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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86화 (86/575)

[86] 디 임팩트 4권 11화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든 얼굴로 그는 도망치는 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미 달리느라 지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크캐슬로 오는 자치고 가벼운 몸으로 오는 자는 드물었다. 각기 등에 무거운 짐 가방이 하나둘씩은 있었고, 몸을 지킬 만한 무기와 방어구도 준비해 왔다.

당연히 평소보다 달리는 게 힘들었고, 지쳐 있는 상황에서 블리잭의 외침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더구나 블리잭은 제일 선두에 도망치던 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싸우자.’라고 외치는 말은 굉장한 파급력이 있었다.

게다가 블리잭이 배 안에서 포섭한 10여 명의 수하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며 무기를 하늘 높이 흔들고 ‘같이 싸우자!’라는 외침을 계속 반복했다.

“그래, 싸우자! 더럽게 빠른 놈들이라서 언덕까지 못 가!”

“맞아! 뭉쳐서 싸웁시다!”

죽은 사람을 제외한 200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비장한 얼굴로 그의 주변으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도현도 끼어 있었다.

‘사람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군.’

같은 배를 타고 온 도현은 블리잭의 상기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을 노려봤다.

‘좋아, 한번 해 볼까.’

그가 검을 뽑을 때, 다른 사람들도 싸울 의지를 불태우며 짐을 풀고 각기 방패와 무기 등을 꺼냈다.

“개잡놈의 새끼들! 다 죽여 버려!”

“우리가 어떤 놈들인지 보여 주자고!”

서로를 격려하는 도망자들의 목소리가 벌판에 가득 메아리쳤다.

크르르르, 우어어어어.

인간들이 싸울 준비를 하자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더 빨리 달려왔다.

“쏴!”

블리잭의 커다란 목소리에 활을 소지한 수십여 명이 일제히 활을 쏴 댔다.

그들은 철저하게 몬스터의 다리를 노렸다. 몬스터의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처음 부딪힘에 반 이상은 죽어 나자빠질 것이다.

피피피핑!

목숨이 걸린 싸움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다들 초집중한 상태에서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빠른 손놀림으로 화살을 계속 쏟아 댔다.

쿠쿵!

가죽과 살을 뚫고 들어간 강철 화살촉이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모르지만 저돌적으로 달려오던 들소를 닮은 몬스터 한 마리가 앞다리가 꺾인 채 픽 쓰러졌다.

쿠쿵. 쿵쿵.

뒤이어 여러 마리의 몬스터들이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수는 다 해야 10여 마리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몬스터들이 전체적으로 주춤거리며 제자리에 멈춘 것이다.

“이때다! 쓸어버리자!”

블리잭이 용감하게 앞장서서 나가자 사람들이 우르르 각종 무기들을 들고 달려 나갔다.

200여 명이 만드는 함성은 거대했고, 필사적이었다.

몬스터 몸에 올라타 검을 휘두르는 사람, 창으로 눈을 찌르는 사람, 도끼로 두개골을 내려찍는 사람.

험악한 삶을 살아온 대다수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몬스터 뿔에 방패가 부서지고 그 뒤에 숨은 사내의 얼굴에 뿔이 박혀 들어갔다. 몬스터는 뿔을 움직여 시체를 던져 버린 후, 입을 크게 벌려 검을 든 사람의 팔도 덥석 물었다.

“으아악!”

톱니 같은 몬스터의 입에 팔이 물려 절단된 사내는 비명을 지르면서 허리에 단도를 꺼내 몬스터 턱을 집중적으로 쑤셔 댔다.

“같이 죽자.”

독기 오른 사내는 잠시 뒤 힘없이 뒤로 넘어졌다.

파직!

몬스터 앞발이 그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울 때 도현 역시 폭발적인 몸놀림으로 몬스터를 죽이고 있었다.

푹. 쉬이이익.

도현의 검이 몬스터 옆구리에 깊숙이 박혀 한 일자로 번개처럼 움직였다.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주저앉는 몬스터 곁을 다시 도현이 스치듯 지나쳤고, 몬스터 머리가 반쯤 잘려서 바닥에 걸쳐졌다.

