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디 임팩트 4권 10화
출항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났다. 바람에 강물이 출렁이자 큰 여객선이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쳤고, 토악질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배를 처음 탄 사람이든, 과거에 여러 번 배를 타 본 사람이든, 갑자기 흐려진 날씨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물살은 선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나?”
한차례 토악질을 한 곱슬머리 사내가 손등으로 침을 닦으며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의 신색은 편안했기 때문이다.
“힘들지만 참을 만합니다.”
“어떻게 참는지 알려 주면 사례하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방법이라서.”
“어쩔 수 없지.”
사내는 흔들리는 배에서 연거푸 토악질을 하다가 지친 얼굴로 다시 말했다.
“난, 블리잭이야. 당신은?”
“도현입니다.”
배를 탄 지 몇 시간 만에 둘은 이름을 교환했다.
“죄 짓고 도망가는 거 아니지, 당신?”
“그렇게 보입니까?”
“죄 짓고 다크캐슬로 피신해 가는 자식들은 다 얼굴에 쓰여 있거든. 바로 저렇게 말이야.”
블리잭이 갑판 위에서 토악질을 해 대는 많은 사내들을 가리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갑니다.”
“이유가 많아서 좋겠군. 혹시 그곳에 아는 사람 있나?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 말이야.”
블리잭이 은근한 눈빛으로 물었다.
“없습니다.”
“당신도 그럼 시작부터 힘들겠군. 싸움 좀 하나?”
그가 도현의 검을 보며 물었다.
“그건 왜 묻습니까?”
“동료를 모아 보려고. 아무래도 그편이 위험한 곳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다크캐슬에 갔다 온 적이 있습니까?”
“아니. 나도 누군가에 들은 얘기지.”
헛기침을 한 그는 치료한 허벅지 상처를 손으로 눌러 보며 말을 이었다.
“어때? 나와 함께 움직이겠나?”
도현은 흔들리는 배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합니다.”
도현은 가까워지는 육지를 보며 난간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시선이 미치는 모든 곳에 나무 한 그루 존재하지 않았고, 선착장 시설도 없었다.
그나마 반원 형태의 작은 모래사장이 출렁이는 물살에 흰 빛을 내보일 뿐이었다.
여객선을 기다리는 사람도, 시설도 전무했다.
‘황량하구나. 마치 유배지에 온 느낌이야.’
갑판 위에 많은 사람들이 배 난간에 붙어 역사상 가장 위험한 도시인 다크캐슬로 가기 위한 첫 관문을 긴장감 속에 맞이하고 있었다.
배는 육지를 앞에 두고 수십여 미터 앞에서 멈춰 섰다.
“배를 내려라!”
선장의 지시에 우람한 팔근육을 자랑하는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작은 배 두 척을 내렸다.
깊지 않은 강변으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어서 승객들을 작은 배로 옮겨서 육지로 보내려는 것이다.
“하선하시오!”
선장의 말에 백여 명 가까운 승객들이 긴장된 얼굴로 그물처럼 얼기설기 엮인 밧줄을 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서두르시오!”
선장이 재촉하자 사람들의 움직임이 빨라졌고, 두 척의 작은 배는 사람들을 쉴 새 없이 강변으로 옮겼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배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도현은 옆을 쳐다봤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긴 곱슬머리 사내 블리잭이 배 안에서 모은 사람들과 함께 낄낄대고 있었다.
말주변이 좋은지, 그는 모여서 힘을 키우자며 다크캐슬로 도망치는 10여 명의 범죄자들을 모아서 단번에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했다.
“생각이 바뀌었나? 나와 함께하겠나?”
블리잭이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다가와 말을 붙였다. 10여 명의 부하들을 얻자 그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오해를 한 것 같군요. 그냥 봤을 뿐입니다.”
도현은 담담히 말을 하며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뭐, 좋을 대로.”
블리잭은 아쉬울 게 없는지 다시 자신이 끌어모은 사내들과 어울렸고, 도현은 배 난간에 늘어트린 그물 밧줄을 이용해 아래서 기다리는 작은 배에 옮겨 타려고 했다.
“배가 나타났다!”
누군가의 외침에 도현이 뒤를 돌아봤다.
벨버스가 아닌 또 다른 항구도시에서 출발한 배가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도 배다!”
이번엔 왼쪽에서 물살을 헤치며 배가 나타났다.
모두가 다크캐슬로 가려는 자들이 탄 배였고, 얼마 뒤 모든 배에서 내린 수백 명의 사람들로 인해 모래사장은 빽빽해졌다.
모두가 범죄자나 도망자들은 아니었지만, 태반이 그런 자들이었고, 개중에는 안면이 있는 자들도 꽤나 됐다. 그래서 도현은 곳곳에서 인사를 나누는 희한한 모습을 목격해야만 했다.
“자네도 여기 왔나?”
“어쩔 수 없이 왔어. 워낙 급박하게 쫓겨서 말이야, 흐흐.”
수백 명이 모이자 용기백배한 사람들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러 갔다.
커다란 바위에 다크캐슬로 가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어서 그 누구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축제군.’
수백 명의 사람들과 섞여서 다크캐슬로 가는 도현은 왁자지껄 떠들며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봐, 지금 우리 쪽에 10여 명이 있어. 합치는 건 어떤가?”
블리잭은 그 와중에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자신의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 황량한 벌판을 걸었을까, 흐린 하늘이 물러나며 내리던 이슬비가 그쳤고, 기우는 해가 만드는 석양이 수백 명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제법 쌀쌀한데.’
