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디 임팩트 4권 12화
“수백 명이라고 들었는데.”
“몬스터 수가 워낙 많아서요.”
“그럼 당신만 산 거요?”
도현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들은? 아직도 그 장소에 있소?”
“그때 있던 몬스터들은 전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잘됐군.”
“네?”
도현은 횃불을 든 사내가 미소를 보이자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위험한 몬스터도 죽고, 외지에서 첫발을 디딘 녀석들도 떼거리로 죽고. 아주 챙길 게 많겠어, 흐흐.”
도현에게 이것저것 캐묻던 사내는 더 이상 도현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서둘러 싸움이 벌어진 곳을 향해 뛰어갔고, 주변에서 귀를 열어 놓고 도현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던 다른 사람들도 뒤처질세라 사내의 뒤를 쫓아갔다.
그들 중에는 여자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잠시만요. 지금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었습니까?”
“뭔 개소리야? 나 살기도 바쁜데. 저리 비켜! 늦으면 챙길 물건도 적어진단 말이야!”
도현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잠깐 사이 불어난 인원은 근 천여 명 가까이 됐고, 그들이 도현 앞에서 사라지는 건 촌각에 불과했다.
도현은 어이가 없었다. 알고 보니 저들은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오해를 했다.
“심각한데.”
도현은 멀어지는 저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들의 한 단면만 보더라도 다크캐슬에서 누군가의 도움이나 인정을 바란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시끄러운 말다툼에 뒤를 돌아다봤다.
횃불을 든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과 열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너 정말 맞고 싶냐! 집에 안 가!”
“형! 나도 도울게.”
“돕긴 뭘 도와! 갔다가 위험하면 잽싸게 도망쳐야 하는데, 넌 짐이야. 짐!”
“나도 잘 달리잖아!”
“잔말 말고 집에 가 있어. 엄마 아빠 아시면 나만 혼난다고!”
“싫어, 같이 가!”
“위험하다고, 자식아!”
형에 말에도 동생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게 정말!”
청년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동생의 머리를 때렸다. 소년이 횃불을 떨어트리며 바닥에 뒹굴었다.
“아야! 왜 때려! 형이면 다야!”
“그래, 다다! 꼬우면 니가 형으로 태어나든가!”
청년은 넘어진 동생의 엉덩이를 다시 걷어찼다.
“너! 좋게 말할 때 집으로 가. 알았어!”
“씨이! 나도 도울 수 있는데.”
소년은 울먹이며 일어나더니 왔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저 자식 정말.”
청년은 바닥에 떨어진 동생의 횃불을 챙겨서 얼른 동생에게 뛰어갔다.
“들고 가.”
“형, 조심해.”
“걱정 말고 얼른 집에 가 있어. 길이 멀어서 늦을 거야. 아버지한테도 말씀드리고.”
어린 동생이 횃불 하나를 들고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청년은 도현을 힐끔거리다가 슬쩍 물었다.
“몬스터 다 죽은 거 맞죠?”
조금 전 도현이 사내와 나누는 대화를 사람들 틈에 섞여서 들었나 보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랬다.”
“용케도 사셨네. 그런데 왜 손이 그렇게 허전합니까? 죽은 사람들 물건 좀 챙겨 와야지. 그럴 틈이 없었나?”
도현은 그의 도발적인 말투에 피식 웃다가 조용히 물었다.
“동생 혼자 보내는 게 위험하지 않아?”
“외지인이라서 잘 모르나 본데, 이 근방에 몬스터 안 나타난 게 몇 년인데요? 언덕 너머나 아직 몬스터들이 간간이 출몰하지.”
청년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도현을 바삐 스쳐 지나갔다. 서두르지 않으면 앞서 간 사람들에게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아야!”
청년은 머리를 만지며 뒤를 돌아다봤다.
“뭐야 당신! 당신이 지금 돌 던진 거야?”
“아닌데.”
도현이 딴청을 피웠다.
“이런 썅! 여기 누가 있다고!”
청년은 허리에 꽂아 둔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도현을 노려봤다.