타투를 통해 흡입된 몬스터의 기운은 험벨보다 조금 부족했다. 죽음의 대지에 있는 몬스터들은 약한 몬스터도 험벨보다 강하다고 들었는데, 이 들소를 닮은 몬스터들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캬아아!

옆에서 몬스터가 긴 뿔로 공격하자 도현은 뒤로 몸을 날려 피한 뒤 반대편에 있는 몬스터를 공격했다.

그는 사람들과 뒤섞여서 싸우지 않았다. 몬스터 후미로 홀로 진입해, 몬스터 한가운데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것이다.

‘네 마리.’

눈가에 튄 몬스터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낸 그는 다시 먹잇감을 찾아 몸을 날렸다.

달리지 않고 한데 뭉쳐 있는 들소를 닮은 몬스터들은 그 움직임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서 아까 보였던 파괴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몬스터가 무리 지어 달리기 전에 최대한 수를 줄여 놔야 돼.’

정신없이 몬스터 수를 줄이고, 한편으로는 내공을 키우던 도현은 앞에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죽은 몬스터 몸 위에서 전방을 확인했다.

‘음.’

어느 정도는 버틸 줄 알았는데, 그 짧은 틈에 싸우는 사람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안 되겠어. 앞으로 가야겠어.’

몬스터들이 한 발 한 발 전진하며 긴 뿔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곧이라도 몬스터들이 울부짖으며 앞으로 달려갈 것 같았다.

50여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 중 후미에 있던 스무 마리 정도를 죽인 도현은 비호같은 몸놀림으로 사람들 앞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번개같이 검을 휘둘러 그 단단한 몬스터의 뿔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뿔이 사라진 몬스터의 좌우에서 도끼와 검이 날아들었다.

퍼퍼퍽! 푸욱!

네 명이 달려들어 몬스터의 온몸을 난도질했고, 도현은 다시 몸을 날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며 몬스터를 상대해 갔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이는 그의 활약에 사람들은 그제야 도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싸우기 바빠서 몬스터 후미에서 싸우고 있는 도현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현을 칭찬할 여력이 그들에겐 없었다. 살아남은 수는 불과 50여 명도 안 됐고, 도현 혼자서 남은 몬스터들을 한 번에 다 상대할 수는 없었다.

도현이 몬스터를 상대할 동안 그들 중 누군가는 죽어 나가야 한다.

해가 지고 달이 빛을 발했다.

마지막 몬스터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도현은 날이 상한 검을 내려다봤다. 손질을 하지 않고는 다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단단한 몬스터의 뼈를 가르고. 뿔을 여러 번 잘라 낸 결과였다.

그는 주변을 돌아다봤다.

‘모두 죽은 건가?’

허탈하고 한편으로는 황당했다.

같은 배를 타고 온 많은 사람들이 시체로 변해 달빛을 받고 누워 있었다.

수십여 명은 살 수 있었다.

다만 운이 없게도 같은 종류의 몬스터가 또 나타났다. 그것도 훨씬 강한.

어디선가 달려온 10여 마리의 몬스터들은 크기도 훨씬 컸고 힘이 넘쳤는데, 도현은 그들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느라 수십여 명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전멸.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얼굴로 돌아섰다.

특별히 정이 붙은 사이도 아니고 그들의 삶 따위는 관심도 없었는데, 최후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 이 사람들에 대한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이봐.”

돌아서던 도현이 흠칫하며 목소리가 흘러나온 방향으로 뛰어갔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사람이 죽어 가는 얼굴로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다, 당신 잘 싸우던데…….”

“조금 싸울 줄 압니다.”

도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아 줬다. 뭔가 손을 써서 구해 주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사내는 머리 한쪽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그 상태로 죽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털북숭이 사내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을 했다.

“그, 그 개자식 좀 호, 혼내 줘.”

“누구 말입니까?”

