
이혼한 아내와 어린 딸이 자신을 가까이서 보더라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변장이라고 그는 자화자찬을 하며 마지막으로 멀쩡한 이에 끼울 수 있게 특수 제작된 틀니를 위에 꼈다.
앞 입술이 불룩하게 나온 게 어수룩해 보였다.
“백도현, 넌 끝났어.”
씨익 웃은 그는 조수석에 있던 은색 가방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마취 총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도구를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보다 싸움 실력이 출중한 도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스포츠맨이 아니다. 프로 해결사다.
마취 총을 코트 안쪽에 숨긴 그는 차에서 내려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도현의 상가 건물 방향으로 걸어 올라갔다.
‘5층에 새 도장을 열었군.’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호검술 도장의 새 간판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놈 실력을 보면 관원들이 상당히 몰려들 것 같은데.’
길 건너에서 5층을 올려다보던 서지철은 대담하게도 도장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변장에 자신감을 가진 그는 5층에 올라가기 전에 지하 도장 쪽으로 몸을 틀어 몇 걸음 걸었다.
‘지하 도장은 폐쇄된 건가?’
확인해 봐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잽싸게 몸을 돌렸다. 지하 도장 입구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자식이 뭔가 눈치챘나?’
새로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미간을 찌푸린 그는 지하 도장 문을 열며 도현과 홍영이 나오자 깜짝 놀라며 위층으로 향했다.
‘거지 같은 것들. 지금도 붙어 다니네.’
5층으로 올라가던 그는 도현이 홍영과 대화를 나누며 계속 따라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건물 밖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잘못했다.
분위기가 5층의 도장으로 가는 것 같아서 그는 3층 복도로 빠졌고, 다행히 도현은 위층으로 계속 걸어 올라갔다.
그는 5층 도장을 살펴보는 걸 포기 하고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와 맞은편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은 그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길 건너 도현의 건물을 노려봤다.
“기회가 오면 넌 끝이다. 백도현!”
파김치가 된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덜덜 떨리는 두 다리로 도장을 나섰다. 도현이 할 수 있다며 격려의 말을 해 주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은 더 심해진다고 한다.
“피디님, 계속 다닐 거예요?”
“묻지 마. 힘없어.”
기다시피 해서 건물을 빠져나온 그들은 차에 탄 뒤에 축 늘어졌다.
“그래, 이제 알겠어.”
“뭐를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던 김 작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관원들이 없던 이유 말이야. 혹독한 교육 때문에 다 중간에 도망간 거야. 미친 도장 같으니라고. 오늘도 힘들었는데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힘들어진다고?”
“호호호!”
갑자기 깔깔대며 웃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 이 피디가 흠칫했다.
“너 미쳤냐? 왜 웃고 그래?”
“우습잖아요. 도장이 저 건물에 20년간 있었다면서요.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고생하면서 도장 욕을 했겠어요.”
“많겠지.”
이 피디는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는 거예요?”
“내 신세가 하도 처량해서.”
“왜요?”
“검이고 뭐고 다 관두고 싶은데, 생각해 보니까 그럴 수가 없잖아. 최 국장에게 도장 다니면서 기회를 본다고 이미 말해 버렸거든.”
“힘내세요. 저랑 함께 다녀요.”
“아니, 넌 그만둬. 지옥 같은 도장을 너라도 벗어나야지.”
“괜찮아요. 우린 한 팀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울컥한 이 피디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물을 닦았다.
“그래, 끝까지 가 보자. 이 끝에 뭐가 기다리는지 말이야.”
도망자
도현은 홍영과 아침에 영화를 보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오후에 돌아와 철제 캐비닛 안에 넣어 두었던 가죽갑옷과 검 등을 꺼내 하나둘씩 몸에 착용했다.
금화가 든 돈주머니까지 꼼꼼히 챙긴 그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홍영에게 말했다.
“이번에 가면 가능한 오래 있다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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