“당신! 조심해. 내가 바빠서 그냥 가는 거야.”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왜 묻는데?”
“난 이곳이 처음이다. 궁금한 게 많아. 너라면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닌가?”
도현이 팔짱을 끼며 청년을 쳐다봤다.
“그런 거라면 당신이 사람 잘 봤어. 그런데 난 지금 바빠. 돈 벌여야 돼.”
청년이 코웃음 치며 돌아섰다.
“사례를 하지.”
“사례?”
청년이 걸음을 멈췄다.
“내일 하루 동안 나와 동행하면서 도시의 기본 구조에 대해 알려 줬으면 좋겠어. 구석구석 말이야. 내가 궁금해하는 것도 충실히 답변해 주고. 물론, 그 전에 지금은 다크캐슬까지 날 안내해 줘야겠지. 금화 한 개를 주지.”
“금화 한 개!”
청년의 눈이 커졌다.
“하겠나?”
청년은 잠시 고민을 했다. 수백 명 가까운 외지인들이 다크캐슬로 오다가 오늘처럼 떼죽음당한 일은 매우 드물었다. 무사히 넘어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재수 없이 몬스터와 맞닥트려 죽더라도 수십여 명이 죽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보망이 전례 없이 한꺼번에 많이 나타나서 외지인들이 많이 희생된 것 같았다.
그들이 지녔을 짐과 돈주머니를 생각하면 금화 한 개가 평소처럼 큰 값어치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간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그들과 경쟁해 금화 한 개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뭔가를 획득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칼부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발밑을 봐.”
도현의 말에 청년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머리를 때린 게 작은 돌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횃불을 가까이 대 보니 반짝이는 금화였다.
“미리 금화를 주는 겁니까?”
청년이 더듬거리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다크캐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다 주고 싶지 않은데, 은화가 없어서 말이야. 하겠나?”
청년은 금화가 가짜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하죠.”
청년의 대답에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혼자 걸어가는 청년의 동생을 바라봤다. 제법 멀어졌지만 횃불 때문에 소년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보였다.
“난 도현이다. 이름이 뭐지?”
“에드요.”
“그래, 에드. 얼른 가면 동생하고 같이 다크캐슬에 들어갈 수 있겠어.”
“네, 제가 안내할게요.”
말투가 공손하게 바뀐 에드가 손에 든 횃불로 도현의 앞을 밝히며 빠른 걸음으로 동생의 뒤를 쫓았다.
“야! 토밀.”
“어? 형!”
풀 죽은 얼굴로 혼자 다크캐슬로 향하던 토밀이 걸음을 멈추고 다가오는 형과 도현을 쳐다봤다.
“안 가? 거기?”
“거기 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어서.”
“그게 뭔데?”
“안내인.”
“그게 뭐야?”
“자식이, 안내인이라고. 형이 이분에게 다크캐슬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기로 했거든.”
“어어, 그렇구나. 나도 할 수 있는데.”
“넌 빠져라.”
동생을 슬쩍 째려본 에드는 도현에게 동생을 소개시켜 줬다.
“토밀이에요. 가시죠.”
에드는 동생을 꼬리처럼 달고서 도현과 다크캐슬로 향했다.
밤이어서 전체적인 도시의 윤곽을 가늠해 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일단 도현의 첫 느낌은 크다는 것이었다.
폭이 30m 정도 되어 보이는 깊고 넓은 강이 도시 북쪽을 제외한 외곽을 해자처럼 감싸며 흘렀고, 두 개의 돌다리가 그 강에 세워져 있어서 넓은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물론, 도현의 눈에는 다리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다리는 그가 있는 곳에서 거의 반대편에 있다고 에드가 설명해 줬다.
‘성벽이 없어.’
눈앞에 도시는 폭 넓은 강으로 보호가 됐고, 안쪽으로는 수없이 많은 집들이 쭉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도시 북쪽으로 산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성이 하나 보였다.
달빛 아래 고고히 서 있는 성은 다크캐슬로 도시 이름은 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저기엔 누가 살지?”
도현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천천히 다리로 다가가며 물었다.
“스므차 성주요. 이 도시에서 제일 강하고 영향력이 센 사람이죠.”