“싸, 싸우자고 해 놓고 제 놈 부하들과 도, 도망친 놈.”

도현의 눈이 번뜩였다.

2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싸움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돼 도망갔었다. 그때 그는 몬스터 후미에서 싸우고 있었고, 자세히 그들을 살펴보지는 않았다. 도망자와 범죄자 들이 대부분인 200여 명이 넘는 전투 인력 중 그 정도는 충분히 이탈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에 도현은 더 집중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죽어 가는 사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의 심기를 묘하게 자극했다.

‘설마, 그자가?’

도현은 블리잭을 떠올렸다.

“바위 위에서 싸우자고 외치던 그 사람 말입니까?”

“마, 맞아. 비겁한 자식. 싸, 싸우자고 해 놓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놈이 도망가다니.”

털북숭이 사내는 낮게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그 자식 잔머리는 대, 대단해. 결국, 살아남았잖아. 하지만! 혼내 줘. 친구, 부탁일세. 억울하잖아.”

크게 기침을 한 그는 도현이 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그의 부릅뜬 두 눈을 감겨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묵묵히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언덕 정상에 오른 그는 아주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를 발견했다.

다크캐슬로 보였다.

다크캐슬

불빛이 보이는 도시는 언덕에서 볼 때는 가까운 듯했지만, 실제로는 꽤 걸어가야 할 먼 곳이었다.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도현은 몇 걸음 걷다가 발밑에 밟히는 풀의 감촉에 우뚝 멈춰 섰다.

배에서 내린 지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생기를 뿜어내는 식물의 등장에 도현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허리를 숙여 풀잎을 하나 꺾어 만져 보던 그는 흙도 만져 봤다.

그가 지나쳐 왔던 잿빛 흙이 자갈처럼 느껴졌다면, 이 흙은 잘게 부서지고 부드러웠다.

도현은 근처에 있는 바위에 앉아 짐 가방에서 수통을 꺼냈다. 갈증을 해소하고 수통의 물을 얼굴에 뿌렸다.

얼굴을 뒤덮은 끈적끈적한 몬스터 피를 닦아 낸 도현은 상체를 보호해 주던 가죽 갑옷을 벗어서 전투 중 입은 부상을 확인했다.

오른쪽 어깨가 퉁퉁 부어 있었다.

‘어깨가 으스러질 뻔했어.’

몬스터의 뒷발질에 비껴 맞았는데도 어깨가 욱신거리고 아팠다. 제대로 맞았다면 검을 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갑옷을 다시 입은 그는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 언덕에서 본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휘이이이.

찬 바람에 잡초들이 이리저리 휘날렸고, 벌목된 나무들은 나이테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싹 말라 죽었다.

어떤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과거, 숲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었다.

‘황량한 벌판과 다름없어.’

숲이 없으니 그곳에 서식하는 새도, 짐승도, 곤충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몬스터를 경계하며 사라진 숲의 길을 따라 걷던 도현은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불빛이 있었다.

‘뭐지?’

불빛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

‘사람이다. 횃불이야.’

횃불을 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다크캐슬에서 나온 사람들인가?’

언덕에서 본 도시가 멀지 않았다. 저들이 나타난 방향은 그곳이었다.

우르르 몰려오던 그들은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도현을 발견하고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혹시, 언덕 너머에서 오는 길이오?”

횃불을 든 건장한 사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다크캐슬에서 나왔습니까?”

“그렇소.”

도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언덕에서 본 불빛의 도시가 다크캐슬이 맞았다.

“보망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당신도 그곳에 있었던 거요?”

“보망이라면 두 개의 뿔이 난 소를 닮은 몬스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소. 그놈들이 보망이오.”

도현은 횃불을 든 수많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무기를 저마다 하나씩 갖춘 모습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돕기 위해 나온 사람들 같았다.

‘무법자 도시로 알려진 곳인데, 의외의 모습이야.’

“어떻게 됐소, 그곳은?”

횃불을 든 사내가 재촉하듯 물었다.

“안타깝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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