강변과 달리 내륙 안쪽은 찬 바람이 불었다.
석양에 물든 얼굴로 도현은 기차처럼 길게 늘어진 대열에서 이탈해 바깥쪽으로 나왔다.
그가 있던 중심부는 찬 바람을 막아 주기는 했지만, 사방을 둘러싼 사람들로 인해 답답했다. 차라리 외곽에서 찬 바람을 맞더라도 언제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좋았다.
도현은 잿빛 흙이 깔린 벌판을 둘러보다가 멀리 보이는 언덕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판을 가로막듯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언덕은 경사가 완만한 수십여 미터 높이였고, 대열의 앞머리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에 다크캐슬이 있는 걸까?’
같이 걷는 이들 중 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 사람을 찾아내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그는 혼자 추측을 하다가 갑자기 진동하는 땅의 울림에 놀라며 급히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사람들에 가려서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발끝에 힘을 살짝 주고 제자리에서 점프를 했다. 리바운드하는 농구 선수보다 훨씬 높게 점프를 한 그의 시야에 황량한 벌판에 먼지 회오리를 일으키며 맹렬히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포착됐다.
아직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상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지만 도현은 직감했다.
‘몬스터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쳤다.
“몬스터 떼다! 수십 마리는 되는 것 같아!”
“제기랄! 재수도 없군! 다크캐슬까지 가는 길에 몬스터와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언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리 비켜!”
“밀지 마, 이 자식아!”
질서 정연했던 대열은 망가졌고, 서로 몸싸움을 하며 다가오는 몬스터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개중에 넘어진 자들은 뒤따라오는 사람의 발길에 이리 치고 저리 치이다가 피투성이 얼굴로 일어나 그 뒤를 쫓기도 했다.
‘아예 맞서 싸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군.’
결속력이 없는 모래성처럼 제각기 살기 위해 허물어진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던 도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몬스터 떼를 노려봤다.
이해도 됐다.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는 수십 마리의 들소를 닮은 육중한 몬스터들의 위용은 대단했다.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목숨을 바쳐 앞장서서 저들과 싸울 인물들은 이곳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살기 위해서 도망쳐 온 다크캐슬.
“뭐 하고 있어? 안 도망가?”
대열 후미에 있다 부리나케 도망가던 블리잭이 몬스터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는 도현을 보고 소리쳤다.
도현은 검 손잡이를 놓으며 천천히 뒷걸음치다가 앞선 사람들처럼 언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잡아 그 기운을 흡수해 내공을 키워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아직 달려오는 몬스터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수도 적지 않았다.
홀로 수십 마리나 되는 몬스터를 무리해서 상대하다 위험을 초래할 이유가 지금은 없었다.
두두두두두!
말처럼 빨리 달려오는 몬스터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우오오오!
도현은 뒤를 돌아다봤다.
초원에 무리 지어 다니는 들소처럼 두 개의 뿔이 돋아난 몬스터들은 눈빛이 붉었고, 사자와 같은 이빨을 소유하고 있었다.
네발로 육중한 몸을 받치고 달려오는데, 그 기세가 가로막는 건 그 무엇이든 뿔로 들이받고, 날카로운 이빨로 찢어발길 듯했다.
“크아아아!”
“살려 줘!”
말처럼 빠른 녀석들에게 따라잡힌 사람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질러 댔다.
퍼어억!
50cm도 넘어 보이는 창 같은 뿔에 가슴이 관통된 사내가 괴로운 표정으로 들고 있는 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들소를 닮은 몬스터의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튀었지만, 몬스터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흉포하게 뿔을 좌우로 흔들었다.
대롱대롱 뿔에 매달려 있던 사내의 상체가 뿔의 날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종이처럼 찢어졌고,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사내는 괴로운 비명을 지르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들고 있던 도끼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우적우적.
몬스터들은 그렇게 죽인 사람들을 달리면서 입으로 씹어 먹었다. 달리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도망가는 자들을 모두 죽여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그 잔인함과 저돌성에 도현은 눈빛이 깊어졌다. 집요한 놈들이었다.
‘결국 따라잡힐 거야.’
가깝게 보였던 언덕은 생각보다 멀었고, 수십 미터 높이의 언덕 위에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은 그 전에 빠르기 그지없는 들소 닮은 몬스터의 공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응을 해야 돼. 안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죽게 될 거야.’
사람들 대부분은 방패와 도끼, 검, 활, 창 등으로 무장을 했다. 대륙에서 웃으며 다니던 순박한 사람들이 아니라 칼을 들고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험상궂은 인상만큼만 제대로 무기를 다룰 줄 안다면, 몬스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생로를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한다면 도현도 한 팔 거들 마음이 있었다. 몬스터 잡는 게 그에게 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저들이 각자 살기 바빠 나 몰라라 도망간다면 도현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내공을 발휘해 도망친다면 그 한 몸, 여기서 몸을 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마음을 정한 도현은 앞서 가는 자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소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블리잭이 먼저 선수를 쳤다.
“몬스터가 너무 빠르다! 피할 수 없어! 싸우자!”
웅변을 어디서 배웠는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제자리에 딱 서서 힘 있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사방팔방으로 퍼져 갔다.
검을 빼 든 그는 바위 위에 뛰어올라 다시 외쳤다.
“싸우지 않고는 한 사람도 못 산다! 싸우자! 나만 살자는 마음을 버리자! 나는 범죄자지만 의리는 있다! 너희들도 그렇지 않나! 싸우자! 사내답게 싸우고 하늘에 운을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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