에드는 두려운 눈빛으로 그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했다.
“스므차 성주는 도시의 일반인들이 죽든 죽이든 신경 안 써요. 도시 안에 있는 자기의 구역 안에서 조용히 웅크린 채 성을 다스리고 있죠. 그의 부하들은 용맹하고 강해서 이 도시의 어떤 세력도 저 멋진 성을 감히 탐하지 못해요.”
도현은 고개를 들어 성을 다시 응시했다.
에드의 말만 들으면 스므차 성주가 마음만 먹으면 도시를 완전히 통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방치 하듯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저씨도 도망 왔어요? 무슨 죄 짓고 왔어요?”
형의 뒤를 졸졸 쫓아오던 토밀이 다리 앞에 선 도현에게 물었다.
“토밀! 조용 안 할래?”
에드는 도현의 눈치를 보며 동생을 나무랐다.
“죄송합니다. 아직 어려서요.”
“괜찮아. 원래 그런 도시고 오는 사람들이 그런 거 아니겠어?”
담담히 대꾸한 도현은 강 위에 우뚝 서 있는 다리를 살폈다. 수십여 개의 돌기둥이 촘촘히 다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깊고 넓은 강에 그런 돌기둥을 세우고 다리를 놓으려면 보통 인력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가 다리를 놓았지?”
도현이 다리를 건너며 물었다.
“고대인요.”
앞서 걷던 도현이 뒤돌아봤다.
“고대인?”
“예.”
에드가 뒤에서 장난치는 동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여기 다리뿐만 아니라 안에 도시, 그리고 스므차 성주가 사는 성까지 모두 고대인들의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도시가 얼마나 넓은지 몰라요. 군데군데 거대한 광장도 여러 개 있고요.”
리드만에게 고대인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고 듣긴 했지만, 설마 다리부터 안에 있는 도시 전반적인 부분이 모두 고대인들의 흔적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폭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
오래전에 존재했다 역사 저 이면으로 사라졌다는 고대인이 남겨 둔 돌다리를 건넌 도현은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세워진 개선문처럼 보이는 커다란 아치형의 문을 통해 마침내 다크캐슬에 발을 디뎠다.
성의 이름을 따 다크캐슬이라고 불리게 된 도시는 시끄럽고 요란스러웠다.
도처에 술에 취한 사람과 싸우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벽에 기대 죽어 가는 자도 있었다.
에드와 토밀은 그런 모습에 익숙했는지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꼭 여관에서 자야 돼요?”
도현이 여관으로 안내를 부탁하자 에드가 은근슬쩍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르고 저지르는 실수가 몇 가지 있어요. 그중 하나가 여관에 머무는 거죠. 엄청 비쌉니다. 며칠 머물다 보면, 수중의 돈이 금방 사라질걸요. 그 뒤에는 집 한 칸 마련할 돈도 부족하게 될 거예요. 물론, 돈이 아주 많다면야 그런 건 상관없겠지만요. 돈 많아요?”
“많지는 않은데, 당장 쉴 만한 곳이 없잖아. 배도 고프고 말이야.”
도현은 금화 열세 개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에드의 이어지는 말에 그는 생각을 바꿨다.
“여관에서 하루를 머물면 금화 한 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무 비싼데. 왜 그렇지?”
도현이 놀라며 물었다.
“지내시다 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먹는 게 늘 부족해요. 본토의 음식값과 비교해서는 안 돼요. 그런데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아무리 비싸도 음식값이 하루에 그렇게 많이 나갈 수는 없죠. 방을 제공한다고 해도요.”
에드는 저만치 보이는 2층 집 여관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좌우를 살피며 도현에게 속삭였다.
“실은요, 여관을 장악한 자들이 일부러 비싸게 돈을 받는 거예요. 다크캐슬을 처음 방문하는 외지인들의 등을 쳐 먹는 거죠.”
“모든 여관이 다?”
“네. 다 한통속이에요. 그리고 돈을 못 내겠다고 하면, 패거리들을 동원해서 쓱싹!”
에드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죽어 나간 외지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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